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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답사의 신, 『산사』에 가다! -부석사-

당일형 답사

by 이재은


부석사 무량수전 옆의 '부석'

무릇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山寺)로 간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곳에서 비움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1.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부석사(浮石寺)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소백산 국립공원의 봉황산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末寺)이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華嚴宗)의 대표 사찰이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땅에서 뜬 돌'이라는 뜻인데 이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위에서 말한 부석사의 본사인 고운사 역시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이다.


의상은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떠났다. 등주(登州)의 바닷가에 도착하여 어느 불교 신자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주인에게는 아리따운 용모의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는데 선묘는 의상을 지켜보며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에게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였다. 이때 선묘는 영원히 의상을 따를 것을 결심하고 의상이 불교 공부하는 것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의상은 종남산의 지엄(智儼)을 찾아가 화엄사상을 연구하였고, 신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선묘의 집에 들러 그동안 편하게 지내게 해 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바로 배를 타러 갔다. 의상이 떠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선묘는 급히 배를 타는 곳으로 가보았지만 배는 이미 저만치 떠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이 입을 옷과 여러 물건들을 담은 상자를 배를 향해 던져 의상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스님이 무사히 돌아가 불교의 교리를 잘 펼치시게 해 주십시오.’ 빌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선묘는 용으로 변하였고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용이 된 선묘는 계속해서 의상을 보호하였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화엄 사상을 펼칠 곳을 찾아 경상북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어 의상의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때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절의 건물 위를 덮어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상황을 만드니 스님들이 놀라고 두려워 모두 도망갔다. 의상은 그곳에서 화엄경을 만들어 날마다 강론하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교리가 전파되었다. 의상은 큰 바위가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현재에도 부석사에는 부석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용이 된 선묘가 변하였던 바위라고 전해진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무량수전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인데, ‘부석(浮石)’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설화에 따라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와 화엄을 지키고, 사찰을 수호해 준 선묘 낭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일본 교토의 화엄도량 고산사의 『화엄연기』에는 선묘의 일화가 여섯 권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어려운 사회를 겪어내던 일본의 여성들에게 선묘의 희생정신이 커다란 지주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일본 승려 묘에가 승려 화가인 조닌을 시켜 그린 그림이다. 이어서 선묘사(善妙寺)를 짓고, 목조 선묘신상(善妙神像)을 안치하여 아예 절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선묘가 이들 사찰에 보살로 모셔져 있다지만, 실상은 선묘낭자가 아닌 ‘善妙大師(선묘대사)’로 표기되어 있다. 교토의 선묘신사에는 ‘선묘대명신(善妙大明神)’이라고 새겨진 오래된 석등도 있다. 오랫동안 선묘가 사찰의 신으로 숭배되었음을 보여 주는 정황들이다. 이들 그림과 선묘 목조상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교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상을 사모하여 단월이 되었던 선묘의 설화를 그림으로 엮은 일본의 ‘화엄종조사회전’, 가마쿠라시대. 일본 쿄토 고잔지(高山寺). 일본 국보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 전에 의하면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립한 후 전국을 시찰하는 중 부석사에 이르렀을 때 주지 스님으로부터 이곳에 신라 왕의 어진을 모셨다는 말을 들은 후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김부식은(집필 당시) 아직도 부석사에 그 칼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흥교사(興敎寺) 또은 선달사(善達寺)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가 크게 증축하였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평지 사찰과 달리 산지 사찰인지라 보다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 주고 있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의 배치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부석사는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문헌과 그림 등에 나온 과거의 가람 구조가 현재와는 다르다. 1840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는 10세기 중반의 부석사의 모습이 적혀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부석사의 국보와 보물


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조사당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보물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진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주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영주 부석사 범종각


4. 부석사와 의상대사


의상대사는 신라의 승려로 속명은 김일지(金日之)이며 진골 귀족 출신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고승인 원효대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한국 고대 불교계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시호는 고려 숙종이 내린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이다. 고려 국왕이 화엄의 시조로 높여 부르고 있다.


