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이야기
전쟁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는 그때, 히로키는 3년 만에 다시 고향 아오모리로 돌아왔다. 3년 전, 사유리가 사라진 뒤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도쿄로 도망치다시피 한 그가 돌아온 것이다.
자 이쯤 해서 히로키의 도쿄행이 비겁한 현실도피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일단 도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히로키는 사유리와의 약속을 감당하지 못했다.
히로키는 사유리와의 약속, 벨라실러가 완성되면 함께 ‘탑을 향해 가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 약속의 무게와 감정적 상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 여름날 사유리가 갑자기 사라지자 그는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기억과 감정을 피해 도쿄로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둘째 탑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온 낭만적인 대상이었지만 결국 탑과 사유리는 한 몸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탑을 향한 동경은 사유리를 향한 연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유리가 사라지자 사춘기 소년의 모든 것이 무너졌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쿄에서 새로운 일상과 거리감을 만들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후퇴를 보인다.
셋째 이 작품 전반에 담겨 있는 침잠, 상실, 회피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정서처럼, 히로키의 행동도 ‘상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정서와 맞닿아 있다. 즉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존재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물리적 거리’를 통해 감정을 억누르려는 회피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첫째 단순한 비겁한 도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유리가 어디 갔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히로키는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 해결 대신 일단 살아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장의 서사로 볼 때: 상처를 견디기 위한 ‘잠정적 후퇴’이다.
도쿄에서 방황하던 시기는 히로키가 감정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겪는 통과의례에 가깝고 이후 그는 결국 사유리와 약속이 남긴 의미를 다시 직시하고 행동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이는 도피라기보다는 성장 과정에서의 일시적 퇴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셋째 이야기의 구조상 ‘상실 → 거리 → 재회’라는 장치이다.
신카이 감독은 인물들이 서로 멀어졌다가 다시 연결되는 구조를 자주 사용한다. 이 거리는 심리적 거리이기도 하기에, 히로키의 도쿄행은 서사적으로 필요한 ‘간극’을 만드는 장치였다.
자, 어떤 주장에 더 동감하는가?
히로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이, 오카베는 공장의 직원들이자 월터 해방전선의 대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들은 대로 이제 탑은 분명히 말해 병기다. 요 25년 동안 일상의 풍화와 동화한 저 탑은 모든 것의 상징이었지
국가, 전쟁, 민족, 혹은 절망과 희망.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은 세대에 따라 달라. 하지만 어느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것. 변치 않은 상징으로서 여겨진다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그리 여기는 한 세상은 변치 않겠지"
이 오카베의 말은 탑에 대한 오카베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탑은 병기이다는 점, 그리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탑이 가지는 의미는 세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 어느 누군의 손에도 닿지 않는 것은 탑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대로 히로키와 타쿠야, 사유리에게 저 탑은 동경과 약속의 대상이다.
이제 탑에 대해 의미를 다시 새겨볼 때가 되었다.
자. 탑은 분단된 세계의 경계였다. 탑은 홋카이도가 분단된 일본에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능성의 세계(평행우주)가 맞닿아 있는 ‘경계선이었다. 늘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분단된 일본과 냉전의 긴장, 넘을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을 응축한 상징이다. 이것이 오카베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시선이다.
하지만 소년 소녀들에게는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히로키와 타쿠야에게 탑은 어린 시절 비행기를 만들어 꼭 가보고 싶은 ‘꿈의 목적지’였다. 아직 아무것도 잃기 전, 세계가 무한히 열려 있다고 믿던 시절의 순수와 동경, 열망, 그래서 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가 어른이 되기 전의 약속” 그 자체였다. 이런 의미로 보면 히로키와 타쿠야, 사유리에게 한 약속이 단순하게 잊어버려도 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탑은 선택하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탑이 연결하는 평행세계들은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질문의 집합체이다. 히로키가 도쿄로 가지 않았다면, 사유리가 그날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탑은 지나간 선택과 포기된 가능성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탑은 결국 성장하는 과정에서 넘어서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결말부에서 히로키가 탑을 향해 날아가는 것은 탑을 파괴하거나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 과거에 묶여 있던 자신과 사유리를 현재로 데려오기 위한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결말에서의 탑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도 도피처도 아닌 어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과거’이자 ‘통과해야 할 성장의 관문이다.
"3일 후 이른 아침. 유니온에 대한 미국 정부의 선전포고가 있을 것이다. 그 혼란을 틈 타 탑을 폭파한다.
무인 프레데터로 에조를 침공, 공격은 PL외곽탄을 실은 시커 미사일을 쓴다. 월터 해방 전선은 같은 날 해산.
이 공장도 오늘부로 문을 닫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히로키는 타쿠야에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히로키를 기다리는 타쿠야의 눈에 보이는 기차에 실린 전차들이 이동하는 모습, 전쟁직전의 긴박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히로키 - 안녕, 3년 만이구나 타쿠야.
도쿄가 계엄체제로 들어간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타쿠야가 묻는다.
타쿠야- 언제 왔어?
