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형 답사
묵서명(墨書銘)
무릇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山寺)로 간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곳에서 비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봉정사(鳳停寺)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천등산에는 봉정사와 더불어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개목사(開目寺)가 있는데 한때 천등사(天燈寺), 흥국사(興國寺) 등으로 불렸으나, 조선 초기에 안동부사로 부임한 맹사성이 안동지역에 장님이 많은 것을 알고 절을 증수하면서 맹인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개목사(開目寺)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봉정사 창건에 관해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통일신라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영주의 부석사에서 종이학을 날렸는데 그 학이 봉황으로 변해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머물렀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능인대사가 대망산의 굴에서 수련을 할 때, 하늘의 시험을 통과해서 천등(天燈)을 받았다는 것이다.
능인대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불문에 들어와 대망산 바위굴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잊고, 하루에 한 끼 생식을 하며 도를 닦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며, 마음과 몸을 나른하게 풀어지게 하고 괴괴한 산속의 무서움과 고독 같은 것은 아랑 곳 없었다. 이렇게 십 년을 줄곧 도를 닦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밤 홀연히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옥을 굴리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미처 능인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보드라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운 살결에 반듯하니 이마와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 거기에는 지혜와 정열이 샘솟는 것 같아 진정 젊은 능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여인은 "낭군님" 다시 한번 맑은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낭군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간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 년을 애써 쌓아 온 수련을 한 여인의 간청으로 허물 수 없었다. 능인은 준엄하게 여인을 꾸짖었다.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공적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 능인의 꾸중에 산도 크게 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유혹을 하며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능인은 끝내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여인이 돌아서자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여인이 사뿐히 하늘로 오르며 " 대사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는 천상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코자 하였습니다. 이제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사오니 부디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하늘로 사라지자 그곳에는 산뜻한 기운이 내려와 굴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또 울려왔다. "대사, 아직도 수도를 많이 해야 할 텐데 굴이 너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하늘의 등불을 보내드리오니 부디 그 불빛으로 더욱 깊은 도를 닦으시기 바라옵니다." 그러자 바로 그 바위 위에 커다란 등이 달려 어둠을 쫓고 대낮같이 굴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능인은 그 환한 빛의 도움을 받아 더욱 열심히 수련을 하여 드디어 득도하여 위대한 스님이 되었다.
이 두 번째 설은 천등산(天燈山)과 천등굴(天燈窟)의 지명 유래와도 관련이 있다. 봉황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화엄종의 사찰을 건립하고 그 세력을 넓혀가는 상징성을 이야기하며, 천등은 깨달음을 빛으로 표현하는 종교적 이치를 풀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봉정사 창건 설화는 화엄종의 전파 과정과 동시에 깨달음이라는 종교적 교훈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산사의 절들과는 달리 작고 아담한 절이지만, 산사 원형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국보 극락전(고려시대)이 유명하며, 이 외에도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유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인정받는 극락전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극락전이 중심 건물은 아니다. 절의 중심은 엄연히 대웅전이며, 봉정사의 대웅전도 국보로 지정될 만큼 국가유산으로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건축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극락전 못지않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과 방문이 많았던 곳인데, 특히 고려시대에 고려 태조(太祖)와 공민왕(恭愍王) 등이 행차하였고, 최근 1999년 4월에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의 전통 마을을 방문하면서 봉정사에 들러 우리의 불교문화의 일단을 살펴보고 가면서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
뒤이어 2019년 5월에는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봉정사를 방문하였다. 이 인연으로 2022년 9월 8일 여왕이 사망하자 봉정사는 추모 영결식과 49재를 지냈으며 2023년에도 1주기 추모 법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봉정사는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세계적인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봉정사는 7개의 산사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절집이다. 여느 사찰처럼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긴 숲길도 없으며 초입이나 산자락 어딘가에 수십 개의 승탑이나 탑비가 줄지어 있지 않다. 높다란 당간지주나 우람한 산문이 위압적으로 길을 가로막지도 않고 절 입구의 해탈문이나 사천왕문도 없다.