의상은 19세 때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하기 전에는 촉망받는 화랑으로 가문의 기대를 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가문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원효와 마찬가지로 출가하게 된 계기에 대해 다양한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 대표적인 이야기는 화랑으로 전투에 참여할 때 전장에서 살육을 한 후 생긴 죄책감과 회의감, 그로 인한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 때문에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랑 시절 화랑 동지들과 함께 사냥 훈련을 하러 나갔는데 혼자 사냥을 포기하고 하산해 버렸다. 화가 난 아버지는 그냥 집에 돌아온 일지에게


"너는 훈련을 포기했으니 나라를 배신한 것이요, 부모의 뜻을 어겼으니 불효를 저질렀다. 또한 함께하는 벗을 두고 혼자 도망쳐 신의까지 저버렸으니 세속오계 중 4개(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를 어긴 것이다. “


라며 종아리를 때렸다. 아버지의 화가 풀린 그날 밤, 일지(출가 전 의상대사)가


"아버지, 저는 세속오계의 단 하나를 지키고자 나머지를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생유택입니다. 죄 없는 짐승을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죽일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하니, 평소 생명을 중시하던 아들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내 아들이 이름 높은 사람이 되길 바랐는데 이름을 날리기는커녕 스님처럼 살려하다니…"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의상은 스님이 되는 허락을 받은 대신,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 어디서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조건을 받았다고 한다.


650년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도중에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해받아 수십 일 갇혀 있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오게 된다. 661년 2번째로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는데 원효는 그 유명한 해골물 사건을 겪은 뒤 깨달음을 얻었다며 도중에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은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혼자 당나라로 건너간다. 원효는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아 불법 자체를 마음속에서 구하려 했고, 의상은 보편적인 불법을 구하려는 생각이었기에 여기서 다른 결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10여 년 동안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중인 670년, 신라와 당나라의 사이가 악화되고 나당전쟁이 발발한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신라에 주둔하고 있었던 당나라군과 신라군 사이에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신라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면서 당나라군을 공격하자 당 고종은 배신에 대한 대가로 김흠순과 김양도를 억류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김흠순이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들 것임을 문무왕에게 알릴 수 있도록 의상을 귀국시켰다. 김흠순은 나중에 간신히 풀려났지만 김양도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당나라에서 삶을 마감한다.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화엄종을 널리 전파하였다. 동해 바다 절벽에 있는 관음굴에서 기도한 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수정으로 된 염주 한 벌을 받으며 절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바로 이 절이 양양의 낙산사이다. 중생의 고난을 구제해 준다는 관세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보타락산’의 줄임말인 ‘낙산’에서 따와, 동해 바다 앞 강원도 양양에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하였다.


낙산사 이외에도 영주 부석사, 부산 범어사, 공주 갑사, 울진 불영사 등의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야산 해인사와 비슬산 옥천사도 의상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6두품 출신인 원효와 달리 의상은 진골이었는데 그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의 귀족 세력과 결탁하기를 피하려고 했다. 실제로 화엄종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로다.'


라는 입장에서 우주 만물을 하나로 아울러 국왕 중심의 체계를 잡는 데 사상적인 바탕을 제공했기에,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왕실 종파로 자리 잡았다. 수도 서라벌의 나성(羅城)을 쌓으려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계획한 문무왕이 의상에게 공사에 대해 자문하자,


"왕의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고 있다면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넘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은 넘지 않을 것이나,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도 않는데 으리으리하게 성을 짓고 궁을 지어봤자 쓸데없는 짓입니다."


라고 간언해 문무왕이 공사를 중지하도록 만들었다.


원효가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퍼트렸듯이 의상은 현세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관음 신앙과 아미타 신앙을 함께 전파하는 데 힘썼다. 702년 의상은 78세를 일기로 열반했고 저서로는 화엄 사상의 요지를 210자로 축약해 시로 표현한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 등이 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7언 30구 210자로 화엄 사상의 핵심을 도인(圖印 도장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4개의 ‘회(回)’자 모양의 도인(圖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글자인 ‘법(法)’과 마지막 글자인 ‘불(佛)’이 가운데에서 다시 만나 이어진다.


『화엄일승법계도』에는 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책 끝에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훗날 이 책의 저자를 당나라의 지엄(智儼) 혹은 현수(賢首) 또는 진숭(珍嵩)이라고 하는 등의 설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나 고려의 승려 균여는 그의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서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湘傳)」으로부터 저자가 의상임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이는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과 ‘연기(緣起)’라는 의상의 핵심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많음 속에 그 하나 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 그것들이 곧 하나니라.


