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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답사의 신, 『산사』에 가다! -대흥사-

당일형 답사

by 이재은


i_84iUd018svc1l4iwj1fojajt_2cgbxq.jpg 해남 대흥사 와불, 저 멀리 산 등성이로 누워계신 부처님의 형상이 보인다.

무릇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山寺)로 간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곳에서 비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1.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대흥사(大興寺)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의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과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백제 구이선왕 7년(426) 신라의 승려 정관존자가 만일암(挽日庵)을 창건한 것이 시초라는 설과, 신라 진흥왕 원년(517)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다. 반면에 다산 정약용이 편집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대둔사지’에서는 아도화상 창건설을 부정하며 신라말 창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거느린 승군(僧軍)의 총본영이 있던 곳이었으며, 선조 37년(1604) 서산대사가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이때 서산대사는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였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해남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대흥사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입구 앞에서는 사적지로 지정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로 향하던 해남 군민들이 떠나기 전 음료와 식사를 제공했던 터가 있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로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제1대종사(大宗師)인 풍담(風潭) 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그리고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종사는 산문에 든 지 40년 이상의 스님으로, 학덕이 높고 수행이 탁월한 스님을 일컫는다. 대강사는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뛰어난 강사를 지칭하는데 강백(講伯), 대강백(大講伯)이라고 부른다. 대흥사의 13 대종사와 대강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보면,


13 대종사

- 풍담 의심(1592~1665) : 청허 휴정대사의 문하인 기암 법견스님과 소요 태능스님 등을 찾아보고, 금강산과 보개산 등에서 언기선사의 부탁으로 ‘화엄경’, ‘원각경’ 등 대승경전을 연구해 음석(音釋)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다.


- 취여 삼우(1622~1684) : 얼굴빛이 붉고 윤택하여 해운스님이 ‘술 취해 있는 사람’(醉如子)이란 뜻으로 취여라는 별호를 내렸다. 담론을 잘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엄의 종지를 부연 설명하는 법회에 수백 명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 화악 문신(1629~1707) : 성은 김 씨로 전남 해남의 화산 사람이다. 대흥사를 떠나 제방 선지식들을 찾아 명산을 돌아다니며 미완성의 지식을 탁마 한다. 그 후 취여선사로부터 청허→소요→해운 종사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어받았다.


- 월저 도안(1638~1715) : 27세 때 묘향산에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를 강의하였는데 사람들은 스님을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불교뿐만 아니라 백가(百家)의 모든 책에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 배포하는 등 교화의 일선에서도 활약했다.


- 설암 추붕(1651~1706) : 성은 김(金)씨로 평안남도 강동(江東) 사람이다. 지은 과문의 원이름은 ‘선원제전집도서과평’으로 2권이 모두 현존하며 다른 하나는 ‘법집별행록절요사기’다.


- 환성 지안(1664~1729) :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로 출가했고 상봉 정원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7세 때 금강산을 순방하여 월담 설제선사를 찾아 법맥을 이어받은 뒤, 침식을 잊고 경전을 연구했다.


- 벽하 대우(1676~1763) : 성씨는 박 씨로 전남 영암 사람이다. 잉태될 때부터 특이한 조짐을 보였던 스님은 뒷날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를 결심, 마침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 설봉 회정(1678~1738) : 9세에 달마사의 조명장로를 찾아가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 16세에 머리를 깎고 마침내 도예를 떨치던 화악 문신대사를 찾아가 대사로부터 법통을 전해 받았으며 외딴섬에 들어가 토굴에서 철저히 정진하기도 했다.


- 호암 체정(1687~1748) : 성씨는 김 씨로 전북 고창군 흥양사람으로 환성스님에게 법통을 이어받고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주로 주석했는데 따르는 스님이 수백 명에 달했다.


- 상월 새봉(1687~1767) : 순천 사람으로 영조 43년(1766) 10월, 81세에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하고는 담담하게 입적했다.


- 함월 해원(1691~1770) : 어머니 조 씨는 꿈에 큰 물고기를 보고 잉태해 열 달이 훨씬 지나 아이를 낳았다. 스님이 된 이래 두루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탁마 했으며 뒷날 환성 스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입실 10년 만에 종문의 묘전을 모두 배웠다.


