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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드로스치 Mar 19. 2024

어떤 삶을 원하세요?(1)

“흑흑….”


새하얀 공간에서 끊임없이 걷고 있던 논은 어디선가 들리는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새하얗던 공간은 어둠이 가득 찬 작은 방으로 바뀌었다. 꺼질 듯이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논이 손을 뻗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논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벽에 있던 작은 창 틈 사이로 갑자기 밝은 햇살이 쏟아졌다.


눈부신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떠보니 환한 빛이 가득한 공간이 보였다. 논은 주변을 보다 자신이 누웠다는 사실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하얀 벽이 자신을 막고 있어야 하는데 수십 년간 머물렀던 하얗고 좁은 공간의 벽 대신에 커튼으로도 가리지 못할 만큼 환한 햇살이 가득 찬 창문이 벽 한 칸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작은 서랍장이 있고 그 위에는 작은 화병에 샛노란 꽃이 꽂혀 있었다. 서랍장 옆에는 하얀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는 노트와 필기구 몇 가지 들이 보였다. 논은 주변환경이 익숙해질 때까지 자신의 방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마침내 이 공간이 자신의 방이라는 생각이 들자 논은 창 가 쪽으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삼신의 말 대로 집으로 와 쉬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처음 삼 일간은 내리 잠만 잤다. 사일째 되는 날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며 디아가 찾아와서 처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제는 디아와 함께  살고 있는 곳 주변을 산책하였다.


환생국은 크게 네지역으로 나뉘는데 지옥과의 경계지역에는 제3의 삼신이 살고 있고, 천국과의 경계에는 제1 삼신이 살고 있다. 가운데 지역은 제2삼신이 거주하는 환생궁이 있고 환생궁을 둘러싸는 지역에는 영혼의 꽃밭이 있다. 그리고 환생궁 남쪽에는 논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고 북쪽으로는 환생국의 영혼들이 살고 있으며, 디아가  일하는 곳은 말라크들의 마을과 영혼들이 거주하는 마을의 경계선에 있다.


모든 지역은 환생궁과 바로 연결되는데 한 군데 예외지역이 있다. 그곳은 제1삼신이 거주하는 곳과 디아가 일하는 곳 사이에 아주 좁은 부분이며 영혼계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이 그곳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

논은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듬뿍 들이마시며 어제 디아가 설명준 내용들을 기억하였다.


“안녕하세요, 논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논의 집 밖에 어제 산책하며 인사한 말라크가  보였다. 하얗고 복실 한 털로 이뤄진 동그랗고 작은 털뭉치 같은 외형의 말라크는 커다란 눈을 빛내며 논을 향해 반갑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얀님"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말라크의 뒷모습을 보며 논은 자신이 아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무의세계에 살며 자신의 존재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며칠사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며 인사하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에 작은 기쁨을 느꼈다.


환기를 시키고 집을 간단히 정리한 후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부엌 위 탁자에 이제 막 구운 듯 따끈한 빵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그리고 과일 몇 가지로 이뤄진 아침 식사가 논을 반기고 있었다. 논은 식탁에 앉아 음식 하나하나를 정성껏 베어 물고 꼭꼭 씹어 먹었다. 쌉싸레한 커피가 온몸을 감싸며 구석구석을 통과하는 기분을 느꼈다.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까 생각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순간 식탁에는 언제 음식이 있었냐는 듯 그릇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 내가 치우고 싶은데……”


논이 아쉬움에 소리를 내자, 다시 빈 그릇들이 식탁 위에 나타났다. 논은 미소를 지으며 그릇들을 들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선 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무의 공간에서 머물기를 수십 년, 드디어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은 어땠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환생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보다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논은 호흡을 고르게 정리한 후 문을 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힘차게 한걸음 내디뎠다.

