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생 1막 2장
프랑스 유학이라니,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2006년, 파리 '두 달 살기'를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에펠탑 전망대에 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파리의 원경 안에 그 간 스쳐간 장소들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어보면서 도시와 다시 만나자 약속했다. 그것은 어느 곳을 여행하든, 일상을 벗어나 만끽한 경험 끝에 다다르는 자연스러운 감상의 한 종류였다. 한 계절만을 겉핥기로 지냈음에도, 파리는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좋은 도시였다. 이방인의 눈에 파리지앙들은 뭔가 예술적이고 자유로워 보였고, 도시의 봄 풍경은 그 안에 자꾸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몇 년이 흐른 뒤, 파리, 더 정확히는 프랑스와의 재회가 마치 우연히 마주친 옛 짝사랑 대상과 커피 한 잔 두고 안부를 묻는 정도가 아니라, 대뜸 고백을 하면서 마구 들이대는 형국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05년, 한국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나는 그 학문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학 동기들과 파전집에 틀어박혀 동동주를 퍼마시는 데에만 아주 열심이었다. 2학기가 되자 그것마저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어느 날은 등굣길에 문득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바로 지하철을 갈아타고 고속 터미널로 가, 그냥 제일 먼저 출발하는 티켓을 끊어 버스에 올랐다.
그날 밤늦게 도착한 곳은 강릉. 다시 물어 물어 시내버스를 타고 경포대에 도착했다. 아무 계획 없이 흘러들어온 바닷가에서는 먼저 숙소가 문제였다. 하룻밤에 2만원이었나, 해변에 가건물로 세워진 단층 모텔에 짐을 풀었다. 여행 채비가 없었으니 가방에 든 건 무거운 <맨큐의 경제학>뿐.
그제야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허기를 채우러 모텔방을 나서는데 동시에 옆방에서 어느 아저씨가 나왔다. 가볍게 목례를 했더니, 아저씨가 물었다.
"혼자 오셨으면 같이 식사나 하실래요?"
내 나이의 딱 두 배였던 서른 여덟의 아저씨. 이혼의 아픔을 겪고 홀로 전국 일주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과 횟집에 앉아 소주를 깠다. 아저씨가 생각보다 술이 약하시네 생각을 했던 기억, 그 외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인생 선배님'으로 시작해서 취기가 달아오르니 서로 '삼촌-조카' 거리면서 신나게 술을 마셨다. 아저씨가 밥값을 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2차는 내가 쐈다. 개불 같은 걸 포장해서 편의점에서 소주 몇 병을 더 사서 경포대 해변에 앉았다. 바다는 검고 파도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따스한 햇볕과 파도 소리에 눈을 떠보니 끼룩끼룩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사람들은 해변을 산책하고, 나는 거기에 누워있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서 주변을 살펴보는데 이 아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치, 삼촌이라 부르라더니 치사하구만, 지 혼자 내빼다니. 부끄러운 것보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는 눈들이 있으니 쪼그렸던 몸을 대자로 펼쳤다. 마치 온몸으로 대자연을 만끽하려는 사람인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다가 겨우 모텔방으로 기어 돌아왔다. 숙취 때문에 옆방 아저씨의 안부를 물어볼 여유도 없이, 종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었다.
다음날 동해안을 따라 속초 바다의 어마어마한 파도를 구경하고, 찜질방에서 하룻밤 더 자고 일어나 일출을 보고,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뒤늦은 방황 끝에 남은 것은 학사경고장. 결국 나는 휴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학교에 냈어야 할 등록금으로 여행을 보내달라고 뻔뻔하게 졸랐다. 세상 공부하고 오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그렇게 파리로 '두 달 살기'를 하러 떠났던 것이다.
군 시절 내내 진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막연하게나마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으니, 경제학으로 복학은 죽어도 못할 것 같았다. 다니던 학교에 순수미술과는 없어서 시각디자인과로 복수 전공을 할 것인지 잠시 고민을 했다. 학과사무실에 문의를 했더니,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했다. 다만 경제학 전공에, 시각디자인 부전공은 전례가 없다고 했다. 입시미술의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 어차피 다시 시작할 것이라면 그게 한국이든 외국이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때 파리 '두 달' 시절에 만났던 파리 보자르 미대생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프랑스 국립대는 학비가 공짜야."
2009년 9월, 2년 약정으로 핸드폰을 만들면서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로에 대한 선택은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흔히 말하는 '사'자(字) 직업이 아니라, 밤새워서 일을 해도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를 그런 직업을 찾으라 했던 부모님. 세계지도를 펼쳐서, 여기에 있는 나라들 모두 가 봐라 했던 말씀까지 귓가에 서라운드로 울리니,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술 유학하러 프랑스에 갈래요! 프랑스는 대학이 무료고 어쩌고저쩌고..."
"가라."
내가 이런 복을 타고 나도 되는 것일까? 어차피 나라에 대한 고민은 의미가 없었다. 집 기둥 뽑아서 갖다 바쳐야 하는 영어권 국가들은 내 상상에는 없는 선택지였다.
아빠, 엄마 감사해요,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해요. 무엇보다 제가 하는 선택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혼자서 나돌아 다녀도 세상 무서우니 가지 마라, 염려하지 않고 저를 믿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요. 그게 품 밖으로 벗어난 게 아니라, 두 분의 품이 너무 커서 저는 그 안에서 맘껏 유랑하는 거라는 걸 알아요.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고, 글로벌한 아들로 성장하기 위해 프랑스 미술 유학을 결정했다. 탕! 탕!
12월 말에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불과 몇 개월 동안 유학에 필요한 준비들은 속속들이 진행되었다. 불어 학원에 등록하여 아베쎄데, 봉주르, 멕씨를 배우고, 유학원을 통해 프랑스 현지의 어학원을 등록하고,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고, 프랑스 문화원에 가서 비자 인터뷰를 하고⋯. 내 인생의 기로를 바꾼 그 일들이 겨우 서너 달 안에 모두 이루어졌다.
떠나던 날, 지방에 계시던 부모님은 공항까지도 나오지 않으셨다. 시골의 터미널에서 버스에 올라 창밖을 보면 항상 나를 배웅하는 부모님이 서계셨다. 매번이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잘 가라, 얼른 또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