절 입구 역시 복잡하지 않고 그 흔한 산채 백반 식당가도 없고 몇 채의 민가와 식당이 있을 뿐이다. 매표소를 거쳐 오르막 왼쪽으로 퇴계 이황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인 명옥대(鳴玉臺)를 지나면 잠시 평지가 되는 곳에 일주문이 서 있다. 울 명(鳴)에 구슬 옥(玉), 본래 정자의 이름이 ‘낙수대’였는데, 봉정사에 머물던 퇴계가 물소리가 옥을 굴리듯 아름답다 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안동지역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분리와 배척의 관계가 아닌 상생과 공존의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봉정사의 국보와 보물
봉정사에는 수많은 국가유산자료가 있기에 여기서는 국보와 보물 중심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등록된 국가유산명으로 정리)
국보
안동 봉정사 극락전(極樂殿)
안동 봉정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 고금당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안동 봉정사 영산회상벽화
안동 봉정사 영산회 괘불도
안동 봉정사 아미타설법도
3. 봉정사와 퇴계 선생
안동이라는 도시를 일컬어 말하기를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기저에는 가까운 조선을 생각해서 유교만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는 큰 이념이었다. 우리 정신문화는 유교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안동은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문화를 지배해 왔던 성리학(유교)을 퇴계 선생이 꽃피웠던 곳이다. 그래서 우리 인식에 유교적인 색채의 도시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나, 그에 못지않게 불교적 문화 역시 융성했던 지역이다. 안동지역의 불교문화를 살펴보면 그 시대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 종교적 가치는 유교 못지않은 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국보로 지정된 안동의 국가유산 5개 중, 3개가 불교 국가유산인 것만 봐도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안동의 불교 유산은 퇴계 선생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선생이 16세 때(1515년) 사촌 동생인 수령과 권민의, 강한과 함께 봉정사에 들어가 3개월 정도 공부를 하였었는데 이때 가끔 절 입구에 있는 명옥대에 내려와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이후 50여 년이 지난 1566년에 선생은 다시 이 명옥대를 찾아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명옥대(鳴玉臺)
此地經遊五十年 오십 년 전 어느 날 이곳에 와서 놀았는데
韶顔春醉百花前 젊은 날 온갖 꽃 앞에서 봄빛에 취했었지
只今携手人何處 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依舊蒼巖白水懸 푸른 바위 맑은 폭포만 예전 그대로일세
白水蒼巖境益奇 푸른 바위 흰 폭포의 경치는 더욱 장관인데
無人來賞澗林悲 구경 손님 가고 나면 시내와 숲도 슬퍼하리라
他年好事如相問 훗날 궁금한 것 많은 사람이 와서 묻거든
爲報溪翁坐詠時 일찍이 퇴계 노인이 시 읊었던 곳이라 일러주오
어릴 적 동무들과 손잡고 놀던 곳에 50년이 지나 노년이 되어 와 봤더니 수려한 자연은 변치 않고 그대로인데 옛 동무들은 다 떠나고 없어진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의 시이다. 훗날 현종 6년(1655) 후학들이 퇴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 장소에 창암정사를 지었는데, 이 “창암(蒼巖)”이라는 이름은, 위의 선생의 시 중, “依舊蒼巖白水懸 (푸른 바위 맑은 폭포만 예전 그대로일세)”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이때의 일화가 『세전서화첩』에 글과 그림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명옥대는 봉정사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4. 고려와 조선의 공간, 봉정사의 주요 공간
봉정사(鳳停寺)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세종 17년(1435)에 중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와 보수를 거쳤다. 특히 1999년 해체 보수 시에는 1361년, 1436년, 1601년 당시의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묵서명(墨書銘) : 붓으로 직접 글씨를 써서 새긴 명문(글귀), 주로 건물 상량대, 도자기 바닥, 무덤 벽화 등 다양한 문화재에서 발견되며 건축·예술적 의미와 함께 기록·기념의 역할을 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 조선 초의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또한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부에는 석가모니 본존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 있다. 특히 대웅전에는 건설 당시의 단청이 아직도 남아 있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당시 불교 건축물 장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정사는 각기 다른 부처님을 향한 두 개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과 무량해회(스님들의 거처 및 수양공간)로 둘러싸인 석가모니 부처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의 뒷면과 고금당으로 둘러싸인 아미타 부처의 공간이다.
대웅전 공간이 여러 사람이 모여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고 예배를 볼 수 있는 집회의 공간이라면, 극락전 공간은 여러 사람을 위한 설법의 공간이 아니라 조용히 염불을 할 수 있는 개인 차원의 수행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 크지 않는 봉정사 경내를 구태여 두 영역으로 구분한 것은 화엄종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화엄강당을 지을 당시의 불교사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大雄)”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이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 마군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또한, 봉정사가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봉정사(鳳停寺) 화엄강당(華嚴講堂)
화엄강당은 대웅전 앞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에 동향(東向)하여 서 있는 건물인데, 그 앞면은 대웅전 앞뜰이 되고, 뒷면은 극락전 앞뜰이 된다. 즉 화엄강당은 봉정사 경내를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으로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두 공간을 합친다 해도 그리 크지 않은데, 화엄강당을 마당 한가운데에 가로질러 조성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부석사와 봉정사가 화엄종 초기 사찰인데도 불구하고 뒷날 일반화된 ‘대적광전’ 혹은 ‘광명전’과 같은 화엄종의 주불전을 갖추지 못했는데, 이는 화엄종 초기 사상의 경우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8세기 후반 이후 화엄종이 번성하게 되면서 많은 사찰이 조성될 때 비로자나불상을 만들었고, 비로전이나 적광전 등의 화엄종의 주불전이 만들어지자 그런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봉정사가 보완책의 하나로 강당의 이름에 ‘화엄(華嚴)’을 붙여 강당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1967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지붕으로 맞배지붕을 얹혔다. 1969년에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조선 선조 21년(1588)에 손질하여 고쳤다고 한다.