문을 열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름이 반갑다는 듯 몸을 흔들었다. 논이 조심스레 발을 올리고 자세를 잡자 구름은 바로 공중으로 뜨더니 마을이 보이는 높이에서 이동을 시작하였다. 논은 떨어질까 두려워 구름에 납작이 엎드린 채 아래의 마을들을 구경하였다. 구름은 어제 산책을 하였던 곳을 지나 점점 인가가 드문지역으로 이동하더니 마침내 속도를 늦추고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에는 환생궁과는 다르게 한 층으로 된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기다란 건물물 살펴보는 데 몇 말라크들이 각 각 다른 출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로 들어가야 하나 결정을 짓지 못한 논은  망설이다가  방금 사람처럼 생긴 말라크가 들어간 출입구로 다가섰다. 출입구라고 생각한 곳은 안으로 들어가 움푹 파였을 뿐 문이 보이지 않았다. 벽을 밀면 될까 싶어 벽에 손바닥을 가까이 덴순간 앞에 있던 벽이 사라지며 논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벽을 통과해 들어간 곳은  한쪽벽이 유리로 되어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한쪽면에는 컴퓨터가 있는 책상과 편해 보이는 의자가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책장과 서랍장이 있었다. 논이 통과해 들어온 벽에는 꽃밭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고 사무실가운데에 소파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면 모두를 차지하고 있는 유리벽안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논이 있는 곳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공간인데 온통 하얀 벽면에 문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곳으로 나가는 문이 있는지 살펴보려는데  안쪽 공간에서 소리가 났다.


텅 빈 공간의 문이 열리고 논이 따라왔던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을 모시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커다란 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은 어느새 실내 경계가 사라지고  싱그러운 초록잔디가 가득하고 한쪽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노인을 부축하던 이는 잠깐 논이 있는 방향을 보더니 눈을 마주치고 끄덕 목인사를 하고는 노인이 원목테이블 벤치에 앉는 것을 도왔다. 강아지가 노인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남자는 노인에게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논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느 순간 논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온 남자는 자신은 말라크 미카엘이며 지금부터 영혼들의 환생상담을 할 것이니 보고 싶다면 소파에 앉으면 된다고 했다. 나갈 때는 들어왔을 때와 같이 이동하면 되고 다른 출입구로 옮겨가도 된다고 말하더니 손바닥을 딱딱 두 번 치고 테이블을 가리켰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케이크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논이 뭔가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어느새 미카엘은 노인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차를 보고 이왕 준비된 거 먹자 싶어 소파에 앉는 순간  논의 바로 눈앞에 미카엘과 노인 이 앉아있는 원목테이블 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논이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자 다시 논은 공원과는 별도의 작은 공간에 있었다. 논은 다시 조심스레 소파에 엉덩이를 데었다. 이번에도 미카엘과 노인이 앉아있는 공원으로 이동하였지만 그들은 논이 옆에 있는 것을 모르는 듯하였다. 논은 편안한 마음으로 찻잔에 자를 따르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미카엘은 노인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주고 노인이 한 모금 마시기를 기다린 다음 앞에 있는 서류를 살펴보았다.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자 미카엘은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영혼님. 저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영혼님의 환생을 도울 미카엘입니다. ‘강춘배' 영혼님은 2024년 3월 5일 81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재판 결과 천국행이 결정되셨으나 여기 계신 ‘금돌'님과의 인연을 위해 다시 환생을 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맞을까요?”


미카엘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은 이번에는 아래에 앉은 개를 보고 말을 하였다.


“ ‘금돌' 님은 2024년 3월 13일 10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전생의 죄로 인해 나머지 생들은 모두 동물로 환생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생에서 주인에게 충성과 사랑을 다하고, 홀로 남은 주인의 시체를 지키다 죽음에 이른 점 그리고 옆에 계신 ‘강춘배’ 님이 함께 환생을 하고 싶어 하시는 점을 고려해 다시 한번 사람으로 환생이 결정되었습니다. 맞습니까?”


미카엘의 말에 노인발치 아래에 있던 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개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노인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지금부터 영혼 ‘강춘배'님과 ‘금돌'님의 지난 전생들을 포함한 모든 기억을 되살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억을 살린 후는 외형이  이때까지 살아온 모습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준비되셨나요?”


두 영혼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카엘라는 한 손으로는 노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개의 머리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미카엘의 몸에서 푸른빛이 일어나더니 스르르 노인과 개의 몸으로 빛이 이동하였다. 푸르른 빛은 점점 노인과 개의 몸을 감싸더니 일순간 화르륵 빛나던 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그리고 노인과 개가 사라지고 옛시대의 복장을 한두 명의 10대 소년이 원목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소년들은 어리둥절하여 자신들의 몸을 살펴보더니 이내 서로를 마주 보고 부둥켜안았다. 두 소년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듯 미카엘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소년들이 기쁨의 눈물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바라보자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영혼 5782번 님은 총 열 번의 삶 중 이번삶이 여섯 번째 삶이셨고 앞의 네 번의 삶은 환생행 그리고 뒤의 두 번의 삶은 천국행인데 모두 환생을 결정하셨네요. 두 번 다 이유가 옆의 영혼님 때문이고요.”