- 연담 유일(1720~1799) : 조선 후기의 고승이며 화순 출신으로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10세에 ‘통감’, 12세에 ‘맹자’를 읽었다.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전수함으로써 선교(禪敎)의 총본산인 해남 대흥사의 대종사(大宗師) 중 1인이 되었다.


- 초의 의순(1786~1866) : 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이자 다도(茶道)를 정립하였다. 정약용, 김정희 등과 폭넓게 교류했으며 시부를 익히기도 하였고,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13 대강사

- 나암 승제(1629~1707) : 화순군 능주면의 쌍봉사 사람으로, 설담자우 스님 법을 이은 제자다.

- 운담 정일(1678~1738) : 대흥사 정진당에서 강의를 열었으며 ‘운담시문집’을 저술했다.

- 연해 광열(생몰연대 미상) : 성격이 호탕하고 소탈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전해온다.

- 영곡 영우(생몰연대 미상) : 강회의 장엄함이 부처님 영산법회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 벽담 행인(1687~1748) : 서산의 법제인 부휴의 후예로 ‘고기’에 따르면 영해스님의 법손이다.

- 퇴암 태관(1687~1767) : 성품이 엄준해 고요한 곳을 찾아 참선을 즐겼다고 전해온다.

- 낭암 시연(1789~1866) : 조선 후기 불교사에 학문의 꽃을 피운 13대 강백의 한 분이다.

- 금주 복혜(1691~1770) : 아암 혜장스님으로부터 “종풍을 드날린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 만화 원오(1694~1758) : 호암 제정스님을 모시고 경론을 배워 경전의 깊은 뜻에 통달했다.

- 영파 성규(1728~1812) : 슬기로움이 뛰어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도 뛰어났다는 평이다.

- 완호 윤우(1758~1826) : 전남 해남군 별진 사람으로 연담 유일스님에게 선학을 배웠다.

- 아함 혜장(1782~1811) : 박학과 달변으로 명성을 떨쳐 30세부터 청풍당에서 법회를 열었다.

- 범해 각안(1820~1896) : 저서로 ‘동사열전’ 6편 1 책을 비롯해 모두 20여 편이 있다.


3. 대흥사의 국보와 보물


국보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해남 대흥사 영산회 괘불탱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

해남 대흥사 천불전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

묘법연화경 목판(2017-1)


4. 대흥사와 서산대사


서산대사는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중종 15년(1520) 평안도 안주에서 최세창(崔世昌)의 아들로 태어나 1538년 출가하여 중종 34년(1540) 승려의 계(戒)를 받았다. 명종 4년(1549) 승과에 급제하고 선교양종판사가 되었으나, 7년 만에 그런 벼슬은 승려된 자의 본분이 아니라고 하며 내려놓고 금강산 백화암으로 들어가 수행하였고, 다시 묘향산 금강굴에 가서 수행 정진하였다.


이후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는데 그중 유명한 인물로 사명당이 있었다. 사명대사는 묘향산까지 찾아와 서산대사를 시험하려고 "여기 오다가 고운 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대사님한테 드려야 할지 놓아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장난치듯 말했더니, 서산대사는 "나는 대사께서 소승을 찾아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을 텐데 밖에 나가 마중을 나가야 할지 안으로 모셔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중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한마디에 사명대사는 무릎을 꿇고 그날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묘향산에 있었던 서산대사는 승병을 일으켜 제자 사명당 등과 함께 왜군을 물리치려 노력하였다. 당시 73세의 나이로 도총섭(都摠攝, 조선 중기 이후의 승려 가운데 최고 직위)에 임명되어 전국 각지의 승병 1500여 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 전투를 주도하였다.


선조 37년(1604)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라는 시를 적어 제자인 사명당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는데 나이 85세, 법랍(法臘, 불교에서 속인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 67세였다. 다비한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와 해남 대흥사에 나누어 각각 부도를 세웠다. 대사의 유품은 대흥사에 보관되었으며, 현종 10년(1669) 후학들이 대사의 위국 충정과 은덕을 기리기 위해 대흥사 내에 표충사를 건립하였다.


