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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이은 Sep 17. 2024

bitch가 되...

[비건연애#2] 소개팅 어플을 사용하기로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함께 사주를 봤다. 고등학교 3학년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때의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믿었다. 고3 때는 학교 선생님도 학원 선생님도 엄마아빠도, 내가 아는 어른이란 어른들은 죄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고 싶은 일은 대학교에 가서 실컷 하고 지금은 공부를 하라고. 마치 대학생이 되면 전부 해결될 것처럼. 그러니까 이제 성인이 된 내 앞에 놓인 미래는 멋져야만 했다.


  "너는 성공할 거야. 그리고 네가 앞으로 걷게 될 길은 꽃길일 거야."


   듣기만 하면 믿고 싶어 지는 말들. 그런 말을 남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었다.


 사주를 본 곳은 동네 지하철역 앞에 있었다. 빨간색과 주황색... 그 사이 어디쯤 되는 어정쩡한 색깔의 천막. 연애운, 재물운, 취업운등 각종 운들이 메뉴판처럼 적혀있던 노랑현수막. 밤이면 늘 열려있는 포장마차 같은 곳이었다. 이제 곧 구체적으로 알게 될 나의 창창한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고 기대하며, 친구 둘과 함께 아늑하면서도 비좁은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대와는 다르게 무려 돈까지 지불하고 들었던 첫마디는 "너는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지랄이다!"였다. 뭐야... 이건 내가 기대했던 창창한 미래가 아니라 와장창한 미래잖아... 게다가 친구들 사주 봐주실 때와는 달리 나한테는 갑자기 복식호흡으로 야단을 치듯 말씀하셨다. 그의 목소리 볼륨 차이가 너무 커서 ‘내 사주가 저 정도로 지랄이란 걸까…‘절로 어벙벙해졌다. 그때의 나는 남자친구도 딱 한 번만 사귀어본 게 다였고, 상대방에게 한번 빠지고 나면 진득하게 짝사랑을 하고야 마는 지고지순한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엥 내가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지랄이라고? 그럴 리가? 그거 아닌데~ 틀렸는데~' 하고 속으로 반박했었다. 내 사주를 마지막순서로 보고 포장마차 같은 천막을 나왔을 때, 친구들은 비로소 참았던 웃음을 빵 터뜨렸다. 나는 사주를 엉터리로 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셋이서 깔깔거리며 빙수를 먹으러 갔었다.


  충격적인 첫 말 외에도 “너는 일찍 결혼하면 이혼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너는 시부모님 모시고는 못 사는 사람이니 따로 살아야 한다” (부모님이랑도 같이 못살겠어서 독립한 걸 보면 이것도 맞는 말인 것 같다) 등등의 말들을 하셨었다. 이 별 것도 아닌, 10년도 더 지난 그때의 기억을 왜 꺼냈느냐면, 그가 점지했던 와장창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보니 그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었구나.



  

  H와 헤어진건 5월 초였는데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그동안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안정을 찾게 되니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한 사람이랑 6년이나 만났다니! 한 명당 1년씩 만난다 쳐도 여섯 명이나 만날 수 있었는데! (?) 6년이나 만난 사람과 헤어졌어도 나는 아직 스물여덟이었다. 널려있는 연애의 기회를 잡지 않는 건 마치 내게 주어진 젊음을 손해 보는 일인 것만 같았다. 그래 아무래도 손해 보기보단 낭비하는 쪽이 낫잖아. 기회? 누리겠어. 그렇게 조금은 비장하게 다시 연애시장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막상 연애를 하려고 보니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막막해졌다. 왜냐하면 H와 헤어지고 그만… **페스코 베지테리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전과 같이 논비건이었다면 주변에서 소개도 받고, 자연스럽게 친구의 친구도 만나보고 했을 텐데. 이제 자만추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채식하는 사람은 확실히 비주류니까. 게다가 채식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일반적인 남자들은 나를 연애상대로 보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인위적으로 만나야겠다! 아이폰 앱스토어에 ‘소개팅’ 이란 단어를 검색하고 차례대로 다운받았다. 포기란 없었다. 포기? 는? 배추?를? 셀? 때? 쓰는? 말? 아니던가? 그리고 배추는 채식이니까.


(**페스코 베지테리언: 육류는 먹지 않고 해산물, 유제품, 닭알까지는 먹는 채식 단계)




  어플에 자기소개를 올렸다. 이 어플의 시스템은 프로필을 보고 마음에 들면 친구신청을 하고, 이를 상대방이 받아들여야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신청을 하려면 과금을 해야 했다. 신규 가입자 혜택이라며 내게 친구신청권이 몇 개 지급되었지만, 무작위로 추천되는 여러 남자의 프로필을 보고도 아무에게도… 친구신청권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던 남자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던 남자가 있어도 친구신청을 할 용기가 없었다. 거절당하고 부정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면 선택지란 하나뿐이었다. 친구신청을 먼저 거는 사람들 중에서 고르는 것. 그나마 나에게 먼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내가 채식을 한다고 말해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나를 좀 이해해 보고 맞춰보려고 노력해보지 않을까?


  친구요청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왔다. 그중에서 처음으로 매칭된 사람은 Y였다. 그의 프로필 사진은 어떤 허세나 요즘의 인스타 감성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직했다. 검은색 테두리의 안경을 쓰고 있는 얼굴 사진 한 장. 그리고 좌식 소파에 편하게 앉아있는 사진 한 장. 심지어 닉네임까지 정직해 보였는데, 그의 닉네임은 작업실 청년이었다. 그런 싱거운 첫인상이 좋았다. 무해해 보였달까. 하지만 새로이 연애를 하려는 나의 마음가짐은 오히려 유해했다. H와 헤어지고 하나 다짐했던 게 있다면, 앞으로는 연애할 때 절대.


  ‘돈 쓰지 말아야지.’ 였으니까.


  그건… 그간 해왔던 더치페이 연애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bitch의 탄생이었다.

  그렇게 Y와 유해한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속 안에 흑염룡 말고… 빗취를 품은 채…


** ‘지랄’ 이란 단어는 그때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차별적 표현이므로 지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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