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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드로스치 Mar 14. 2024

환생국으로(2)

논은 구름의 한 귀퉁이를 손으로 꽉 잡은 채 고개를 살짝 내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높이 뜬 구름아래로 깔린 수많은 구름에 가려 플루토는커녕 출입구도 보이지도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구름과 군데군데 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던 논은 출발 전 디아가 입력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 디아?”

“응”

“우리는 환생국으로 가는 건가?”

“그래, 여긴 천상계인데 우리는 그중 환생국으로 가고 있어.”

“나를 기다리신 다는 분이… 그곳에 있는 건가?”

“응, 그분은 환생국을 다스리는 분이셔. 혹시 논, ‘삼신’이라고 들어봤어?”


논은 무의 공간 전에의 삶의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 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지식들은 지워지지 않았는지 불현듯 삼신할머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이를 점지해 주는 할머니?”

“맞아, 그 삼신. 우리는 삼신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아… 잠깐만……”


디아가 허공을 향해 지퍼를 내리고 가방을 열 듯 손을 움직이자 그곳에 새까만 공간이 생겼다. 한 손을 공간 깊숙이 넣은 디아는 한참을 찾더니  ‘아, 여기 있네’ 하며 뭔가를 꺼내 논에게 주었다.


“자, 이거 한번 봐.”

“책?”


디아가 건넨 것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표지의 책이었다. 

황금색으로 쓰였던 제목은 군데군데 뜯겨 제목을 읽기가 힘들었다.

논은 조심히 책 표지를 넘겨보았다. 표지를 넘기자 큰 글씨의 제목이 보였다.


‘환생국의 왕 - 삼신’


논이 소리 내어 그 제목을 읽는 순간 어디선가 깔깔깔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논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하늘에는 자신과 디아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논은 낡은 책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신이 최초의 인간들을 만들고 그 인간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아이를 낳아 인간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인간들 중에 죄를 짓는 이들이 생기자 이를 벌하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죽음을 주었다. 죽음 후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벌을 받거나 천계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는데 많은 영혼들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했다.


이에 신은 특별한 영혼들만 천계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고 큰 죄를 저지르지 않은 인간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중에 신은 죄가 없는데 다시 삶을 사는 영혼들을 특별히 사랑하여 이들의 부모를 직접 선택해 아기를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신은 자신을 도울 새로운 신을 찾게 되고 그를 삼신이라 명한다’


논이 페이지를 넘기자 왼쪽 페이지 가득 중년 여성의 그림이 있고 그 아래 ‘삼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딸이 없었던 한 부부가 치성을 들여 딸을 낳았다. 

이 딸은 부모와 오라버니들이 집을 떠난 어느 날 그녀를 찾아온 스님에게 시주를 드리고 그날 스님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여인의 오라버니들은 혼인 없이 임신한 누이를 죽이려고 하지만 어미는 죄가 없다면 살아날 것이라며 딸을 돌함에 넣었다. 

여인은 돌함 속에서 아이 셋을 낳고 훗날 아이들을 아비에게 보냈다. 

아비를 만난 세 아이는 모든 역경과 시험을 통과하고 사람들에게 재복과 풍요를 주는 ‘제석신’ 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세 아이를 낳은 여인은 ‘삼신’이 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영혼들의 부모를 찾아 점지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훗날 삼신은 환생국을 만들어 환생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였다.’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자 꽃잎마다 색이 다른 꽃 그림이 보였다. 

그저 그림이었지만 논은 그림 속 꽃이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 아래에는 ‘영혼의 꽃’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화려한 빛을 띠는 조그만  것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영혼의 씨앗’이라고 적혀 있었다. 

논은 그 아래 글들을 읽어보았다.


‘삼신이 환생국을 다스린 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수가 늘어 환생을 할 수 있는 영혼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삼신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영혼들에게 열 번의 환생 의무를 주는 한편 열 번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영혼들을 탄생시키는데 집중하였다.

맑은 영혼의 기운이 모이면 무지갯빛을 내는 영혼의 씨앗이 탄생하는데 이 씨앗을 심고 맑은 영혼의 눈물을 뿌리면 100일 후 영혼의 꽃이 핀다. 