5. 부석사의 주요 공간


부석사는 경사진 지형에 사찰을 짓기 위해 계단과 축대라는 해결책을 이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계단과 축대는 단순한 지형의 한계를 극복하는 구조적 기능 이외에도 불교에서의 고된 수행의 여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높게 쌓은 축대는 이상세계인 극락세계와 현실세계인 사바세계를 높이의 차이로 구현하고 있다. 33개의 계단은 불교의 33천을 상징해 신성한 공간으로의 상승을 안내하고 있다. 33천은 제석천을 비롯한 33명의 천왕이 다스리는 하늘의 세계를 말하며,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하늘의 세계로 여기기 때문에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상향의 세계를 상징한다.


축대는 높고 계단을 좁고 가파른데, 이러한 공간구성으로 인해 수행자들은 천천히 조심히 걸어 올라가며 경건한 마음으로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 (보물)


부석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인데, 이는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안양루 밑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천장(안양루 바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며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 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은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사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안양루의 앞쪽과 뒤쪽에 걸린 편액이 다른, 앞쪽 즉 난간의 아래쪽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고 씌어 있고, 뒤쪽인 위층 마당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두 개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安養)’이란 극락세계, 곧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불국토를 의미한다. 이 안양문을 지나야만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안양문 아래가 세속의 세계라면, 안양문을 들어서는 순간 천상의 세계인 극락세계로 변모한다. 그리고 극락세계에 들어서게 되면 안양문은 안양루로 탈바꿈한다. ‘안양문에서 안양루로….’


들어가기 전에 바라본 안양문은 2층 구조이지만, 진입한 후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안양루는 단층 누각인 듯 보인다. 누각의 아래 1층은 자연석 초석 위에 그랭이질 한 기둥을 세운 것이다.


안양문을 통과한 후, 안양루에서 바라본 풍광은 그야말로 신선의 세계, 천상의 세계이다. 가까이는 범종루, 천왕문, 일주문이 발아래로 도열해 있고, 멀리는 소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자락은 해 질 무렵, 비가 온 뒤가 장관이다. 안양루에 올라서면 잠깐이나마 누구나 신선이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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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바라본 안양문은 2층 구조이지만, 진입한 후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안양루는 단층 누각인 듯 보인다.

이러한 안양루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 있는 김병연은 안양루에 올라 자연의 위대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시가 지금도 안양루에 걸려 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그리고 안양루를 답사하다 보면 또 다른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바로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 건물의 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공포(栱包)라고 하는데 안양루의 공포 사이에는 앉아있는 부처님 형상의 보여 이를 공포불(栱包佛)이라고 하며 또한 부처님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하여 현현불(顯現佛)이라고도 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보통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사찰의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초기의 석등은 어두운 곳을 밝히거나 어두울 때 쓰는 실용적인 성격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지닌 불가의 중용한 상징물이 되었다.


형태적 구분은 크게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각의 부분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상대석 : 지붕 역할을 하는 옥개석과 불이 밝혀지는 화사석(火舍石)

중대석 : 기둥을 이루는 부분이며 ‘간주석’이라고도 함

하대석 : 기둥을 받치는 부분


현존하는 석등의 양식을 볼 때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팔각, 육각, 사각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석등의 중간 부분인 간주석(竿柱石)의 형태에 따라 고복석(鼓腹石, 장구 모양)으로 된 것, 쌍사자로 된 것, 팔각 주석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의 석등은 현재 국보와 보물로도 많은 수가 지정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국보로 지정된 석등은 다음과 같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4각형의 바닥돌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형 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위 받침돌을 얹어놓았다.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의 연꽃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태이다.


8각형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동서남북에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 역시 8각형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함을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부석사의 석등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와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이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석등의 화사석 부분에 새겨진 보살상
부석사 무량수전 석등의 하재석 부분

부석사에는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도 다른 석등 2기가 더 있다.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취현암(醉玄庵) 앞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이다. 신라 하대는 사찰이 번성하는 시기여서 건물의 중창은 물론 화엄종이 크게 일어나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많이 조성되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당시 문화재청(현재 국가유산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무량수전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도 하며 아미타전(阿彌陀殿), 미타전(彌陀殿)으로도 불린다. 또한 극락을 뜻하는 ‘수마제’라는 단어를 써서 수마제전(須摩提殿)이라고도 한다.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보물로 지정)


아미타불은 부처임에도 스스로 열반에 들지 않고 극락세계에 머물며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는 부처인데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어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극락세계에 머문다. 그래서 이를 상징하는 법당인 극락전은 한국의 절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대웅보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함께 가장 흔히 볼 수 있고, 중요하게 여기는 건물이다.


