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중독자가 계획하지 않은 일들을 마주할 때
나는 늘 다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이번 달, 6개월, 1년, 아니면 더 나아간 시간들에 대한 계획과 목표를 적고 그것을 스스로에게 자꾸 상기시키려는 데 급급했다. 요즘은 당장 이번 주, 그리고 다음 주에 대한 계획만 세우고 이번 달에 꼭 해야 하는 일들만 정리해 둔다. 나머지 일들에 대해선 계획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이런 변화에 있어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금 더 살아보려 한다. 왜냐하면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다행이다.' 하는 마음을 들게 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토론토에서 찾은 첫 직장은 우선 Co-op 기간 중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찾고 이후, 조금 더 오랫동안 정착해서 일할 곳을 다시금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 내게 팝업 스토어에 취직하게 된 건 예상치 못했지만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팝업이 끝나는 시기 또한 연말로 예정되어 있어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면접 과정에서 미리 '아직 어학원에 다니고 있고, 이 기간 동안은 파트타임으로만 일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업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점부터 바로 풀타임으로 근무가 가능하다.'라고 언급하였고, 나의 사정을 배려해 준 매니저 덕분에 나는 학원에 다니는 동안엔 오전 파트타이머로, 이후에는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2년 반 넘게 일은 했지만, 아르바이트 경력은 편의점 3개월, 그리고 일일 주얼리 브랜드 데스크 업무를 본 것이 전부였던 내게 리테일 업무는 모든 게 다 낯설었다. 내게 익숙했던 모습들은 모두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손길이 빠짐없이 닿았다는 뜻임을, 그 일을 하며 매일 깨닫곤 했다. 거기다 언어의 장벽까지..! 어려운 표현이나 단어가 구사되는 건 아니어서, 직원들과 소통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자주 사용되는 문장이나 줄임말들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나 고객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어나 어휘를 기억해 두고, 다음 근무 시 기억한 아주 일부라도 실제 사용해 보기를 반복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너무 흔하게 사용되는 '프리 사이즈 (Free Size)'라는 단어가 외국에선 'One size fits all'라는 단어로 쓰이는 경우처럼, 이미 내게 익숙해져 버린 단어들을 현지화된 단어나 문장들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정도 팝업 스토어 근무가 익숙해질 때쯤, 한 차례의 기간 연장을 끝으로 팝업이 마무리될 시점이 다가왔고, 나의 다음 근무지 찾기는 (Job Hunting)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업무 단톡방에 매니저로부터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해당 팝업 종료 후, 같은 자리에서 방탄 소년단의 캐릭터인 BT21 팝업을 진행할 예정이며, 해당 팝업에서도 이어서 근무를 진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개별적으로 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몇 개월간 잡 헌팅과 인터뷰를 해보면서 다음 근무지를 찾는 데까지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판단한 나는, 다음 팝업 스토어까지 근무를 하고 해당 팝업이 종료됨과 동시에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 기간을 준비 기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첫 번째 팝업을 정리하고, 두 번째 팝업 오픈을 준비하게 되었다. 첫 번째 팝업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 절반 이상이 두 번째 팝업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업무 환경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익숙한 듯 새로운 두 번째 팝업을 오픈을 막 마치고, 이곳저곳에 뿌린 이력서에도 조금씩 반응이 오던 때, 나는 이후 나의 캐나다 생활 그리고 귀국 후 한국에서의 이직에 영향을 미칠 꽤나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놓였다.
그날 나는 마감조였고, 막 마감 업무들을 마치고 다른 친구들과 같이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뒷문으로 나가고 나서,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고 겉옷을 입으려던 차에 매니저가 아니 대표가 내게 말을 걸었다. (첫 번째 팝업에서 나를 채용하고, 매니저로 일했던 상사가 알고 보니 회사의 공동 대표였다는 사실을 엄청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이 두 번째 팝업을 진행하는 동안, 같은 몰 1층에 회사의 신규 매장 오픈을 준비할 예정인데, 내가 그곳에서 Keyholder (슈퍼바이저 직급)로 일해줬으면 좋겠다는, 승진 제안이었다.