이 영혼의 꽃을 인간에게 점지하면 이 영혼은 열 번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영혼의 씨앗과 발아는 오직 삼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기에 삼신은 꽃이 필 때까지 이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환생국에는 점지를 담당할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자 양 페이지 모두 다른 사람의 그림이 보였다. 

왼쪽 페이지에는 앞페이지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두 여성의 그림이 있고 그 아래에도 앞 그림들처럼 ‘삼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논은 두 사람의 그림을 살펴본 후 다시 한 페이지를 넘겼다.


‘동해 용왕이 느지막하게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수많은 죄를 저지르자 화가 난 용왕은 딸을 죽이려 하였다. 이에 용왕의 아내는 딸에게 인간의 탄생을 돕는 일을 가르쳐 왕궁에서 쫓아내자고 하였으나 또 죄를 저지른 딸은 일을 다 배우기 전에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딸은 환생국으로 가 어미에게 배운 데로 새로운 영혼들을 점지하나 아이의 탄생까지는 배우지 못하여 결국 많은 산모와 아이들을 죽이게 되었다.

이에 인간들의 원성이 커지자 신은 다시 한번 삼신을 고르게 되었다.

그는 인간 세계에서 덕을 많이 쌓은 명진국 왕의 딸을 삼신으로 삼고자 그녀를 환생국으로 불러 명진국 왕의 딸과 동해 용왕의 딸에게 영혼의 씨앗을 주었다.

명진국의 딸은 치성을 다해 씨앗을 보살핀 결과 오직 삼신만이 틔울 수 있는 영혼의 씨앗을 틔웠으나 동해 용왕의 딸은 끝내 싹을 틔우지 못했다.

이에 신은 구 삼신에게는 영혼의 씨앗을 만들고 꽃을 피우는 과정을 맡기고 명진국의 딸을 새로운 삼신으로 삼아 영혼의 꽃을 인간에게 점지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해 용왕의 딸에게는 죽은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기었다.

동해 용왕의 딸은 삼신역할을 하게 된 명진국의 딸을 질투하여 삼신이 점지한 아이들에게 병마를 보내 그들을 일찍 저승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세 삼신이 각자 맡은 바 일을 하며 점점 환생국에도 안정이 오게 되었다.’


논이 책장을 한 장 더 넘기자 연혁과 함께 환생국의 역사가 기록되어있고 몇 장을 더 넘기자 생명의 꽃과 영혼의 씨앗을 키우는 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이 있었다. 다

시 앞으로 돌아가 연혁을 읽으려는 데 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거의 다 왔네.”


논이 책을 접고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구름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사라지고 아래에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디아의 손짓에 맞춰 구름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고도를 낮췄다. 

구름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상의 모습이 뚜렷 해지면서 강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논은 구름 끝으로 이동해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채로 고개만 아래쪽으로 내밀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밭이 보였다. 

빨강 노랑 파랑 주황 색색의 꽃이 가득한 꽃밭을 보고 논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온몸을 관통한 후 코끝으로 다시 빠져나갔다. 

구름은 속도를 늦추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 어느 순간 꽃밭에 있는 사람들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향해 디아가 손을 흔들자 논도 한쪽 손을 살짝 들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구름은 꽃밭을 지나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넓은 광장에서 멈추었다.


“자, 내려볼까? “

“여기는 어디지?”

“응, 여긴 환생국의 중앙 광장이야. 환생국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지. 이 근처에 환생궁이 있어.”

“환생궁?”


디아는 논을 도와 구름에서 내린 후 다시 허공의 가방을 열어 책을 넣고 조그마한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더니 그 안의 액체를 구름 위에 부었다. 구름이 순간 더욱 통실 통실 하게 몸을 찌우더니 부르르 떨었다. 한결 새하얗고 보드라워진 구름은 서서히 위로 올라가더니 인사를 하듯 논과 디아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디아의 안내에 따라 광장 끝으로 이동하자 작은 골목이 보였다.  골목은 다시 넓은 길로 연결되어있고 그 길 한쪽에 동그란 지붕을 가진 큰 건물이 보였다. 오 층으로 이뤄진 큰 건물을  햇살을 가득 머금은 투명 지붕이 감싸고 있었고 마지막 층과 지붕 사이 공간에서는 초록색의 덩굴들이 아래층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환생궁에 온 것을 환영해. “

“그분… 나를 기다리시는 분이 이곳에 계셔?”