“네, 이 친구가 저 때문에 죄를 지었는데 저만 천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게 왜 자네 때문이야, 내가 선택한 건데.”


“나만 아니었으면 이 친구 틀림없이 천국행이었을 겁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짐승으로 살게 되고…”


두 손을 맞잡고 서로를 위로하는 소년들을 바라보며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영혼 6542번 님은 총 일곱 번의 삶을 사셨고 앞의 다섯 번은 환생행이었으나 여섯 번째 삶에서 ‘살인'이라는 큰 죄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옆의 친구를 구하기 위한 선의 마음에서 시작되었기에 지옥대신 동물로 환생하게 되었고…그리고 이번 삶에서도 옆의 친구분을 지키셨네요.”


미카엘의 말에 두 친구는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둘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허공으로 손을 올리더니  뭔가를 찾든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각각의 서류를  내밀었다.


“원래 환생은 영혼 개별 상담 후 결정이 되는데 두 분 영혼은 환생조건이 함께 환생하시는 거여서 이렇게 같이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두 분의 상황이 다르다 보니 개별 조건은 상이합니다.

거기에 두 분 영혼님이 선택하실 수 있는 여러 조항들이 적혀 있습니다.

영혼 5782번 님의 경우는 누적 선행포인트가 매우 높으셔서 여기 있는 모든 사항들을 선택하실 수 있으세요. 성별부터, 외모, 원하시는 부모님의 성향과, 태어나고자 하는 환경 등 선천적 조건들을 고르실 수 있어요.

 영혼 6542번 님은 여섯 번째 삶에서 큰 죄를 지으셨지만 그 전의 삶들에서 쌓아온 선행포인트와 바로직전 동물의 삶에서 쌓은 점수가 매우 높으셔요. 그래서 여기 체크되지 않은 몇 가지를 빼고 모두 선택 가능합니다.

서류에는 없지만 특별히 원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지금 말씀 주시거나 거기에 적어주세요.”


두 소년은 잠시 마주 보더니 영혼 5782번이라고 불린 소년이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생애 에는 이 친구와 사람으로 만나  친구였으면 합니다. 가능할까요?”


“저희가 정해드리는 건 선천적 환경일 뿐 환생 이후의 삶은 영혼님 스스로 정하시는 거랍니다.  다만 전생에 얽힌 인연이 있고 이렇게 영혼상태에서도 두 분이 간절히 원하시니 이승에서도 그 인연이 이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혼님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거지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두 분이 만날 가능성의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것뿐입니다.

마침 최근에 비슷한 시기에 점지 상담을 하신 친구분들이 계시기에 오늘 이렇게 두 분의 환생상담을 진행한 거랍니다. 이 분들 이세요"


미카엘이 앞의 두 사람을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선을 긋자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의 사진이 나타났다.


 “두 분이 바로 환생을 결정하시면 그분들을 통해 친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연으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두 분 다 자녀분이 이미 따님분으로 내정되어 있어요. 영혼님들은 이전 모든 삶에서 남성을 선택하셨지요?”


미카엘의 말에 두 영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별 외는 조건이 참 좋은데, 만약 남성을 원하시면  이렇게 태어나 실 수도 있어요…”


소년들에게 다른 서류를 보여주며 미카엘이 논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말을 하였다. 그 순간 미카엘의 머리 위로 ‘다른 곳도 가보세요'라는 글자가 나타나더니 사라졌다.

논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소파가 미카엘과 두 소년에게서 쑥 멀어져 처음에 있던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논은 들어왔던 방향의 벽으로 다가가 들어왔을 때처럼 손바닥으로 벽을 가볍게 밀었다. 몸이 벽을 통과해서 나오자 논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바로 옆 출입구를 통과했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아까와는 달리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파티션으로 분리된 공간들에는 개인용 책상, 컴퓨터, 의자 등이 있고 한쪽 벽에는 캐비닛과 프린터, 복사기등 비품이 가득 있었다. 출입구와 마주 보고 있는 벽은 아래는 하얀색의 벽이 있고 그 위로 조금 들어간 위치에 5개의 커다란 유리창들이 있었다. 사무실에 누군가 있나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논은 조금 전에 있었던 공간을 생각하며 유리창 앞으로 다가섰다. 유리창안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유리창과 아래 벽 사이 작은 버튼 것이 각각의 유리창 아래에 있었다.


