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포츠 관람을 싫어하는 이유
초등학교때 부터 고등학교 때 까지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배구, 축구, 야구, 농구 등 웬만한 공놀이 종목들의 경기는 자주 봤었다.
또래 여자아이들 보다 스포츠에 대한 상식도 많았고 볼줄도 알았었다. 나는 중학교때였는지... 신일고등학교 1루수에게 반했었고, 그 선수가 대학과 프로야구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보며 마음을 조리기도 할 정도로, 참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무엇이든 계기가 찾아온다. 나에게도 스포츠라는 것을 보지 않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하나는 고 2때 야구 관람. 당시 롯데와 LG의 경기였던 듯하다.(기억이 틀릴지도 모른다.)
한희민 선수라고 당시 꽤 유명한 투수였는데, 그날 제구가 잘 안됐다.
투수코치가 올라와 선수 교체를 하는데 순식간이었다. 공을 빼앗고 새로운 선수가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은 채 1분도 안걸리는 듯 했다.
그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내려간다고? 저렇게 그냥 부품 갈아치우듯 투수를 바꾼다고?
TV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드넓은 운동장에 쓸쓸히 등을 보이며 뛰어가는 투수는 화면에 잡히지 않고 새롭게 등판한 투수만이 큰 전광판을 장식했다.
승패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세계. 입시 공부에 지친 나에게 스포츠는 더이상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 계기. 축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러 갈 기회가 있었다. 그 큰 운동장을 선수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골은 나오지 않고 심지어 눈이 공을 따라다니기에 운동장이 너무 넓어 꽤 좋은 자리인데도 박진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아마 국가대표들의 평가전이었던 듯 한데, 순간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대한민국 축구는 들인 돈에 비해 월드컵 16강 진출도 매번 허덕인다. 왜이렇게 축구 경기를 TV에서 많이 보여주지? 박진감은 비인기 종목들이 더 선사하고 국위선양도 그들이 더하는데 왜 다들 축구에 난리지?
이유가 뭐지?
분명 생산성 높은 사람으로 자라라고 격려도 받고 그러려고 나는 노력을 했으나, 스포트라이트는 꼭 공평하고 공정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시 그렇다.
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지?
그 깊은 고민에 빠지니 스포츠가 재미없어 졌다.
세상의 불공평함은 현실에서 겪으면 충분한데 왜 내가 저걸 보며 스트레스를 받나.
급 모든 스포츠가 재미없어졌다.
남편은 야구를 보길 좋아한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패배하면 못한 선수 비난도 한다. 오늘은 제구력이떨어진 투수를 향해 앞으로 저 사람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듣기 거북했다.
나는 아이들 교육에 나쁘게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물었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다시는 무대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싫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나부터가 쓸모가 없어지고 있다. 업무를 따라가는 것도 허덕이며, 돈이 필요하니 직장은 다녀야 하고 갱년기가 오니 온몸이 아프다.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하고...
쓸모 없으나 쓸모 있어야 하는 세계에서 적어도 밥값 못한다 소리 들을까봐 절절매는 것도 서러운데, 집에서 쓸모에 대한 생각이 들게 하는 대화가 불편했다.
그런데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너한테 한 소리도 아닌데 왜 화를 내냐가 오늘의 부부싸움의 주제였다.
내 쓸모 없어짐이 괜찮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박물관이던 창고든 어디든 들어갈 때가 다가온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어디 틀어박힐 여유가 없는데 자꾸 퇴장하라고 한다. 이 압박을 동년배인 남편은 못느낀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왜 그리 화가 났었나 생각해 본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이해가 안되는 나를 누가 이해해 줄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이해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공허함, 불안감, 공포감에 대해서. 쓸모에 대한 생각이 들때 마다 느껴지는 외로움에 대해서 아무데서도 심지어 내 자신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있다.
난 스포츠가 싫다. 사람이 사는 시간은 과정인데 결과만 봐야하는 스포츠가 싫다. 저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잘한다 못한다로 욕하고 비난받는 선수들의 삶이 그닥 아름답지 않아 보인다.
내가 스포츠를 싫어하던 좋아하던 무슨 상관이랴?
내 쓸모는 내가 이해해야 하며 없어진, 없어질 쓸모도 내가 위로해야 하는 것을.
#쓸모의잔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