히로키- 그저께. 지금은 폐역에 머물고 있어
타쿠야 - 그 폐역에?
히로키 - 근데 타쿠야 팔은 왜 그래?
타쿠야 - 그냥..
히로키 - 무슨 대답이 그래?
타쿠야-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라멘집에서 나눈 이 짧은 대화는 두 사람에게 있어 3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타쿠야는 어느새 자신들의 소중한 공간이었던 폐역의 존재를 잊고 있었고, 히로키는 타쿠야의 지난 3년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타쿠야가 월터 해방전선에서 일하는 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쿠야 또한 히로키가 도쿄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공장이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히로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타쿠야
그리고 고양이 쵸비가 다가온다.
히로키 -쵸비 잘 있었냐? 오랜만이다. 너
고양이 쵸비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설명한 바 있기에 이번에는 패스
폐역의 플랫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대화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겪어온 시간들, 그리고 현실에 대해 타쿠야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타쿠야- 벨라실러를 날리겠다고? 사와타리를 태우고 말이야?
히로키 -응. 조립은 하루면 끝나. 나머진.. 제어 소프트웨어가 문제인데..
타쿠야 - 잠깐 너 내 얘길 듣기나 한 거냐? 사와타리는 계속 잠들어 있는 데다 탑은.....
히로키 - 탑은 테러조직의 표적인 된다. 맞지?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그랬지? 늘 생각했었어.
탑까지 같이 날면 사와타리는 깨어날 거야
이 대화를 들으면 타쿠야가 했던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유리는 현재 계속 수면 상태이고 사유리가 깨어나면 탑이 활성화되어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히로키에게 말해주었지만 히로키는 사유리를 태우고 탑으로 가면 사유리가 깨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옮겨간 것은 사유리의 바이올린... 저 바이올린은 3년 전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기억 속에 사유리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쿠야- 너... 겨울 그 따윌 위해서 돌아온 거냐?
히로키 - 그.. 그 땨위라니... 우리가 약속했잖아
타쿠야 또한 사유리의 바이올린에 손을 얹으며 착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히로키 - 사와티리 꿈을 꿔. 매번 똑같아. 사와타리는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어. 하지만 그 애 약속만은 기억하고 있었어..
히로키 - 이번에야 말로 탑에 데려가 주겠다고... 그게 단순한 꿈이라곤 생각 못하겠어.
타쿠야- 이제야 슬그머니 나타나서 뭔 소릴 하나 했더니 꿈 애기냐?. 널 보면 짜증이 나. 난 애들 장난에 놀아날 만큼 한가하지 않아. 항상 이딴 거에 집착하니까 그런 거야. 내가 잊게 해 주지
히로키 - 무슨 짓이야. 그만둬
그리고 총성이 울린다.
자. 이 장면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이미 사유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타쿠야에게 3년 만에 돌아온 히로키가 사유리를 태우고 탑으로 간다는 것을 설명하자, 한심 하다는 투로 마음에 없는 말을 쏟아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두 사람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보완하는 영혼의 단짝이었다. 탑에 대한 동경을 어린 시절부터 함께 공유해 왔고 그랬기에 탑으로 날아갈 벨라실러도 그렇게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3년이 지난 지금은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타쿠야의 입장에서 보면 사유리의 실종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상실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서 멀리 떠나버린 히로키에 대한 원망 또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 이 작품 속을 관통하는 2개의 세계에 대립을 말하고 있다. 이미 타쿠야는 더 현실적으로 변했다. 아니 처음에 말한 대로 타쿠야는 점차 어른의 시각으로 탑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사유리와의 약속은 그다지 큰 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히로키는 그 어린 날의 순수했던 약속을, 3년 내내 사유리에 대한 꿈을 계속 꿔왔기에 사유리와 했던 그 약속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히로키와 타쿠야의 대립은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니라, 같은 꿈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다른 어른이 되는 방식’을 택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표면적으로 타쿠야는 이제 과학자의 입장에서 탑은 연구하고 통제하고 위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고 히로키는 탑을 사유리와의 약속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겉으로 보면 이성 대 감정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본질적인 것은 현실(어른)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 대 끝까지 순수함을 붙잡고 있는 사람의 대립이다. 다시 말해 타쿠야는 이미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 인물로서 사유리를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어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계의 붕괴를 막는 것인지, 잃어버린 약속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히로키는 여전히 과거에 멈춰 있는 인물로서 사유리는 현실이 아니라 그를 현재에 묶어 둔 유일한 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탑을 없애야 한다는 판단조차 결국 사유리를 현실로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대립은 결국 분열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한 몸 같았던 두 사람이 대립하는 이 장면들이 강렬한 이유는 타쿠야는 상처를 덮고 사회 혹은 현실에 적응하려 하는 것이고 히로키는 상처를 끌어안고 끝까지 그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립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는 꿈을 접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성장일까, 아니면 꿈과 상처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성장일까?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타쿠야를 악한 존재로 만들지도 않고 히로키도 미화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히로키와 타쿠야의 대립은 탑을 둘러싼 갈등이 아니라,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