누르는 건가…싶어서 버튼 위에 손을 가져다 뎄는데 그 순간 논이 있던 위치의 유리창이 밝게 켜지며 안의 모습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태…”


논이 버튼에서 손을 옮기자 다시 소리가 사라지고 유리창 안도 다시 어두워졌다. 논은 다시 버튼 위에 손을 가져다 데었다.


“그러니까, 외모는 김태희요. 말라크 님 김태희 아시죠? 그 텔런트요. 그 정도면 좋겠고요. 부모님은 부자 셨으면 좋겠어요. 뭐 많이 바라진 않아요. 재벌집에 태어나면 오히려 힘들 거 같으니 그냥 강남에 건물하나 있는 정도? 건강은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아… 머리도 좀 좋았으면 좋겠어요. 쓱 한번 보면 다 이해하고... 그런데 또 영재는 싫어요. 공부해야잖아요. 그냥 똑똑한 정도요. 이 정도면 되는데… 큰 것들도 아니니 이 정도는 되는 거지요?”


“안됩니다.!”


“네?... 아니 이봐요. 털뭉치씨…”


“얀입니다.”


“그래요. 얀씨, 원하는 거 말하라면서요. 다음에 어떻게 태어날지요. 환생한다면서요.”


마주 앉은 남자를 바라보더니 얀이 한숨을 크게 쉬고는 앞의 서류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지요? 빈 종이구만.”


“아니요. 한 줄 있잖아요. 여기 보세요.”


“양순희 씨를 구함… 구해? 내가…? 아 그래 맞다. 그 노인네가 양순희 시구만… 내가 그 노인네 … 내가 술만 안 취했어도 … 여하튼 그 노인네 구하고 죽어서 나 환생시켜 준다면서요. 그러니 다음 생애는 그렇게 해주쇼.”


“안됩니다.”


“아…그 털뭉치 빡빡하네… 대체… 왜…”


“부족합니다. 포인트가. 이 종이는  전생에서 쌓은 선행들이 적혀있는 종이지요. 영혼님처럼 대충 살고, 도둑질에, 사기... 에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지르고 알코올중독으로 돌아가시면 지옥행이 당연한 겁니다. 운 좋게 환생해도 짐승의 생이지요. 전생에서 술 취한 채로 양순희 씨 지갑 슬쩍하려다가 차에 영혼님이 치인 거 아시죠? 운이 좋아 얼결에 귀인을 구해서 여기 계신 겁니다.  위 조건 한 개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지금이라도 지옥행 가실까요?”


얀의 말을 하는 동안  점점 얼굴이 구겨지던 남자는 지옥행이라는 말에 힘을 줬던 손을 풀고 다시 엉덩이를 슬쩍 의자에 대며 바르게 앉았다.


“아니… 털양반… 누가 또 내가 지옥 간다했소. 환생해야지요. 환생.”


얀은 다시 서류들을 가지런히 모아 책상에 탁탁 친 후 맞은 편의 남자를 바라봤다.


“영혼님은 환생 후의 조건을 전혀 고르실 수 없으며 부모님 또한 랜덤 점지로 선택하게 됩니다.”


“랜덤? 삼신 그 할망구가…. 아니 그 … 삼신님이 안 해주시고?”


“점지는 선택받은 영혼 분들만 가능하십니다. 영혼님은 해당 사항이 없고요. 환생은 지금 당장 하셔도 되고 일정 시간 후에 하셔도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보시면…”


얀과 앞의 남자가 서류를 보며 대화를 이어나가자 논은 자신이 데고 있던 버튼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다른 유리창 앞의 버튼에 손을 가까이 데었다.


“저…그럼 저는 다음 생애에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지금은 너무 쉬고 싶어서 한 50년 뒤쯤에 태어나고 싶은데 되나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 맞은편에 앉은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있던 서류를 여인의 앞으로 내밀었다.


“지난번 환생하실 때 작성하셨던 서류입니다. 여기 보시면 영혼님은 이후의 삶들을 모두 여성으로 살고 싶어 하셨는데…  영혼님의 기억을 되살리기 전 이번에 왜 다시 남자를 선택하셨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이야기가 길 텐데 해도 될까요?”


그러자 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박수를 두 번 탁탁 치니 테이블 위에 간식거리들이 나타났다.


