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08. 치앙마이 올드타운 둘러보기
사쿠라하우스
내가 이렇게 뒤늦은 태국 여행기를 쓰는 이유가 있다. 주변에서” 서유럽 간다, 동유럽 간다, 독일 간다, 스페인 간다 “는 소리를 한다. ‘좋겠다. 부럽다.’ 그래서 갈피 없는 내 마음을 다스리고자, 다녀온 지 5달이 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쓰기 시작한다. Keep going!
방콕에서 침대 기차를 타고 13시간 만에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아침 공기는 가을처럼 냉랭하며 상쾌하다. 숙소는 이틀간 예약을 한 상태였다. 보통은 체크인이 오후 2시인데, 이렇게 일찍 도착했으니 어떻게 할까? 일단 가 보고 그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어, 이렇게 일찍 왔는데도 받아 주네.' 우린 황공한 마음으로 두 손으로 키를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에어컨을 켜고,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점심때가 될 때까지 푹 쉬었다.
툭툭을 타고 온 이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집인데, 매우 깨끗하고 조용하다. 마당에선 너무나도 반듯한 모범생들처럼 꽃나무와 화초들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데, 너무나도 조용한 동네여서인지 그 화초들이 권태로운 듯, 심심한 듯 보였다.
숙소의 벽 한편에는 아담한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놓고 차와 커피, 전기 주전자, 커피잔, 유리컵, 포크, 몽키 바나나를 무료로 제공한다. 그 반대편 벽 뒤로는 빨래하기 좋게 빨래용 싱크대와 세제, 그리고 긴 빨랫줄과 옷걸이가 걸려있었다.
의자에 턱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는 서양인이 보인다. 아일랜드에서 왔단다. 아일랜드? 영국의 지배를 800년이나 받고,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그 역사가 우리와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아일랜드. 그리고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나라? '더블린 사람들? '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썼다는 율리시스?', '톰 크루즈와 니콜키드먼이 주연 맡은 영화, Far and Away?'
난 이 남자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난 그의 발음을 못 알아듣겠다. 저 사람 분명히 영어로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왜 난 왜 이리 못 알아들을까? 우린 서로 웃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신기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며 대화를 하다니.
(지금 생각하니, 아닌가? 아일랜드 사람 아닌가?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아일랜드 사람은 영어와 게일어를 쓴다는데. 영어를 쓰는 나라 사람의 발음을 내가 이렇게 못 알아들을 리는 없잖아.)
숙소에서 나와 좀 걸으니 예사롭지 않은 사원이 나오고 그 바로 옆에 학교가 있다. 체육대회를 하는 것일까, 운동회를 하는 걸까? 학생, 주민, 상인들, 마이크에 대고 외치는 소리. 이들의 에너지가 넘실댄다.
사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절의 이름은 올드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이라는 ’ 왓 프라싱‘이다. 태국말로 ’왓‘은 ’사원‘, ’프라‘는 불상, ’싱‘은 사자를 뜻한다. 한 블로거에 의하면 이 절에 사자 모양의 불상이 있어서 ’ 왓 프라싱‘이라고 했다.
사자 모양의 불상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여 찾아다녀 봤는데 사자처럼 생긴 불상은 못 봤다. 나중에 이해한 바에 의하면 사자는 동물 lion이 아니고 부처님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그러니까 불상이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이 사원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황금빛 스투파, 황금빛 코끼리 상과 하늘을 향해 솟은 첨탑 모양의 건축 양식과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진 스님이라 하겠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섬뜩했다. 노스님들이 죽 앉아 계시는데, 정말 살아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너무나 생생하게 만들어져 다가서기 두려웠다. 가까이 가면 말씀을 하실 것 같았다. 정말 너무나도 생생하게 만들어 놓았다.
거리로 나와 야시장을 돌아다니다 날이 어두워지며 길을 잃었다. 이쪽저쪽 기억을 되살리며 걷다 보니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았고, 어떤 A 건물의 벽을 따라 돌아가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확인차 60대쯤 보이는 퉁퉁한 부인께 저 건물이 A 건물인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우릴 불렀다. 아무래도 우리가 못 찾을 것 같다며 숙소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사쿠라 하우스’라고 말하니, 내가 거기 안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가서 리어카처럼 생긴 툭툭을 타고 왔다. 창살로 된 문을 열며 우리 보고 타라고 한다. 아니라고 우리 갈 수 있다고 하니 아니란다.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워서 타라는 대로 했다. 이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데 이렇게 적극적이시니, 고맙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툭툭을 운전하는 중에 그녀는 우리 숙소에 전화를 걸어 길 잃은 양이 헤매고 있다고 했나 보다.
우린 고마워서 100바트의 팁을 드렸다. 그녀는 한번 사양하더니 씩씩하게 팁을 받고 돌아갔다. 골목으로 걷다 보니 주인이 문 앞에 나와 있다. 주인 아저씨는 우릴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그 아주머니가 엄청 고마웠나 보다. 어떻게 쫓아 오면서 까지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냐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못한다며 나도 그렇지 않냐며 묻는다.
아니, 나는 그 아주머니처럼 할 수 있는데.
낯선 이방인이 길을 잃고 헤매면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이지. 그게 왜 그 한테는 있을 수 없는 감동적인 사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