사찰 내의 승려들이 화엄경, 법화경 등의 주요 경전을 배우고 토론하던 공간이었으나 현재는 사찰의 종무소 역할을 하고 있다.
봉정사(鳳停寺)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봉정사 화엄강당(華嚴講堂)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으로 현재는 봉정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봉정사의 부속 암자인 지조암에 있던 것을 봉정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데, 아마도 협시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는 관음보살상만이 전해지고 있어 그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다.
200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보물 제162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만세루에 있던 ‘대웅전관음개금현판(大雄殿觀音槪金懸板)’ 기록이 해석되면서 이 관음보살상이 고려 후기인 1199년에 조성됐다는 기록이 확인되면서부터이다. 기록을 통해 이 보살상은 1170년 고려 무신정변 이후 조성된 고려후기 대표적인 보살상으로서 그 존재감을 나타낸 것이다.
앉은 자세의 상으로 높이가 104cm이며 머리에는 화려하고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머리카락은 기둥처럼 상투를 높이 틀어서 올리고, 나머지는 양쪽 귀를 지나 어깨 위에 걸쳐져 몇 가닥으로 나누어 흐르게 하였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가슴, 배, 양 무릎을 중심으로 화려한 영락 장식이 연결되도록 표현되어 있다. 머리 위의 보관은 새로 조성된 것이라고 하며 화염문과 구름문, 꽃모양으로 꾸며져 있다. 보관 중앙에는 관음보살임을 상징하는 화불이 안치되어 있고, 보살상의 두 손은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보통의 보살상은 하늘거리는 천의를 입는데, 이 보살상은 부처상처럼 옷을 입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보살상도 이러한 방식으로 옷을 입은 상들이 등장한다. 얼굴은 고요하면서도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고 고귀한 기품이 느껴진다. 균형 잡힌 당당한 신체와 긴장감 넘치는 옷 주름, 그리고 정교하고 세련된 영락 장식들이 조각된 전체적으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된 보살상이다.
이 관음보살상은 통나무를 조각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무로 팔과 몸통 등을 따로 만들고 접합하는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으로 만든 것이다. 머리카락과 귀, 목걸이와 영락 등의 장신구들은 목재 부분과 색이 다른 것으로 보아 건칠로 추정되는 다른 재료로 만들어 붙이는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미간의 백호와 눈동자는 수정을 감입(嵌入)하였으며, 두 손과 머리카락 등은 따로 만들어 끼워놓은 점이 특징이다.
봉정사(鳳停寺) 영산회상벽화(靈山會上壁畵)
대웅전의 후불벽에 그려져 있던 벽화로 1997년 그 위에 걸어놓았던 탱화를 떼어내자 존재가 드러났다. 높이 361cm, 길이 401.5cm 규모의 가로가 약간 긴 화면이며, 테두리는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되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불법을 전하는 법회인 영산회상의 장면이 그려졌다. 화면에는 매우 많은 존상들이 표현되었는데 화면 상부의 천상계와 하부의 구름층을 제외한 주제는 크게 3단으로 구성되었다. 화면의 중심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보살의 삼존 좌상이 크게 자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보살, 제자,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및 천부중 등의 권속(한집에 거느리고 사는 식구)들이 가득히 늘어서 있다.
현재는 벽체의 균열과 훼손 등으로 손상이 심한 상태이지만, 양식적으로 볼 때 조선 초기 불화와 공통됨은 물론 대웅전 해체 수리 시 발견된 「대웅전 중창기」(1435년)와 묵서명(1436년)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벽화는 대웅전이 중창된 1435년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벽화는 현재 남아 있는 후불벽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제작된 영산회상도의 시초로도 볼 수 있으며, 양식적으로는 고려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불화 양식의 변화과정을 증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불화이다.