“인생 이야기엔 간식이 빠질 수 없지요. 느긋하게 드시며 이야기 나눠볼까요?”

남의 긴 인생 이야기를 몰래 듣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해 논은 다시 버튼에서 손을 떼고  옆의 버튼에 손을 데어보았다. 각각의 버튼 위에 손을 가져다 델 때마다 유리창에 말라크와 상담 중인 영혼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영혼은 포인트가 넉넉해서 원하는 조건들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영혼은 포인트가 부족해 말라크와 다투기도 하였다. 다섯 공간의 상담을 모두 살펴본 후 출입구를 통해 다시 다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한쪽 벽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문이 보였다.  논은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이제껏 봤던 공간들과는 달리 푹신한 소파들이 여러 개 있고 곳곳에 책들과 간식들이 보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안쪽 소파를 살펴보니 디아와 다른 젊은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논과 눈이 마주친 디아가 거기에 앉으라는 듯  방금 내린 듯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푸치노가 한잔 놓여있는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논은 조용히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그 순간 그들의 대화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 엄마도 …그러니까 제 지난 생애 저의 엄마가 아직 환생하지 않으셨단 말씀이지요?”


“네, 영혼님. 어머님은 이번 생에서의 가족들이 모두 이곳에 온 후 함께 환생하시기를 바라셨어요.”


“제가 서른 살일 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삼십오 년을 기다리셨네요. 저희 엄마… 저의 늙은 모습보다 이 모습을 더 좋아하겠죠? 그럼 저는 엄마를 언제 만날 수 있나요? 아빠도 볼 수 있나요? 오빠는요? 오빠도 저보다 먼저 갔으니 기다리는 거죠?”


디아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영혼님. 가족분들은 만나실 수 없으세요.”


“같이 환생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못 만나요?”


“영혼님 전생의 아버님은  영혼님이 어릴 적에 이곳에 오셨고 바로 환생을 택하셨어요. 그래서 이미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영혼님의 오빠분은 안타깝지만 이곳에 안계셔요.오빠분은…”


“그 인간… 지옥 간 거예요? 그렇게 바보짓만 골라하더니. 죽어서도 같이 태어나자는 엄마소원도 못 들어주고…그런데 사기를 당하면 당했지, 남한테는 나쁜 짓  하나 못했는데 … 미련하게 살아도 지옥 가는 건가요?”


여자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탁탁 쳤다.


“아니에요. 영혼님 오빠분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분도 환생을 하십니다. 다만, 오빠분께서 동물로 태어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계시지 않고, 동물로 환생하는 지역에 머물고 계셔요.  어머님과 만나기 위해 환생시기는 어머님이 태어난 이후로 원하셨어요.”


“동물이요?... 하…. 그 인간…. 말 못 하는 짐승으로 … 좋은 동물로 태어나는 거겠지요? 개미, 지렁이 …이런 거 아니지요?”


“가지고 계신 포인트 팍팍 쓰셔서 아주 종이 훌륭하고 잘생긴 말로 태어나실 거예요.”


“말요?... 그 인간 그렇게 경마를 좋아하더니…  “


여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왜 엄마는 못 만나지요? 환생을 같이 할 거라면서요?”


디아는 말없이 오른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커다란 스크린이 나타나더니 한복을 정갈하게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설희야, 엄마다. 네가 이걸 본다는 건 너도 이곳에 있다는 거지. 엄마는 네가 무척 보고 싶단다. 네가 부디 행복하게 살다 이곳에 왔길 바란다.

엄마는… 너희 때문에 무척 행복했단다. 아빠가 그렇게 일찍 가고 너희 둘 키우며 힘든 것도 많았지만 너희가 어른이 되고 대학을 가는 것까지 보고 이렇게 오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단다. 너희 둘 결혼한 것까지 못 보고 온 것이 아쉬웠지.

사랑하는 내 딸, 다음 생애에도 나는 너를 만나고 싶어.

함께 웃고 떠들고 네가 힘들 때 같이하고 네가 행복할 때 같이 있고…

하지만 엄마는 이번생이 참 힘들었단다. 엄마로서는 너무 행복했지만 나로서 살지 못했어.

그래서 엄마는 다음생애에… 오로지 내 삶을 살고 싶어.  대학도 가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고, 나만의 삶을 살고 싶어. 엄마는 다음생애에 남편도 자식도 없이 살아보고 싶단다.