대사는 아래와 같은 임종게(臨終偈, 고승들이 입적할 때 남기는 글)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千計萬思量(천계만사량) 생각하고 꾀하던 모든 것들

紅爐一點雪(홍노일점설) 화롯불에 떨어진 흰 눈 한 송이

泥牛水上行(니우수상행) 진흙으로 만든 황소가 물 위로 가고

大地虛空裂(대지허공렬) 대지와 허공이 꺼져버렸네


대흥사 가람 배치도 (조계종 홈페이지)

5. 대흥사의 주요 공간


대흥사 공간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계류(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를 사이에 두고 네 영역이 공존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입지상의 특성에 맞게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원과 남원으로 나눠지는 계류형 산사이다. 북원에서 시작해서 점차 전각들이 들어서면서 남원 구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먼저 북원은 대웅전 1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남원은 천불전 영역, 표충사 영역, 대광명전 구역의 3개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영역마다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대흥사의 공간구성은 지형에 따른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며 비대칭적으로 사찰의 영역을 확대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북원은 금당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침계루로 진입하게 된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불전인 대웅보전과 좌우의 요사채, 침계루가 사면 배치를 이루고 다시 보조 불전 격인 응진전과 요사채가 확장된 구조이다. 요사채란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북원의 주요 건물은 대웅보전, 응진전과 산신각, 침계루이며, 9세기 삼층석탑도 있다. 침계루는 북원으로 출입하기 위한 진입문이자 2층은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있는 범종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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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하여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을 모신 해탈문이 서 있다.


대웅전 영역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를 봉안하고 있는 대흥사의 주불전이며, 1667년 중창 시의 『대웅전 중건기』 기록을 통해 그 이전에 창건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 현판은 18세기 중엽의 유학자이며 명필이며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체를 완성했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다. ‘동쪽 나라의 진짜 글씨’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국진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사회가 성찰의 움직임,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을 찾자는 자주적 운동에서 탄생한 글씨체이다. 현판은 정사각형의 나무판 위에 ‘대웅(大雄)’과 ‘보전(寶殿)’이 두 줄로 각각 세로로 쓰여 있다.


대웅보전의 현판과 관련한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유명한데, 헌종 6년(1840)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추사는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다. 이때 대웅보전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보았다. 추사는 조선의 글을 다 망쳐놓은 자가 이광사라고 혹평을 하며, 그 현판을 떼고 자신의 글씨를 걸게 하였다. 그런데 8년 동안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추사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고 절에서 보관해 둔 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게 하였다. 현재도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의 글씨이다.


법당 왼쪽의 요사채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 현판이 있다. 추사의 8년 귀양살이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생각이 변했는지, 후대 사람들은 무척이나 궁금해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유배 생활 중 부인의 상을 당하고 회갑도 맞게 되며 시간이 갈수록 추사는 사람들 머리에서도 잊혀 가게 된다.


날이 차가운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세한도를 그리며 유배의 쓸쓸함을 달래던 추사는 글씨를 쓰고 또 쓰며 여러 글씨체도 익히고 또 익히며 그리고 비로소 자신만의 감정이 담긴 추사체를 완성하게 된다. 유배 기간에 그는 각 글씨체가 가지고 있는 개성과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아마도 귀양살이 동안 깊은 사색과 성찰을 통해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을 보다 유연하고 너그럽게 내려놓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추사의 생각을 현재 우리는 알 수가 없으니….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대흥사의 북원 공간에서는 당대 최고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글씨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대웅보전의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은 광해군 4년(1612)에 제작되었다. 전란 과정에서 의승군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선조 39년(1606)에 봉안되고 6년 뒤에 이루어진 불사였는데, 대형 불상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불사였다. 좌우 협시불상에서 발견된 『소성복장기(塑成腹藏記)』에는 당대 불상 조각의 대가였던 태전스님을 비롯한 10명의 조각승, 불상 제작에 필요한 시주물목이나 참여하였던 380여 명의 사부대중을 기록하고 있어 불상의 가치를 한 층 높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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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대웅보전과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천불전 영역


남원의 천불전(千佛殿) 영역은 천불전(보물)과 가허루 등 예불 공간과 함께, 봉향각과 용화당 등 승려들의 수행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대승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실유불성(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부처의 성품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찰에서 마주치면 서로 합장을 하며 “성불하십시오.”라고 인사를 한다.


불교에서 천(千)이라는 숫자는 ‘가득하다’, ‘꽉 차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천불사상은 온 우주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을 건축으로 구현한 공간이 천불전이다.


