우리 모두의 탄생 신화
내 아이의 탄생신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2
내가 태어난 해인 77년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수출 100억불을 달성한 해였다고 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에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이메일 주소를 부여했다. 대학교 다닐 때 검색엔진이라는 것이 등장했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기 위해 html 언어를 배웠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빈곤에서 풍요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평생직장보장에서 무한경쟁 이직의 시대로, 결혼과 출산이 의무에서 선택으로 넘어가는 변곡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어찌보면 발전한 기술과 나라 경제의 혜택을 받았고 어찌보면 세상풍파 적응하느라 조금은 불쌍한 낀세대이다.
내가 우리 아이를 만난 것은 어찌보면 내가 낀세대여서 가능했던 일 같다. 내 친구들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인 30대 초반에 결혼한 탓에,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나면서 남들처럼 아이가 있어야 하니 임신을 계획했었다. 당시 야근도 많이 하고 회사에서 나를 괴롭히는 (나이 많은) 동료도 있었고 병원을 다니면서 인공수정을 두번(기억이 가물거리나...) 시도해 임신이 되었으나 화학적 유산도 됐다.
화학적 유산을 계기로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그런데, 거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인터뷰 볼 때는 몰랐는데 보기보다 뚱뚱하네요" 같이 일하게 될 상사의 첫 인사였다. 그때 싸한 느낌이란. 딱 2주 쯤 일하고, 여기는 아니다 느끼고 이런 저런 일을 거쳐 1달 반만에 그 회사를 관뒀다. 남편에게는 여기를 다니다가는 아이가 절대 안생길 것 같고 게다가 암도 생길 것 같은데, 백수 잠깐 해도 되겠냐며 퇴사를 통보하고 바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3달 즈음 쉬고,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일도 재밌엇고 동료들하고도 합이 잘 맞아서 다니면서 무척 즐거웠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고위험 산모에 속하는 만 35세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허송세월할 일이 아니다 싶어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때 선생님께서 이런 저런 검사를 하시더니, 시험관 아기를 시술해 보자며 잘될 것 같다며 자신감을 보이셨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선생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당신은 그간 몇년 동안 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어요.
당신의 목표는 뭔가요? 병원을 다니는 건가요? 아기를 갖는 건가요?"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여러가지로 나와 우리 남편같은 케이스는 시험관 아기 성공률이 높다며 자신감을 보이셨다. 시술을 결정하자 우리 엄마는 나에게 딱 세번만 시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있지도 않은 손주보다는 딸의 건강이 걱정이시라고 했다. 시험관 아기를 시술하는 동안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겪을 각종 어려움을 걱정하시면서 '자식은 없으면 0점, 있으면 100점부터 -10,000점까지' 고생할지 기쁠지 가늠이 안된다고 하셨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나의 임신과정을 가장 걱정해주시던 친정엄마가 끝내 나의 출산후 가장 독박을 쓸 사람이었다는 것을. 엄마를 내 육아과정에 개입시키며 골수 빼먹는 딸이 될줄 알았다면, 난 우리 아이들을 만날 시도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아이를 갖기로 했으니 마음부터 착하게 먹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종교였다. 천주교 세례를 받기로 하고 성실하게 성당에 나가고 기도했다. 아이들을 낳아 성가정을 이루겠다 하느님께 약속드리며 6개월여의 과정을 거쳐 나는 '에밀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 덕이 있으시고 너무 예쁜 아드님을 두셨고, 게다가 커리어에서도 승승장구 하시는 직장 동료분께 대모가 되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하느님의 사랑속에서 그리고 대모님에 대한 존경심 속에서 예쁜 아이를 낳아 꼭 하느님의 자녀로 잘 키우리라, 세례받은 사람다운 결심을 했다.
그리고 첫 시험관 시술 계획이 나왔다. 병원에 자주가야 하니 당시 보스였던 사장님께 찾아가 '사장님 제가 당분간 휴가를 자주 낼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사장님께서 갑자기 정색을 하셨다.
"에밀리(내 직장에서의 닉네임),
휴가를 쓰는 것은 당신의 권리에요.
주어진 일 잘하고 필요할 때 휴가 쓰는 데 내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어요.
휴가를 쓰는 이유를 설명할 이유가 없어요.