봉정사(鳳停寺) 영산회 괘불도(靈山會 掛佛圖)
봉정사 영산회 괘불은 조선 숙종 36년(1710)에 제작되었으며, 높이 7m 42cm, 너비 5m 85cm의 크기의 대형 불화이다.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를 중심으로 여덟 보살과 십 대 제자를 함께 그려놓았다. 전각의 내부에 봉안되는 후불도와 비슷한 구성이나 본존이 서 있는 형태로 표현됐으며 이는 의식이 실행되는 도량에 등장하는 부처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화의 채색은 채도가 낮고 은은하며, 붉은색과 분홍색의 조화를 통해 생동감과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2010년 2월 24일 보물 제164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됨으로써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이 작품처럼 입상의 주불을 중심으로 보살과 제자들이 나열되는 형식의 영산회 괘불은 상주와 문경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서 유행하였는데, 1688년의 상주 북장사 괘불(보물, 1998년 지정), 1703년 문경 김룡사 영산회 괘불도(보물, 2010년 지정), 1788년의 상주 남장사 괘불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이전부터 오래되었으리란 추측은 있었으나 확실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었으나,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1월까지 해체 복원 공사를 하였는데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이 해방 후 우리 기술로 옛 건축물을 해체 복원하겠다고 나선 첫 건축물이 바로 이 극락전이었다.
그때 “신라 문무왕 때 능인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 안충, 보조, 신경, 밀암 등 여섯 스님이 무여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에 용수사의 축담 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라고 쓰인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위 글에서 “지금”이라 하면 조선 인조 13년(1625)인데, 그러면 축담스님이 극락전 지붕을 중수했다는 지정 23년은 약 260년 전인 고려 공민왕 12년으로 1363년이다.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 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극락전의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었고,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봉정사 극락전과 늘 함께 등장하는 라이벌 격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중수된 연도만 놓고 보면 봉정사 극락전이 더 앞서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을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창건 연도가 확실한 건물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으로 1308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봉정사 대웅전뿐만 아니라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목재를 오래 보존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목재의 내구성을 키우고 적정한 통풍과 제습, 옻칠, 단청 등의 방법으로 외부 균의 침입을 막고 부패를 방지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는 나무의 특징을 잘 파악해 적합한 용도로 쓴 것 역시 목조 건축물의 장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귀한 목조문화재가 훼손되지 않은 채 봉정사에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과거 봉정사의 위세가 대단하였다는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봉정사는 조선 초기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500여 결(3만여㎡)의 논밭을 지녔으며, 전체 건물이 75칸이나 됐던 대찰 중의 대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집이 오랜 시간 동안 전란의 화나 화재, 수재, 태풍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근 마을 주민들은 그 비결이 “봉정사 좌우를 감싸고 있는 천등산의 지맥 덕’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지만 측면 칸이 좁아서 정면이 긴 직사각형 건물이며 배흘림기둥 위에 공포를 세운 주심포식 건물이다. 지붕의 모양은 옆에서 봤을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 아미타불을 모셔놓고 있으며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극락전에는 옆문이 없어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어야 하는 특징이 있으며,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극락전 현판 밑에 용 그림과 함께 ‘주상전하 성수만세(主上殿下 聖壽萬歲)’라는 글자를 써놓았다. 주상전하는 임금을 뜻하는 말인데, 그 임금은 누구일까?
안동과 관련된 고려 시대의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공민왕이다. ‘몽진(蒙塵)’이란,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임금이 급박한 상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피란했음을 뜻하는 말이다. 1361년 10월 고려 공민왕은 안동 땅으로 몽진했다. 당시 홍건적은 두 번 고려를 침입했는데, 공민왕은 두 번째 침입 때 수도 개경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명색이 왕이었지만 피란길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진눈깨비가 몰아쳐 눈비에 젖은 옷이 다 얼어붙었고, 간신히 마을에 도착해도 관리와 백성이 모두 도망치고 없었으니 숙소 사정도, 음식 사정도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안동은 달랐다.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한 건 1361년 12월 15일. 안동으로 들어서려면 한겨울에 맨발로 차가운 냇물을 건너야 했다. 이를 본 안동의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맞대 다리를 만들어서 공민왕 일행을 건너도록 했다. 벼슬아치들도 깃발을 앞세우고 모든 관원이 나와 왕을 맞이했다. 공민왕은 안동 사람들의 이런 모습에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귀중품을 하사하였으며 훗날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도 안동의 지위를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해 주는 조치를 내렸다. 극락전에 새겨진 ‘주상전하’라는 글씨는 공민왕과의 이런 인연이 바탕이 되었다.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포인트 지점이 있는데 바로 삼성각 올라가는 길이다. 삼성각으로 올라가다가 멈춰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앞의 극락전과 뒤의 대웅전을 비교해서 한눈에 볼 수 있다. 고려 후기의 건축물과 조선 전기의 건축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뷰포인트이다.
봉정사(鳳停寺) 고금당(古今堂)
화엄강당과 마찬가지로 1967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얹혔다. 극락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1969년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광해군 8년(1616)에 손질하여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1969년 수리 이전에는 북쪽 지붕이 팔작지붕이었고, 건물 앞쪽에는 쪽마루가 놓여 있었으며, 정면의 각각의 칸마다 외짝 여닫이문을 달았었는데, 수리를 하면서 정면 3칸의 각각의 칸마다 2짝의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의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화엄강당과 마찬가지로 승려들의 거처 및 수행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