극락전을 본당으로 삼는 절에서는 극락을 다르게 일컫는 말인 안양(安養)을 사용하는 안양루, 안양교, 안양문과 같은 건물들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부석사가 그러하다. 이외에도 서산 개심사의 안양루, 불국사의 안양문도 유명하다. 참고로 석가모니의 열반 이후 미륵불이 현세에 나타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56억 7천만 년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열반에 들 때까지 극락세계에서 머무는 아미타불의 수명은 무한해야 한다고 여겨져 붙여진 이름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세계의 극락정토에 있으므로 보통 극락전의 전각은 문 방향을 남향으로 놓되, 아미타불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게 봉안한다. 이렇게 하면 참배자는 건물의 왼쪽(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된다.

극락전이라는 건물 자체가 워낙 많기 때문에 국가지정문화재(국보, 보물)로 등록된 경우가 많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완주 화암사 극락전 (국보)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물)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보물)

청도 대적사 극락전 (보물)

문경 봉암사 극락전 (보물)

청송 보광사 극락전 (보물)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 (보물)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보물)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

대구시 동화사 극락보전 (보물)


이처럼 건물 자체가 단독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도 있지만, 건물 대신 내부의 불상이나 탱화, 또는 건물 주변에 있는 탑, 석등 등이 지정된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국보인데 건물 내부에도 국보로 지정된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가 있고, 그 외에 보물로 각각 지정된 불상과 벽화 2점이 더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목조건물로 단층으로 되어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현판의 서체는 고려말 공민왕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1361년 2차 홍건적의 침입 당시 공민왕은 순흥(영주), 안동까지 몽진했는데 그때 몇 점의 글씨들을 남겼고 그중 하나가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이라는 것이다. 현판의 글씨를 공민왕이 썼다고 하는 얘기의 근거는 현판 뒷면에 있는 글씨 때문인데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무량수전 현판의 서체는 고려말 공민왕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無量壽殿懸板裏書] 粤在新羅儀鳳元年創建浮石寺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當此庚午之時國族郞宣君到于浮石寺題于符板之意命其書鎭云到于辛未孟夏間寺晝僧瑛珌慨然傾心四雲角改造也


신라 의봉 원년(676년)에 부석사를 처음 지었고, 금당(무량수전)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직접 쓴 글씨이다. 경오년(1690년)에 왕족인 낭선군이 부석사에 와서 이 현판을 다시 걸고자 하였으며, 신미년(1691년) 여름에 절의 화승 영필이 마음을 다하여 현판 테두리를 새로 만들었다.


무량수전 내부에는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법당과 불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은 불단을 서쪽에 치우치게 두고 불상은 동쪽을 바라보게 배치하였다. 이는 아미타불이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음을 불상의 배치로 구현한 것이다.


불상의 수인이 석가모니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로 볼 수도 있으나, 이 불상을 모신 장소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것과 또한 부석사의 원융국사탑비의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을 통해 아미타불로 판단하고 있다.


소조 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 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소조여래좌상의 높이는 2. 78m이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상의 수인에서 의문점이 생겨난다. 아미타불은 보통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이 불상은 석가모니 불상이 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수인을 하고 있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 (국보)


조사당(祖師堂)이란, 종파의 조사(祖師) 또는 창건주를 기리기 위하여 이들의 영정을 봉안한 불교사찰의 불전 가운데 하나이다. 선종에서는 수행의 방편으로 경전(經典)보다는 선사의 가르침이 중심을 이루었던 탓에 이분들이 입적하면 부도(浮屠)를 건립하고, 영정을 그려 봉안하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이러한 전통은 다른 종파에까지 전파되어 큰 사찰에는 대부분 조사당을 갖추고 있다.