앞으로도 일일히 설명하지 마세요."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드렸는데, 플러스로 사장님까지 도와주시기고 계시다니. 사장님은 휴가에 대한 부담도 덜어주셨지만, 당시 내가 병원에 가야할 때 마다 해외 출장을 가 주셨다. 추후, 사장님께서 휴가를 맘대로 쓰라고 하시고, 출장을 자주 가시는 바람에 임신에 성공한듯 하다고 말씀드리자 엄청나게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가들의 탄생은 하늘도 땅도, 심지어 사장님도 도와주셨으니, 정말 이보다 더한 극적인 스토리가 어딨겠는가 싶다.
배아 이식을 하는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나에게 예쁜 수정구슬 같은 배아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둘다 너무 예쁘게 분화되서, 쌍둥이가 될 것 같은데..... 어쩌죠?"
나는 그게 뭐가 문제라고 저렇게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걱정하시는 지 이해를 못했다. 일타이피. 쌍둥이면 좋지. 왜 저러시지?
참으로 용하신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예상대로 정말 쌍둥이가 임신되었다. 남편과 함께 내원해 쌍둥이 임신을 통보 받은 날, 선생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남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쌍둥이 키우려면 돈 많이 들어요. 열심히 일해야 해요."
그때만 해도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인생선배의 조언이었다.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가 한명도 아니고 두명이나 뱃속에 함께 하게 되었다. 항상 외동만 낳아 온 힘을 다해 이 한몸 불살라 키우겠다고 큰소리 치던 나에게 쌍둥이는 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출산 한번으로 아이 두명이 생기니 큰 손해는 아니리...생각했다. 평생 친구를 서로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얼마나 큰일을 해낸 것인가 싶었다. 입덧은 무척 심해 아침마다 변기와 물아일체가 되는 날이 참으로 많았다. 그래도 쌍둥이를 뱃속에 품고 다니는 동안, 두 아이 중 한명은 초음파 찍는 날 마다 등을 보여, 한 아이의 성별은 끝내 모르고 출산하다는 사실이 아이들을 만날 날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었다.
여러가지로 상태가 딱히 나쁘지 않았었는데, 33주 1일 아침에 양수가 터졌다. 사실 초산이라 그 상태가 양수가 터진지도 몰랐었다. 컨디션이 점점 나빠져서 심상치 않다 싶어 오후 4시 쯤 병원 응급실에 택시를 타고 혼자 갔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몰라, 조퇴한다는 남편을 말리고 당당히, 의연히, 응급실에 혼자 간것이다. 5분도 안되어 고위험 산모실로 이동시키는 걸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서웠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어디 출산, 게다가 조산한 이야기에 비견할까. 뱃속에 잘 있던 아이들은 무엇이 불편해서 나오고 싶었을까? 혹시 야근을 해서 그런걸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자책의 연속속에서 폐성숙 주사를 맞아가며 뱃속에서 하루 이틀 더 있게 하기 위한 의료적인 각종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궁수축 억제제와 맞지 않았고, 끝내 폐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33주 5일이 되던날, 주치의 선생님께서 오늘 긴급 수술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마디 덧 붙이셨다.
"자궁수축제 부작용도 심하고, 아이들 폐성숙 주사도 다 맞은 상태여서, 엄마 뱃속에서 하루이틀 먼저 나온다고 큰일 나지 않아요.
엄마가 목숨을 필요는 없잖아요? 오늘 낳읍시다."
그냥 상태가 안좋다 생각했지 목숨까지 거론될 줄이야.
창밖을 보니 11월인데 눈이 내리고 있엇고, 큰 일을 앞두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자 결심했으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걸 막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큰 병원이니, 나랑 우리 아기들을 살려주겠지. 믿고 또 믿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이들이 그 어떤 장애도 없이 건강히 태어나주기만을 기도했다. 내가 제대로된 엄마였던 최초이자 유일한 순간이었던 듯하다.
우리 아이들의 탄생신화의 서막은 이렇게 열렸다.결혼과 출산이라는 사회적 압박, 세례를 통한 하느님과의 약속, 쿨한 사장님, 핵심을 찌른 의사선생님 두분의 용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조건 일순위였던 우리엄마의 희생. 이런 많은 것들이 모여 우리 딸들의 탄생 신화가 시작되었다. 모든 신화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우리 딸들은 잉태부터 성장 초년기의 삶이 마냥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신화의 주인공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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