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미래(장강명)을 읽고
보통 나는 수영을 한다. 오리발을 끼고 물에 들어가면 몸은 쉽게 뜨고, 몇 번 차지도 않았는데 금세 앞으로 나아간다. 평소보다 훨씬 적은 힘으로 더 멀리, 더 빠르게 간다. 반대로 오리발 없이 수영하는 날에는 한참을 허우적거려도 그만큼 전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요즘 내가 AI를 사용할 때의 감각이 꼭 그렇다. AI는 내게 일종의 디지털 오리발이다.
나는 평소 ChatGPT, Gemini, Perplexity를 자주 사용한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 복잡한 사안을 정리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할 때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제는 AI를 쓰기 전의 업무 방식이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초안을 만들고, 구조를 잡는 일이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생산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피부에 와닿은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AI는 이미 내 일상과 업무를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며칠 걸리던 일이 이제는 몇 시간 안에 윤곽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리발 하나 바꿨을 뿐인데 수영의 감각 자체가 달라지는 것처럼, AI는 인간의 사고와 노동의 속도를 바꾸고 있다.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를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변화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세계에서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둑이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단순한 승패 이상의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AI를 아직 먼 미래의 기술처럼 여겼다. 그러나 바둑판 위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훨씬 선명하게 AI의 압도적 능력을 목격했다. 그 순간 이후 바둑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세계가 아니게 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마치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보게 된 순간처럼 느꼈다. 모르고 살 수 있었던 세계에서, 이제는 결코 모른 척할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준 신화도 떠올랐다. 불은 문명을 열었지만 동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책임과 위험을 인간에게 안겼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편리한 도구인 동시에, 인간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문명의 사건이다.
책이 보여주는 바둑의 변화는 특히 흥미롭다. AI가 등장한 이후 기보와 연구법은 빠르게 대중화되었고, 과거에는 극소수 고수들만이 다룰 수 있었던 암묵지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좋은 수, 좋은 형세 판단, 효율적인 학습법이 누구에게나 열리면서 바둑은 전체적으로 상향평준화되었다. 예전에는 오랜 수련과 사사(師事)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었던 경지에, 이제는 훨씬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바둑은 더 평등해졌다. 고수와 하수를 가르던 장벽이 낮아졌고, 재능만큼이나 학습 환경과 도구의 힘이 중요해졌다.
나는 이 변화가 바둑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AI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보 접근성을 폭발적으로 높이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만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지식, 숙련자만이 다룰 수 있었던 기술, 경험자만이 체득할 수 있었던 판단의 구조가 이제는 훨씬 빠른 속도로 공유되고 습득된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문가의 시대’를 지나 ‘모두가 전문가 비슷해질 수 있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인간의 차별점은 어디에 남을까. 모두가 비슷한 도구를 쓰고, 비슷한 정보에 접근하며, 비슷한 수준까지 빠르게 올라설 수 있다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오리지널리티와 디테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학습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편집하고, 빠르게 재조합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무엇을 정말 중요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맥락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어떤 결을 자기만의 문장과 판단으로 밀어붙일지는 아직 인간의 몫처럼 보인다. 흉내와 모방은 점점 더 정교해지겠지만, 자기만의 시선과 취향, 집요한 디테일, 끝내 포기하지 않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바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AI 이후 기사들의 기풍이 비슷해지고 개성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지만, 인간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차이를 만들어 왔다. 모두가 정답에 가까운 길을 알게 된 뒤에도,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것은 한 끗의 차이, 미세한 선택, 흔들리지 않는 취향과 감각일 수 있다. 상향평준화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디테일은 더 중요해진다. 평균이 높아질수록 평균을 넘어서는 힘은 사소해 보이는 차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먼저 온 미래』를 읽으며 나는 결국 AI 시대에 인간의 쓸모를 다시 묻게 되었다. AI는 인간을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게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친 의존 속에서 인간을 게으르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마차가 자동차로 바뀌고, 피처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듯이,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 위에 서 있다. 다만 이번 변화는 단순히 도구가 바뀌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사고 방식, 학습 방식, 노동 방식, 심지어 자아 인식까지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근본적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바둑과 AI의 관계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먼저 도착한 미래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미래를 비춰보게 하는 책이라고 느꼈다. 바둑은 이미 그 미래를 살아냈고, 우리는 이제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몇 년 뒤의 세상이 조지 오웰의 『1984』에 가까울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가까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자리에서는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미래 앞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계산 능력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끝까지 묻는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