선종의 사찰에서는 보통 인도와 중국의 조사인 33 조사와 함께 고려의 보조국사, 보우 등을 조사당에 모시게 되는데, 때로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 사찰에 머물렀던 것과는 상관없이 조사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찰에 따라서는 개산조만을 따로 모셔 개산조당(開山祖堂)이라 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 사찰을 창건, 중건하였거나 그 사찰에서 수행한 고승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향 하는 곳을 영각(影閣)이라 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조사당과 순천 송광사 국사전(國師殿),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여주 신륵사(神勒寺) 조사당 등이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의 목조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얹은 넓지 않은 크기의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화려한 모습에 적응되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평소 의상대사가 살아온 과정을 나타낸 것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모습의 건축물이다.

부석사 조사당은 평소 의상대사가 살아온 과정을 나타낸 것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모습의 건축물이다.

1916년 해제 수리하는 과정에서 1377년에 중수하였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어서 고려시대 건축물로 인정받았는데, 1377년이면 고려 우왕 3년에 해당한다. 무량수전에 비해 시기는 늦었지만 의사대사가 거처했다는 점, 그리고 의상대사의 좌상을 봉안하고 있다는 점 등을 인정받은 고려시대 중요한 건축물이기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사당을 정면에 바라볼 때, 오른편에 보면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안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이는 선비화라고 불려지는 나무인데 의상대사가 꽂아놓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지금까지 자랐다고 한다. 이 나무에는 일체의 물이나 비료를 주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신기하면서도 의상대사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나무를 베거나 훼손하는 사람에게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실제로 조선 광해군 때 경상감사를 지낸 ‘정조’라는 인물이 이 선비화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는데 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는 사건이지만, 당시는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다. 또한 1720년 문신 박홍준이 선비화의 줄기를 하나 잘랐다가 훗날 죄를 지어 곤장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전하고 있다.


또한 잎사귀를 따서 차로 끓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잎사귀를 많이 따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현재와 같은 창살이 설치되었다고 전해진다.


퇴계 선생 역시 부석사를 방문하였다가 이 선비화를 보고 감탄하여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선비화(禪扉花)

擢玉森森依寺門

僧言卓錫化靈根

杖頭自有曺溪水

不借乾坤雨露恩


옥같이 빼어난 무성한 줄기 절 문에 기대 사는데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렸다 하네.

지팡이 끝머리에 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천지의 비와 이슬 은혜 빌리지 않았네.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부석사 조사당 입구 쪽 내벽의 여섯 면에는 범천,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 등 총 6위의 벽화가 그려졌다. 벽화는 조사당의 중건 시기인 고려 우왕 3년(1377)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사찰 벽화 가운데 최고의 사례이자, 고려시대 유일한 불교 존상 벽화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조사당 벽화 원본은 1916년경 조사당 해체 수리 시 분리되어 무량수전에 안치되었고, 1979년에 보호각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해 왔다. 벽화는 지난 2020년 6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보존 처리 중이다. 한편, 벽화가 있었던 조사당 벽면에는 손연칠선생이 그린 복원 벽화가 있으나, 지금은 원본 벽화를 스캔 출력한 사진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당으로부터 벽화가 분리되기 직전에 촬영된 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 벽화의 위치와 배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석사 조사당 내 모사 벽화도 당시 배치와 동일한 순서로 그려져 있으며,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벽화를 전시할 당시에도 동일한 순서로 배치되어 있었다. 벽화 철거 이전의 유리원판 사진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벽화 모사도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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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의 벽화는 어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천왕 2위씩, 가장 외곽에 천부(제석천, 범천) 도상 1위씩 배치되어 있다.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왼쪽부터 제석천, 동방천왕, 남방천왕, 서방천왕, 북방천왕, 범천 순으로 그려져 있다.


조사당 벽화는 본존인 의상대사상을 중심으로 좌우 측면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입구 내벽에서 본존을 향한 배치이다. 이 점을 고려하여 부석사 조사당 입구 벽체를 불감(佛龕)처럼 좌우문을 열면, 벽화가 본존의 좌우로 나란히 배치된다. 다시 말해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는 입구 좌우 내벽에서 본존을 향해 배치되어 있으나, 입구의 좌우 외벽을 불감처럼 열면, 본존의 좌우에서 수호하는 형식일 뿐만 아니라, 본존과 같이 남쪽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가정하에서 보면 실제 조사당 건물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으므로, 사천왕의 배치 역시 남향으로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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