대흥사 천불전은 「천불전 조성 약기」에 따르면 1811년의 화재로 피해를 입은 뒤 1813년에 중건되었다. 천불전에는 석가모니 부처와 문수보상, 보현보살이 봉안되었고, 그 뒤로 석조 천불상을 봉안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이 존재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천불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천 개의 불상은 모두가 각각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현재의 천불전 건물을 지은 이는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대사인데, 순조 13년(1813) 천불전을 중건한 대사는 질이 좋기로 소문난 경주의 옥석(玉石)으로 천불을 조각하게 하였다. 열 명의 장인들이 천불을 완성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경주 기림사에서 완성된 천불을 나눠 실은 두 척의 배는 경주 장진포를 출발해 해남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파도에 떠밀리며 232위를 실은 배는 무사히 해남으로 도착했지만 768위를 실은 배는 표류하여 일본 나가사키의 해변에 닿게 된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 알려진 전설에 의하면, 일본의 해변에 밀려온 배에서 수많은 옥불(玉佛)을 발견한 일본 사람들은, 절을 지어 옥불을 모실 것을 논의했는데, 어느 날 불상들이 일본인들의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 이런 꿈을 꾼 일본인들이 깜짝 놀라 옥불을 해남으로 돌려보냈다는 전설이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완호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훗날 뉘라서 어느 것이 먼저 온 300개의 부처이고 어느 것이 동쪽으로 떠내려갔던 700개의 부처인 줄 알겠습니까? 반드시 부처의 등에다 일(日) 자를 써서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불상들이 뒤섞이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불전 불상 중 일본을 다녀온 불상의 등 뒤에는 일(日) 자가 새겨져 있다.


표충사 영역


표충사 영역에는 표충사와 조사전, 의중당 등 서산대사와 서산대사의 제자들을 기리는 여러 전각이 있다. 표충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와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표충사는 한국의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공간이며 불교사찰 안에 유교식 사당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흥사의 종교적 개방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밀양에 있는 표충사(表忠寺)와 그 의미는 상통하나 밀양 표충사는 사명대사만을 모신 사찰이고, 대흥사의 표충사는 대흥사 내에 별도로 3인의 스님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나라를 구한 후, 이들의 공적은 크게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들의 공적이 재평가되었다. 왜란이 200년 즈음 지난 후 정조에 이르러 정조는 이들을 충신의 반열에 올리고, 이들을 모신 전각의 현판(表忠祠)을 직접 써 내림으로써 이들의 공적을 후대에 길이 전하도록 한 것이다.


1791년에 기록된 「표충사 창건기」에 의하면, 표충사는 정조 15년(1789)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효와 충을 강조했던 조선에서는 서산대사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건립해 주었다. 이를 통해 국가 공인 사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표충사의 역대 제관은 왕명에 따라 인근 고을 수령들이 맡았다.


이후 표충사 건물이 노후하여 1836년에 대웅보전 뒤로 옮겨 지었는데 대웅보전을 내려 보는 위치여서 헌종 2년에(1861) 현 자리로 표충사 건물을 옮긴 사실이 「표충사중이구지기」에 기록되어 있다. 국난이 났을 때 크게 의병, 승병, 중국 명나라 지원병이 국가를 지켰다. 특히 승병은 서산대사와 그 제자들만 5,000명 이상이 전투에 참여하여 그 비중이 컸다.


표충사는 국가적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지방관리가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산대사 유물 가운데 ‘정선사가록’은 현재 남아있는 서산대사의 유일한 친필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화상당명병서’는 정조가 서산대사의 공적과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정조의 친필 문서이다. 정조는 친히 ‘표충사’ 편액을 써서 내리고, 또한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畵像堂銘)’과 그 서문을 짓고 글을 써서 대흥사로 내려보냈다. 끝부분에는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재(弘齋)’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선조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서산대사에게 전국의 승병을 총지휘할 수 있는 정 3품의 벼슬을 내리는 교지도 있는데, ‘화상당명병서’와 이 ‘교지’는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海南大興寺西山大師遺物)’ 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숭유억불의 시대에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스님들의 공덕에 임금과 유학자들마저 감동하여 고개를 숙인 것이다. 혹자는 ‘누가 이들이 들었던 창과 활이 불가의 금기인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음)의 계율을 어겼다고 비난할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6.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추사(秋史) 김정희


초의선사(1786~1866)는 전남 무안 출신으로 속가에서의 성은 장 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호가 초의(草衣)이다. 대흥사의 13 대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도 불린다.