설희야,  우리 다음생애에도 꼭 만나자.

 친구로 혹은 자매로. 엄마가 너를 알아볼게. 언제든 어떤 모습이던 엄마는 널 알아볼 거야.

사랑해. 설희야.

사랑한다. 엄마는 널 사랑해. 보고 싶다'


“꺼져버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너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나도 내 삶을 원해.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함께 영상을 보던 논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저주 같은 외침과 여자의 비명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안돼! 그만!”


‘챙’

비명을 지르며 논이 벌떡 일어나자 앞에 있던 커피잔이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향기로운 커피가 테이블과 바닥에 쏟아졌다. 순간 논의 눈앞에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나타났다. 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논… 논’


‘논… 논!!!’


디아가 논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진한 커피 향이 논의 숨을 타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던 무의 공간에 테이블이 나타나고 소파가 나타나고 디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어?... 응…”


논은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담은? 영혼님 기다리시잖아.”


논이 고개를 들려 디아가 상담을 하고 있는 자리를 돌아보자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디아와 영혼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놀라 다시 자신의 앞을 바라보니 디아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부딪혀 ‘탁’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쏟아진 커피로 지저분해진 바닥이 말끔해지고 테이블 위엔 새로운 찻잔이 나타났다.


‘마음에 안정을 주는 차야. 마시면 좀 나을 거야.’


논은 자신의 앞에 있는 디아를  바라보았다. 디아는 움직이고 있지만 말을 할 때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듣고 있는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들리고 있었다.


“디아?”


디아는 논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고 다시  한번 ‘탁'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논의 눈앞에 있던 디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논이 고개를 돌려 옆테이블을 보자  상담을 하고 있던 디아가 논을 향해 미소를 짓더니 다시 영혼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님은 환생을 결정하시고 이미 휴식기에 들어가셨어요. 다음생애에 혼자이고 싶으셔서, 지난 생에 남편분과의 인연선도 잘라내시고, 새로운 인연 선도 원치 않으셨어요. 환생 후 삶은 또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은 남자와의 인연선을 잘라내신 상태이기 때문에 본인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면 평생 혼자이실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 선도 생기기가 어렵고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디아 옆에 다시 한번 스크린이 뜨더니 곱게 한복을 입고 있는 어머님의 모습이 예쁜 옷을 차려입은 젊은 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묶여있는 빨간색 실을 잡더니 가위로 강 잘라버렸다. 그 순간 주변에 새로운 빨간 실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데 여인이 가위를 들어 철컥철컥 소리를 내니 다가오던 실들이 모두 흔적을 감췄다.


“친구… 엄마랑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친구는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환생국에서는 환경을 만들어 줄 뿐이랍니다. 친구가 될 확률이 높은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환경이라도 인연이라면 만나게 되어있지요. 인연은 알아보게 되어있답니다. 친구가 불안하시면 자매를 선택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환생 기간을…”


“아니요. 오로지 엄마의 삶을 살고 싶다잖아요. 엄마… 외동. 그것도 부잣집 귀한 외동딸. 친척들 죄다 아들인 집. 돈도 많아서 비싼 말 한 마리  딸 생일선물로 탁 사주는 그런 집에 태어나게 해 주세요. 내 포인트… 내 포인트 엄마한테 쓸 수 있지요? 그거 써서 엄마 그렇게 해주세요. “

디아는 마주 앉은 여자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영혼님, 영혼님의 이런 고운 마음은 어머님을 닮으셨나 봅니다. 어머님은 높은  선행 포인트로 말씀하신 조건 다 갖춘 집에서 태어나실 수 있으셔요. 영혼님은 영혼님의 삶을 고르 세요.”


디아와 여자가  구체적인 환생조건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논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아까 귀에 들렸던 비명과 울음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사라진 전생의 기억인 듯한데 그 목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논은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 가득 찬 여자의 비명과 아이의 울음소리를 털어냈다. 그리고 다음 약속장소인 환생궁으로 가기 위해 건물 끝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말라카의 거주 지역과 영혼의 거주 지역을 가로지르는 환생 상담소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었다. 이십여분을 걷기 시작해도 건물의 끝은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 바람이 실어 오는 향긋한 냄새가 건물의 끝에 있는 환생꽃밭이 가까워짐을 알게 해 줬다. 십여분을 더 걷자 마침내 건물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끝이 보이지도 않는 꽃밭이 시작되었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논의 코 끝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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