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생 1막 4장
생테티엔 기숙사에 도착하고 어학원 개학까지 며칠간 나름의 적응 기간을 보냈다. 기숙사 방은 프랑스에서 거주 공간의 최소 합법 기준인 9제곱미터. 벽 붙이 책상 하나, 싱글용 침대 하나, 전자레인지와 조그마한 호텔식 냉장고가 기본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다행히 규모는 작아도 개인용 화장실과 샤워룸이 일체형으로 방 안에 설치돼 있었는데 마치 비행기의 화장실 구조에 샤워기가 하나 달려있는 모양새였다. 건물의 0층(한국식 1층)에는 동전 세탁방이 있었지만 기계가 동전을 먹는다는 소문이 들렸고, 속옷이나 양말은 그때그때 손빨래로 해결을 했다. 중앙난방식으로 벽에 설치된 라디에이터는 항상 뜨끈뜨끈했기 때문에, 세탁물들을 근처에 걸어두면 금방 바삭하게 말랐다.
또한 층마다 공용 주방이 있어서 식사 시간이 될 무렵이면 각국의 학생들이 나와서 간단한 요리를 해먹었다. 누구는 파스타를 삶고 누구는 냄비밥을 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그런 방식이었다. 주방에 테이블이 딱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취식도 가능한 곳이었지만, 대개는 같은 국적의 사람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분위기였다. 하나뿐인 테이블을 어느 그룹이 차지하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쓸 데 없이 눈치를 보면서 방과 주방을 왔다 갔다, 불에 올려놓은 냄비 밥이 타지는 않는지, 혹여나 물이 넘치지는 않는지 그런 걸 신경 써야 했다. 아직 어학원이 개학을 하지 않았고, 어울릴 사람 한 명이 없었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생테티엔 시내의 여러 학생 기숙사 중에서 내가 살았던 꼬똔Cotonne은 시설이 열악하고 저렴한 편에 속했는데, 유학원에서 어학원과 더불어 일괄적으로 선택을 한 것이라 나에게는 다른 옵션이 없었다. 그러나 불평하는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협소해도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그 작은 공간마저 다 채우지 못하는 나의 가벼운 살림살이들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고백컨대, 한국을 떠나기 전 공황 증세가 불현듯 찾아왔다. '불현듯'이라는 부사가 어울릴 만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증상이 어느 날 갑자기, 아주 강력하게 나타났다. 방에 누워있으면 천장과 벽이 점점 줄어들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현실처럼 생생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조만간 죽을 것 같다는 기묘한 생각의 파편들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낯선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불확실한 원인이 일으키는 감정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뚜렷한 얼굴을 내보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의 모습이었다. 공항까지 배웅을 해준 누나와 헤어질 때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지만, 비행기 창밖에서 따라오는 보름달을 보며 엉엉 울었던 건, 단순히 유학길을 떠나는 괜한 헛헛함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는 가족을 못 보겠다는 미스터리한 확신이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걱정과 고민, 내 나라와 가족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홀로 들어가야 할 여정의 초입에서 겪었어야 할 성장통이었구나 싶다. 이렇게 단순한 귀결이 가능한 건, 불현듯 나타났던 그 증상들이 그 좁은 기숙사 방에 살며 다시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막상 겪어보니 사실 별일이 아니었다. 배고프면 쌀을 끓여 먹으면 그만이었다. 고단하면 몸을 뉠 침대가 있었다. 나라는 존재와 내 생각을 구성케한 언어마저 철저히 새로운 것으로 덧씌울 참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이 나에게 만들어준 집을 떠나 또 다른 집을 짓기 위해 재료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기숙사에서 종종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조언을 구하며 대화를 나눴다. 아시아 마트는 어디에 있는지, 어학원 수업은 어떤지, 대중교통 티켓은 어떻게 구입하는지 등의 이야기들. 관광지로 이름난 도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방문할 만한 곳을 추천받지는 못했다.
왜 불어를 배우는지, 어쩌다가 생테티엔이라는 도시를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에서는 대충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나처럼 유학에 앞서 어학을 하려는데 유학원 추천으로 난생처음 모르는 도시에 떨어졌다거나, 아니면 한국의 대학에서 불어 전공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자매결연 대학이라는 이유뿐이었다. 생테티엔이 좋아서라는 대답은 없었다.
대화의 마무리는 한국식으로 언제 한 번 밥 같이 먹자는 말이었다. 몇 층에서 언제 몇 시에 만나요라고 하면 그 층의 공용 주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각자 먹을 것, 요리할 것들을 가져와서 나눠 먹었다. 물론 값싼 와인은 빠지질 않았다. 이렇게 새로운 인연들을 하나씩 맺어 갔다.
어느 날은 동네 꽃집에 들러 화초 하나를 사 왔다.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화초였는데 뾰족한 가시 꽃을 피우는 게 매력이었다.
"왓 이즈 네임 오브 디스 플랜트?"
꽃 집 주인은 이름을 몇 번 말해주다가, 멍하게 어깨만 들썩이는 나를 보며 종이에 적어주었다. 빌베르기아. 이름도 독특하구나 싶었다. 어차피 이름이 있으니 따로 이름을 지어줄 필요는 없었다. 눈길을 헤치고 빌베르기아를 데려왔더니 빈 공간에 생기가 더해졌다. 나의 충실한 밥 친구면서 애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분갈이도 안 해주고 식물을 기를 줄 몰랐던 그때, 빌베르기아는 꽃이 지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어버렸다. 아마 밥을 먹을 때마다, 너도 먹어라면서 물을 많이 주었던 게 원인이지 싶다. 애정 표현도 상대방 봐가면서 적당히 해야 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