디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 건물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아이들이었다.

깔깔깔 거리는 아이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익숙한 듯 디아는 아이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논도 자신에게 뛰어오는 한 아이를 피하며 앞으로 가는데 그 순간 다른 한 아이가 벽 쪽을 향해 돌진하였다.


“위험해!”


논이 소리치며 아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벽에 부딪힌 아이는 그대로 벽속으로 들어가 바로 옆 벽에서 소리 내 웃으며 나오더니 논을 보고 크게 미소를 짓고는 친구들에게 뛰어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논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디아가 홀 중앙에 있는 안내데스크에서 큰 소리로 논을 부르고 있었다. 논이 그쪽으로 다가서자 안내데스크 안쪽에서 한 부인이 일어나며 말하였다.


“여기 아이들은 다치지 않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여기 안내를 맡고 있는 가브리엘라라고 해요. 반가…”

“네? 가브..”

“가브리엘라요.. 아!.” 


가브리엘라는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 아이들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을 높이 올렸다.


“자 이제 그만!!!”  


말과 함께 가브리엘라가 높이 든 손으로 손뼉을 딱 치자 그 순간 로비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며 로비는 순간 조용해졌다.


“자, 이제 이야기할 만하네요. 저는 가브리엘라예요. 그쪽은?”


아이들이 사라진 것이 신기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논을 디아가 툭 쳤다.


“응? 네? 아…네… 저는 논입니다.”

“반가워요, 논. 저는 이곳 안내를 맡고 있어요. 잠시만요. 논… 논…”


가브리엘라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빠르게 넘기며 논의 이름을 찾았다.


“아… 저는 여기 처음이라 서류가 없을……”

“아, 여기 있네요. 논”


가브리엘라가 서류 한 장을 꺼내었다. 


“보자…… 오후 2시에 삼신님과 약속이 되어있네요. 지금 시각이……”


그 순간 가브리엘라 앞 허공에 커다란 시계가 나타났다.


“1시 30분이네요. 삼신님께서 1시에 면담이 있었으니 문 앞에서 조금 기다리시면 될 거 같아요. 삼신님은 지금 4층 제일 끝 방에 계셔요,”

“내가 안내해 줄게, 논.”

“아……디아님.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인데 가디언님과 미팅 시간이 변경되었어요.  지금쯤 도착하실 때가 되었…아, 저기 오시네요.”


가브리엘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논과 디아가 고개를 돌리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복장에 검은 아우라를 풍기는 자가 입구를 통과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어른들과 쉼 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천천히 걷는 노인 여럿과 큰 개 한 마리가 따랐다.

디아가 무리로 다가가 앞의 검은 복장을 한 자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논에게 다가왔다.


“논, 미안, 아무래도 삼신님은 혼자 뵈어야 할 거 같다. 나는 이들을 안내해야 할 거 같아.”

“괜찮아. 디아, 혼자 갈 수 있어”

“그럼 나중에 보자고 “


디아는 논에게 인사를 한 후 일행에게 다가섰다.

논도 가브리엘라가 가리키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4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리며 문이 열리자 발을 내밀던 논은 멈칫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분명 건물 안인데 논 앞에 펼쳐진 풍경은 흙과 풀 그리고 나무가 어울려져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숲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엘리베이터 문만이 덩그렇게 있을 뿐 논이 있는 곳은 숲이었다. 논은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살펴본 후 숲 사이에 있는 흙 길을 따라 걸었다.  

조금 걷자 나무들 사이에 이질적으로 덩그러니 문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문 뒤로 돌아가보아도 그 뒤도 분명 숲인데, 문만이 커다란 두 나무 사이 허공에 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에 손을 내밀던 논은 가브리엘라가 끝방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 손을 내리고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앞의 문과 비슷한 두 개의 문을 더 지나자 앞은 끝이지 보이지 않은 몇 그루의 나무로 막혀 있고 가운데 나무에는 마치 문인 것처럼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논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리려다 동작을 멈추고 손잡이 위의 나무 위를 가볍게 똑똑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삐그덕 소리가 들리며 나무에서 분리된 문이 살짝 열렸다. 논은 숨을 크게 들이쉬어 숲 향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 꽉 막힌 나무 대신 높은 벽 사이의 좁은 골목길이 있고 그 끝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골목을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수록 철썩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비릿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방향을 틀자 몰려드는 강한 빛에 논은 눈을 뜨기 힘들었다.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그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햇빛에 익숙해지자 논은 손을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논의 등뒤로는 방금 전에 내려온 골목이 있는 마을이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향기로운 냄새가 섞여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논이 서있는 도로 길에 있는 작은 수레 들에서 라벤더들을 팔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작은 배들이 정착된 조그만 정박지가 보이고 그 건너가 항구인 듯 큰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항구 넘어 높은 언덕 가득 알록달록한 색깔의 지붕을 가진 집들이 가득 차 마치 허공에 언덕 마을이 솟아 있는 듯이 보였다. 

