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기

연말 소회

by 꿈꾸는나무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몇 일 지난 주말,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고 연말의 휴가를 활용하고 싶기도 했다. 사실은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행에 있어 크게 계획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여기 저기 알아보다 하루 전 날 숙소를 예약하고 단지 바다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집에서 약 3시간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벨기에 북쪽 바다, 북해의 한 해변가에 가기로 했다.


도로위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운전하는 내내 시야는 흐렸고 프랑스 도시 릴을 지나는 짧은 구간에서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햇살에 환호한 것도 잠시, 우리의 행선지에 도착할 즈음 다시 안개는 자욱하게 내려앉앉았고 흐리고 습한 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자욱한 오스텐데 해변

바다를 보러 우선 들린 곳은 오스텐데(Ostende)라는 해변이었는데 해변을 따라 즐비한 높은 건물들만 조금 보이고 바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백사장으로 발길을 옮겨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안개속을 걸으며 얼굴로 내려앉은 증기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집에서 편하게 누워있을 걸, 푸른 하늘과 바다, 춥지만 해가 나는 맑은 날을 상상하며 왔으나 추위에 몸을 오들오들 떨며 안개자욱한 바닷가를 걷고 있자니 잠시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을 동안 우리는 걷고 이야기했다. 내 마음속에도 안개에 쌓인듯 해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 고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올 한해는 그냥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10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만 성장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회사와 집을 오가기를 반복하며 하고 싶었던 일을 생각만 하며 실행을 하지 못했다. 그림을 배우다 선생이 마음에 들지않아 그만 두고 새로운 화실을 찾지 못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적립한 교육비를 활용해서 무언가 배우고 싶었으나 그것도 검색만하고 실천하지 못했다.

진로를 고민하는 수험생 아이가 둘인 나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긴 하지만 어떤 제안을 하거나 길을 안내해 주지 못해서 내심 불안했던 것 같다. 사실은 아이들에 대한 고민이 제일 큰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나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해 아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전망이 좋은 진로를 제안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결정이 있다면 지지해 주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과 이야기를 하며 내가 그동안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간접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힘이 닿는데까지 지원하고 마음으로 지지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무언가 성취한 사람들을 보면 과도하게 칭찬하고 선망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었던 같다. 어쩌면 남편과의 단 둘이 있는 시간이다 보니 우리 둘 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겠으나 자연스레 아이들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의 능력과 가치를 믿고 지지한다. 나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지만 안내자의 역할을 해주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않은 것 같다. 때로는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50이 되어도 아직 흔들리는 나는 내가 평온하고 행복하고 잘 사는 모습을 보이는게 아이들에게도 좋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잘 자랄테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는 나를 잘 돌보면 되지 않을까....


오스텐데 해변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미델케르케(Midelkerke)에 숙소를 잡았고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남편은 벨기에의 작은 베니스라고 불린다는 브뤼헤에 가자고 제안했으나 나는 이미 가보기도 했고 크리스마스 시장의 팬시함과 많은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냥 미델케르케 해변을 좀 걸어보자고 오늘은 날씨가 좋기를 기대하며 커텐을 열었으나 오늘도 흐린 날을 예고하듯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아침을 먹고 해변으로 나갔다. 어제보다는 바다도 잘 보이고 우리는 사구를 지나 백사장의 모래위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조깅을 하는 사람들, 우리처럼 여행을 온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다.


어제 본 오스텐데 시내의 해변보다 백사장 왼쪽으로 사구와 식물들이 훨씬 더 정감있고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그래서 걷는 재미가 있었나보다. 여전히 흐린 일기였지만 어제보다 바다가 선명하게 보였고 중간 중간의 조형물도 있었다. 3시간 정도의 산보를 마치고 우리는 우연히 발견한 바다가의 해산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짧은 여행을 마무리 했다.

몇 일 후면 새해가 시작된다.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것이고 나에게 365일이 주어질 것이다.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과거에 대한 집착보다 순간 순간 살아가려고 한다.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조금 빠듯하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흐린 날을 두 팔 벌려 맞이하며 맑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