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진 물은 못 담아도, 엎어진 밀가루는 담는다

우리의 실수는 물이 아니라 밀가루일지도 모른다

by 미적호기심

마음이 속절없이 과거로 향할 때가 있다. 잘해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순간들, 찰나의 차이로 놓쳐버린 기회들, 그리고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은 후회들로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만 선명해질 때다. 그럴수록 마음은 자꾸만 과거라는 막다른 길로 향한다.


그런 생각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 나는 수백 가지 인간사가 얽힌 피터 브뤼겔의「네덜란드 속담」 속에서 유난히 절실해 보이는 한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엎어진 밀가루(피터브뢰겔).jpeg 〈네덜란드 속담〉(Netherlandish Proverbs, 1559) 중 ‘엎어진 밀가루’ 부분 장면


바닥에 엎질러진 밀가루를, 허리를 굽힌 채 다시 주워 담으려 애쓰는 남자. 이미 먼지와 흙과 뒤섞여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머리를 쥔 채 자책은 할지언정, 손을 거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는 만큼, 밀가루를 모으고 또 모은다.


우리에게 이 장면보다 더 익숙한 속담이 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이미 지난 간 선택은 회복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말 앞에서 유난히 쉽게 체념한다.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이미 늦었어.'

그러며 스스로에게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 못한 일들과 후회의 목록을 펼쳐 놓고, 스스로 그어버린 체념의 선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브뤼겔은 이 그림을 통해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정말 모든 것이 완전히 흘러가버린 걸까. 정말 아무것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걸까. 우리 삶의 실수가 과연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물' 뿐이겠느냐고.


어쩌면 우리가 놓친 것들은 물보다는 밀가루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처음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엎어진 물은 못 담아도, 엎어진 밀가루는 아주 조금은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담을 수 있는 '작은 한 줌'의 가능성은 늘 어딘가에 남아 있기 마련이다.


무심코 던진 서툰 말 한마디, 관계의 틈 사이에서 하지 못했던 설명, 차일피일 미뤄둔 계획과 작심삼일로 끝났던 다짐들….


완벽하게 회복할 수 없더라도 그중 몇 가지는 밀가루처럼, 조금은 다시 담아볼 수 있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 ‘조금’이 대단한 성과일 필요는 없다.


미뤄두었던 연락을 한 번 건네는 일, 멈췄던 운동을 하루 10분이라도 다시 시작해 보는 일, 방치해 둔 일정을 차분히 정리해 보는 일. 아주 작은 행위면 충분하다.


그 한 움큼을 모으는 행위 자체가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마음의 태도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이 끝났다’고 단정하는 순간, 사실은 ‘아직 조금 남아 있다’는 가능성까지 함께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 속 남자도 완벽하게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손에 쥘 수 있는 만큼만 차분히 모으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고, 무엇을 다시 주워야 하는지를 분간하면서 말이다.


후회가 시야를 가릴 때, 사람은 종종 손안에 남아 있는 것마저 잃는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물'인가, 아니면 고개를 숙이면 작은 한 움큼이라도 다시 담을 수 있는 '밀가루' 인가.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 후회가 남는 시간이었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모은 그 한 줌이, 다시 삶을 밝히는 첫 불씨가 되어줄지 모른다.


브뢰겔 1번.jpg 〈네덜란드 속담〉(Netherlandish Proverbs), 1559.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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