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랑에 대한 짧은 글 -3.영희, 그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그녀
"오늘 선배누나와 카톡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났던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대학 2학년, 4월이었다.
내가 다니던 경영대 앞길은 바로 옆의 인문대와 오른쪽의 사회대, 그리고 농대까지 수많은 학생들의 이동통로로 항상 번잡했는데 거기서 친구와 서 있다가 몸을 돌린 순간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서너 명의 여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여학생들에서 가장 키가 큰 여학생에게 내 시선이 갔다. 지금도 그날의 그 순간을 떠올리면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나 그녀가 입었던 옷이나 전체적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난 뒤 그녀에 대해 나는 한눈에 반해버린 사람이라고 썼다.
한눈에 반해 버린 사람,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청바지에 하얀 블라우스, 그 블라우스에는 푸른색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남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는 가벼운 백과 함께 몇 권의 책을 안고 그야말로 전형적인 여대생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나는 영혼을 뺏겨버린 듯했다.
그 뒤 그녀가 어느 과에 다니는 몇 학년인지를 수소문했다. 며칠 동안 수소문 끝에 그녀가 사범대 가정교육학과에 다니는 정보가 전해졌다. 그런데 실망스러웠던 것이 그녀가 3학년이라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연상 연하가 대세인 시대라면 한 살 혹은 한 학년차이는 일도 아니었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커플은 흔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몹시 낙망했다.
그런데 마음을 애끓이고 있던 나를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그때 인문대에 다니던 교회 선배누나의 친구가 사범대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얼마뒤에 내게 말했다.
"그 애 3학년이 아니라, 2학년이란다... 내가 한번 만나게 해 줄까?"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선배의 주선으로 그렇게 해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연애에 서툴렀던 나는 그녀에게 할 말을 종이에 적어 며칠 전부터 모두 외웠다. 돌아보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던가..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게는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후문 앞 어느 카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녀가 나타나서 내 앞에 앉는 순간, 그녀에게 할 말을 기억해 뒀던 그 모든 것이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며칠밤을 새며 그녀에게 준비해 뒀던 말들, 그것은 그녀가 앉아 가볍게 웃는 그 순간에 다 날아가버린 것이다. 그다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한 결과였다.
졸업뒤에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사회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너처럼 달변가가 그 순간에 아무 말도 제대로 못 했다고? 그거 정말이야?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너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우와 그런 시절이 있었어?"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 후 직장에서 영업을 하다 보니 말하는 것은 늘었지만 그때는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 만남, 당연히 애프터는 있을 수 없었고, 하지만 그냥 끝내지는 않았다. 그 뒤 그녀가 시험철에 중앙도서관에서 같은 층 다른 호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아침 일찍 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던가 그녀가 아침 일찍 나와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려다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어느 쪽에 커피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순식간에 학생회관에까지 달려가서 커피를 뽑아 왔다.
그리고 그녀가 공부하는 열람실의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가 그녀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놀란 그녀의 모습... 나는 그냥 돌아서 나왔고 뿌듯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비록 별것 아닌 거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누군가 열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내 앞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미처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앞에 커피를 내미는 손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놀랍게도 그녀였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어제는 고마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놓고 간 커피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시지도 못하고... 늘 응답받지 못했던 마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도 해도 그 순간만큼은 하늘을 날아오를 만큼 행복했다.
나는 그 기쁜 소식을 선후배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커피 한잔이 그렇게 기쁨을 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가벼운 눈인사정도만 하고 지나칠 뿐, 더 이상의 진전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당시의 일기장을 찾아보거나 혹은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녀는 나를 어느 정도는 의식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교회선후배들과 동기들이 중앙광장의 잔디밭에서 방과 후에 모임을 갖곤 했는데 그녀가 속한 동아리도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모임을 가졌고 그녀는 힐긋힐긋 나를 보기도 했었다.
그녀에 대한 짝사랑은 그렇게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다가, 어느 날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왔을 때 빗줄기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가지고 있던 나는 우산을 펴 들고 터벅터벅 걸어서 가고 있는데,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앞쪽에서 그녀가 정장을 입고 지나쳤다. 그녀는 앞만 보고 가고 있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던 터라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지나쳐 가자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뭐라고 말할 것인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런데 정문 쪽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그녀가 누군가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나는 한참을 꼼짝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와 그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참.. 슬픈 결말이었다.... 해가 바뀌고 3학년이 되었고, 1학기가 끝난 후 나는 여름에 입대를 했다. 서울의 구로 경찰서에서 데모 진압도 하고, 산불도 끄러 가고, 살인 사건의 현장도 가고, 흉기를 든 이와 대결도 하고, 도둑을 잡으러 뛰어가고 온갖 범죄자들을 상대하고 가끔씩 그녀를 생각했지만 그녀는 졸업반이 되었을 것이고 졸업을 했을 터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녀가 없는 캠퍼스로 되돌아왔다. 3학년 2학기로 복학한 나는 더 이상 순진한 대학 2학년이 아니었다. 복학생들이 다 그러하듯이 집과 학교, 도서관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오고 가며, 공부하기에 바빴다. 그러다... 그해 가을이던가.. 우연히 시내의 카페에서 그녀를 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던 대학 2학년의 봄에 입었던 그 옷차림 그대로였다. 당혹스러웠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 뭔가 촌스럽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더 이상 순진한 게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예전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가을날 신촌과 종로를 화염병과 쏟아지는 돌을 피해 가며, 격전을 치르며 그녀를 생각했던 그리고 위로를 얻었던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가끔 학교를 가게 되면 그녀가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곤 한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있을 텐데...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다. 한때는 가슴 설레며 행복했던, 그리고 가슴 쓰렸던 짝사랑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날들... 순수한 감정들....."
영희 그녀를 다시 본 것은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사대를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였다. 그는 군입대를 하지 않고 그대로 졸업을 했는데 사범대 졸업앨범에 그녀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졸업앨범 속의 그녀를 보면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조금만 더 뭔가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와 함께, 어차피 어긋날 운명이었던 거야 라는 쓸쓸함... 가끔 학교를 가보게 되면 경영대 앞으로 지나가던 그녀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래도 그해 봄날에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수많은 학생들 속에서 그녀 한 명 만은 환한 빛을 내며 서 있었던 그 찬란한 순간.. 이제와 돌이켜봐도 아름다운 한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