논이 서 있는 곳 오른쪽으로는 바닷가를 따라 호텔이 몇 군데 보였고 왼쪽으로는 길가로  테이블이 가득한 카페들이 보였다. 노천카페의 의자들은 모두 바다 쪽을 향해 있었고 손님 몇이 음료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에 끌려 논은 카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논은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긴 머리의 여자 손님이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였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자신이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다시 한번 손님을 바라보았지. 그 순간 논의 기억을 스치고 간 것은 바로 오늘 환생국에 오며 구름 안에서 읽었던 책이었다. 

신비한 회색빛을 내는 긴 머리,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던 눈동자 색깔……거기까지 생각하자 논이 바라보던 그 손님이 고개를 들려 논과 눈을 마주쳤다. 

선명한 청록색 빛을 내며…..

바로 책 속에서 보았던 두 번째 삼신이었다.

논이 그 손님이 삼신이라고 깨달은 그 순간 논은 자신도 모르게 삼신의 바로 앞까지 이동하여 있었다.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바라보자 길을 걷고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 공간에 논과 삼신만이 남게 되었다. 삼신은 말없이 논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논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며 의자에 앉자 테이블 위에 김을 모락모락 내는 따뜻한 커피가 나타났다. 논은 삼신을 따라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사로운 햇살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 그리고 향기로운 커피 향이 온몸을 적셨다. 둘은 아무런 말 없이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환생을 결심한 영혼이 전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장소랍니다. 이런 행복감들로 가득 찬 영혼은 건강하고 밝은 빛을 띠는 영혼의 씨앗을 남기죠."


삼신의 말에 고개를 돌렸던 논은 삼신이 말을 마치고 계속 한 곳을 바라보고 있자,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바다 표면에  빛을 내는 뭔가 떠올랐다. 빛은 완전히 바다 밖으로 솟아오르더니 천천히 삼신과 논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삼신이 손을 내밀자 빛은 삼신의 손바닥 위에 살며시 내려앉더니 눈을 뜨기조차 힘든 밝은 빛을 내뿜었다. 쏟아져 나오는 강한 빛에 논은 결국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삼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건강한 씨앗이 되었군요"


삼신의 말에 논은 눈을 떠 삼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삼신의 손바닥 위에는 강한 빛을 띠던 물체는 사라지고 작은 씨앗 하나가  맑은 노란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영혼의 씨앗인가요?"


논의 질문에 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씨앗에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이제 이 영혼은 환생할 준비가 된 거랍니다. “

“영혼의 씨앗은 다 같은가요?”

“아뇨, 영혼마다 색이 다른데, 대체적으로 색깔에 따라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다르답니다. 이 영혼은 긴 휴식을 원했어요. 보통 보라색의 씨앗은 환생의 준비를 이미 마친 경우고, 빨간색이 가장 긴 휴식을 원하는 영혼들의 씨앗이랍니다. 영혼이 처음 탄생할 때는 무지개색을 띠지요. 자, 이제 씨앗을 심어볼까요?”


삼신이 말을 마친 순간 논과 삼신이 함께 있었던 공간이 실내로 바뀌었다. 논이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살펴보는 사이 삼신은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큰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화분들과 삽, 물주전자 등이 담겨 있는 큰 바구니가 놓여있고, 테이블 아래에는 커다란 하얀 주머니가 하나 놓여있었다. 삼신은 씨앗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바구니에서 작은 화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 있던 하얀 주머니를 열어 작은 삽으로  흙을  퍼내 화분에 담고 씨앗을 올린 후 다시 흙을 살살 뿌려 덮은 후  물을 주었다. 