어린 시절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를 구름처럼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대흥사 10대 강사인 완호윤우(琓虎尹佑) 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선사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 차와 참선은 한 가지 맛)’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이처럼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보급함으로써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살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다산 정약용과, 동갑으로 유불(儒佛)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동무인 추사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선사는 다산에게서 유서(儒書 유교서적)를 빌려 읽고 시를 배웠으며, 또한 역학(易學 주역을 연구하는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이들의 교류에는 풍류가 함께 했으며 다산과 초의에게는 그들이 즐겨 마시는 차가 있었다. 다산은 이미 혜장선사로부터 다도를 배웠고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다도의 달인(達人)으로 불릴 만큼 차에 대한 조예가 깊던 인물이다. 다산이 처음 다도를 알게 된 것은 혜장선사로부터 이지만 다도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아무래도 초의선사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추사는 금석학자이자 실학자이며, 우리나라 제일의 문장가인 동시에 최고의 명필로 추사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충남 예산에서 1786년 태어났으며 그의 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등이며 자는 원춘이다. 추사의 아버지는 그를 무척 사랑하여 그가 24세 되던 해에 청나라에 동신사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류를 맺었는데, 그들을 통해 금석학과 실학 등을 배웠으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특히 청나라 상류사회에서 배운 차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후일 이 차 문화의 영향으로 같은 해에 태어난 초의선사와 절친의 관계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초의선사와의 인연은 무척이나 각별하였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차를 마시기도 하였고, 이후 초의선사가 그를 못 잊어 제주도로 건너가 반년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추사가 10년 먼저 세상을 뜨자 초의선사는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저세상에 가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의 교류에 고리 역할을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차였다.


초의선사의 다도(茶道) 정신을 기리는 목적의 ‘초의문화제’는 1992년부터 초의선사의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에 대흥사와 일지암 등에서 현재까지도 거행되고 있다.


7.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대흥사에서 산길로 약 30~40분쯤 올라가면 북미륵암에 도착하게 된다. 고된 산행 뒤에는 깊은 산중에서 수행 중인 미륵부처를 만나볼 수 있다. 북미륵암은 국보 1점과 보물 1점을 보유하고 있는 대흥사의 암자이다. 암자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대둔사지』에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미륵암은 영조 30년(1754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와서는 연담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바로 이곳에서 강학(講學)을 열었다.


북미륵암은 용화전, 요사채 등의 건물과 3층 석탑으로 이루어졌다. 용화전은 국보인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1985년 4월에 중수하였으며, 1995년 4월에 중수한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ㄴ'자형의 건물이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양각으로 표현하였는데, 부처의 얼굴이나 각 부위의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1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불의 전체 높이는 5.2m이며 공양하고 있는 4명의 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형태의 좌상으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그 규모뿐만 아니라 조각 수법, 양감의 처리 등이 탁월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도 수작(秀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미륵암과 함께 남미륵암도 있는데 이 두 암자의 미륵부처 조성관 관련해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하늘에 살던 천동과 천녀가 죄를 짓고 인간세계로 쫓겨났는데, 이들이 하늘로 다시 올라갈 방법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었다.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천동과 천녀는 해가 지지 못하도록 대흥사 만일암의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의 바위에 서 있는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고 천녀는 북쪽의 바위에 앉아 있는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천녀는 앉아 있는 불상을 조각했기에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천동보다 먼저 조각할 수 있었고 불상 조성을 마친 천녀는 하늘로 빨리 올라가고 싶은 욕심에 만일암 천년수에 걸어놓았던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렸다. 해자 지자 금세 어두워졌고 더는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된 천동은 결국 하늘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미륵암의 조각 수법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남미륵암은 음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반면에 북미륵암은 양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미륵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중간에 만일암 터와 미륵불 조성 당시 해를 매달아 놓았다는 천년수가 있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온 천년수와 미륵불, 두륜산과 대흥사를 통해 인간의 삶이 무상함을 느낌과 동시에 하루하루를 얼마나 소중히 정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대흥사 답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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