처음 승진 제안을 받았을 때는 상당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당시 솔직한 마음은 '나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은 현지인인 데다, 내가 그들에 비해 특출 나게 잘하는 점은 없었던 거 같은데... 왜 나에게 승진 제안을 했을까?'였다. 거기다 그 시점은 같이 일하던 동료의 추천으로 두 번째 팝업 오픈까지의 공백 기간 동안일할 세컨드 잡 면접에 막 합격했던 때였다. 세컨드 잡을 구하고, 승진까지.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덜컥 걱정이 앞섰다.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시즈널잡 (Seasonal Job)이지만, 세컨드잡 (Second Job)도 엄청 힘들게 구했는데.. 괜히 여기저기서 애매하게 일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슈퍼바이저로써 스토어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 그 몇 문장을 들은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내가 얼떨떨하고 당황한 것을 매니저도 알아차린 듯이, 며칠 더 생각해 보고 다음에 자기가 매장에 방문할 때 알려달라고 했다.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던 그날의 저녁은 우선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종종 알고리즘이 성에 차지 않을 때엔, ‘습관’, ‘루틴’ 같은 평소 관심 있어하는 단어들을 검색해 나오는 영상들을 보곤 한다. 어떤 영상에서 방송인 유재석 씨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만약 이 선택을 했을 때 진짜 최악의 상황은 뭐지?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나?"라고 생각해 보고,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일은 하는 방식으로 선택을 한다고 하신 말을 기억한다. (관련 영상) 나 또한 그랬다. 내가 승진을 수락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가장 걱정했던 것과 같이 승진해서 맡게 된 일도, 새로 하게 된 세컨드 잡도 애매하게 하게 되는 것이었고,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 자신이 너무도 싫겠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노력할 것 같았다. 반대로 최고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새로 일하게 되는 매장은 한 아이돌의 IP상품만을 다루는 팝업과 다르게 아시아권의 매우 다양한 상품군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것들을 고객들에게 판매하고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매장을 가꾸는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번에도 최고가 최악을 이겼다.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해도 나는 그것을 감내할 수 있다고, 아니 감내하겠다고 판단했다.
그 결정을 내리고, 나의 일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결정은 끝이 아니라, 이후 결정들을 불러올 시작이었다. 내가 원하던 직무에서 최종 면접 기회를 얻었지만, 나는 이제 막 승진을 한 만큼 팝업 기간까지는 내 몫을 다하고 근무지를 옮기고 싶었다. 다만, 해당 회사는 당장 일 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희망했기에 결국 고민 끝에 제안을 고사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해야 하던 일들에 매진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때, 나는 또 한 번의 승진 제안을 받게 됐고, 부점장 (Assistant Manager)이 되었다.
지나간 일을 계속해서 깊이 생각하는 행위를 '반추'라고 한다고 한다. 잦은 '반추'는 정신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나에게 반추는 나쁜 영향을 주는 것만 같진 않다. 중요한 결정들을 할 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 때, … 다양한 원인들로 하여금 나의 과거를 반추해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돌이켜보면 캐나다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내 계획과 예상대로 된 일이 하나 없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육체적/정신적 건강이 안 좋아지기도 하고, 수백 번 반추하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의 삶이 내가 생각한 대로 펼쳐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2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압축해서 여러 형태의 경험들을 해 볼 수 있었고,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기도 했으니까.
캐나다에 다녀와서 가장 많이 변화한 점은 더 이상 전처럼 세부적으로 나의 1년, 3년, 5년을 계획하지 않는 거다. 굵직하게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정도는 적어두지만, 몇 년도 몇 월에 이걸 하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 해 몇 월 즈음에 이걸 하고, … 같은 세세한 계획은 더 이상 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나의 일상이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 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비록 그 길이 우회로일지라도 말이다!
I think the message that might be more useful is not be happy by doing what you love, but be happy by loving what you do.… But if we decide that whatever work we choose to do is work that will fill us up, isn't a worthy challenge? Then no matter what you do, you are gonna be happy.
제 생각에 더 유용할 수 있는 메시지는 "좋아하는 걸 하며 행복하자"가 아닌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함으로써 행복하라"인 것 같아요. …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든 우리를 채워줄 일이라고 판단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지 않나요?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여러분은 행복할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세스 고딘이 전하는 말, 2025, 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