“싹이 트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영혼마다 다르답니다, 심자마자 싹이 트는 씨앗도 있고 두 세기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싹이 트는 씨앗도 있지요. 하지만 그 이상을 넘기지는 않아요. 이미 환생의 준비를 마친 영혼들이 씨앗이 되기 때문이죠. 다만 꽃이 피는 데까지의 시간은 씨앗의 빛깔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답니다.  이 영혼은 노란빛으로 긴 휴식을 원했으니 꽃이 피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삼신은 다 심은 화분을 햇빛이 드는 쪽에 두고 테이블의 서랍을 열더니 작은 병을 하나 꺼내 논의 앞으로 와 앉았다. 삼신의 손짓에 소파 앞 작은 테이블 위에 찻잔 세트가 나타났다. 삼신이 포트의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삼신은 가져온 작은 병을 열어 말린 꽃들을 포트 안에 넣고 꽃잎 하나씩을 찻잔에 넣었다. 그리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듯 동작을 멈추고 논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투명하게 빛나는 삼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논은 자신이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저를 부른 분 이신가요?”


논의 질문에 삼신은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분은 흐름이시죠. 저도 그 흐름을 따라갈 뿐이랍니다."


삼신의 대답에 논은 잠시 망설이다 질문을 하였다.


“그럼 혹시… 삼신님은 제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삼신은 대답대신 미소를 짓고 포트를 들어 빈 찻잔에 부었다. 꽃잎 색이 우러난 연분홍 차가 향긋한 향기를 내며 잔을 채웠다. 잔 속의 마른 꽃잎이 빙그르르 돌며 춤을 추었다.


"이곳에 오는 영혼들은 자신의 과거를 모두 기억하게 된답니다. 첫 생부터 마지막 죽음 전의 생까지… 당신이 아직 기억할 수 없다면… 그 또한 흐름에 맡기면 된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싶나요?"


논은 말없이 찻잔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에 젖은 마른 꽃잎이 조금씩 펼쳐지더니 어느새 분홍빛 찻물 위에 꽃 한 송이가 활짝 펴 있었다.

 

“글쎄요…… 그냥 제가 거기 왜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왜 여기 있는지…. 이 또한 흐름인가요?”


삼신은 싱긋 웃더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논도 마셔보라는 듯 손짓하였다. 진한 꽃향기가 풍기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생각지도 못한 달큼함이 느껴지며 논은 온몸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편안함을 주는 차예요. 논, 당신의 과거는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뿐 분명 존재하지요. 당장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과거는 그대로 변함없이 있어요. 시간이 지나 기억해야 할 시간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랍니다.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삼신의 말에 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향긋하고 따뜻한 차가 온몸 구석구석에 온기를 전해주었다. 차의 영향인지 ‘모든 것이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랜만에 식사를 하고 씻고 자보는 게 어때요?”


삼신의 말에 논은 불현듯 자신이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식사도 하지 않고 화장실도 가본 적이 없으며 어딘가 누워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모르던 사실을 깨닫자마자 논은 쉬며 뭔가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삼신은 논을 향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에 노크를 하듯 똑 똑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커다란 문이 생겼다. 삼신이 일어나 문고리를 돌리자 묵직한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디로 가는 문인가요?"

"집이요. 몸과 마음이 쉴 곳은 집 만한 데가 없으니까요. 일단 쉬어요.”

“집…”


집이라고 말하는 순간 논은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 따뜻한 것이 뭉클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따듯함은 가슴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갔다. 논은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섰다. 마주 서 미소를 띠고 있는 삼신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잠시 망설이던 논은 발 한쪽을 문밖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다른 발을 들어 발을 옮기려다 뒤를 돌아 삼신을 보았다.


"제가… 제가 여기 온 이유가 있겠지요?"


삼신은 논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답니다. 논님이 그 작은 공간에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렇게 여기 와있는 것도… 다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논은 삼신의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이고 문밖의 나머지 발을 들어 조심히 문안으로 들어갔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자 환한 빛이 논을 감싸더니 논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논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논의 눈앞에  해가 뉘엿뉘엿 지는 골목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골목 끝에 자그마한 주택이 보였다. 논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집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집을 향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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