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막부가 황혼에 이르렀음을
에도성을 둘러싼 36개의 미츠케에 대한 글을 계속 써오고 있다. 바로 앞편에서 사쿠라다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늘의 주제는 그 사쿠라다문 앞에서 벌어진 사쿠라다문밖의 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대해 간단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 (桜田門外の変)은 1860년 3월 24일 에도 성 사쿠라다 문 밖에서 미토 번의 낭인 무사들과, 사츠마 번을 탈번하였던 낭인 무사 한 명이 히코네 번에서 속하는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을 습격하여 암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 첫 번째가 미일 화친 조약이다.
1. 미일 화친 조약
페리의 내항으로 미국과 일본이 1854년 3월 31일에 체결한 미일 화친 조약으로 굳게 닫혀 있던 일본의 문이 200여 년 만에 열렸다.
하지만 당시 서양 국가들과 맺은 조약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조약도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가나가와 조약(Convention of Kanagawa/Kanagawa Treaty, 일본어 日米和親条約/神奈川条約)이라고 불리는데 이 조약은 몇몇 구역을 개항하는 것을 포함하였고 지금의 시모다와 하코다테는 이때 개항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무역을 목적으로 개항한 이들 항구는 미국 선박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페리의 함대에 굴복한 일본이 맺은 조약이었기에 불평등조약일 수밖에 없었다.
(시모다항에 있는 페리의 흉상)
(당시 조약 교섭에 나선 페리제독과 미국인들을 묘사한 그림)
(당시 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미국인들이 머물렀다고 하는 료젠지)
(조약 체결지, 현재의 요코하마항 개항광장)
(당시 조약의 영문 원본, 일본어 원본은 에도막부 말기의 에도성 화재 때 불타버렸다. )
이 조약을 체결한 미국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당시 미국은 청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위해 태평양 항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당시 증기선에는 태평양을 횡단할 충분한 연료를 실을 수 없었기에 결국 보급을 위한 기항지로서 일본의 항구가 필요했다. 또한 물, 음식도 보급이 필요하며, 특히, 냉장고가 없던 당시에 각기병이나 괴혈병의 예방과 승무원이 만족할 수 있는 맛과 양의 식사를 위해서는 생야채나 육류의 섭취가 필요했다. 그리고 북태평양에서 고래 기름을 목적으로 한 포경을 하는 데 있어서 서로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표착한 자국 포경 선원의 인도도 제대로 되지 않아 불편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페리의 내항 목적에는 통상 교섭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인신 보호와 물자 공급을 주목적으로 한 화친 조약이 체결되게 되었다. 시모다와 하코다테가 개항장에 선정된 것도 보급의 편의를 중시한 것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조약체결로 인해 일본 안에서 굴욕적인 협상이라고 주장하는 세력과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더 큰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이다.
2.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
1858년 에도 막부의 다이로(쇼군체제하에서 최고위급 관리)인 이이 나오스케가 굴욕적인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게 되자 그야말로 일본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우선 일본에게 관세자주권이 없는 반면에, 미국에게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
두 번째로 미국에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설사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렀어도 일본의 법률로 심판할 수 없고 미국의 영사가 판결한다. 물론 일본인이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미국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세 번째로 일본이 미국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시 해당국에 미국과의 조약보다 더 좋은 조건을 체결했을 경우 미국에게도 그 혜택과 동등한 조약이 자동적으로 체결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혜국대우를 해준다는 말이다. 단 쌍방 모두 최혜국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미국만 받는 조약이었다. 즉 반대로 미국이 영국, 프랑스등 다른 나라에게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을 시 일본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참고로 일본이 조선과 강제로 맺은 여러 불평등조약들을 비교하면, 꼭 맞다 볼 순 없지만 미일화친조약이 우리나라의 강화도 조약과 같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 미일수호통상조약이 무역규칙 포지션에 있다. 물론 이 두 조약을 통해 일본이 얻어간 이권을 따지면 저 위 두 조약에서 미국이 얻은 이권보다 이쪽이 더 많다.. 이 불평등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은 1899년 미일통상항해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폐기된다.
같은 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도 이와 동등한 수준의 불평등한 조약들이 맺어지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 막부의 권위는 점차 실추되었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츠마나 조슈 같은 토막(討幕)파 번들이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여 에도 막부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소위 막말(막부 말기)의 시작이다.
사츠마와 조슈 등의 유항들은 이 조약 체결 이후 에도막부의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존왕양이(왕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외국 오랑캐를 물리치자) 론을 내세우며 막부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유항들이 이렇게 반기를 든 것은 앞서 설명했던 대로 에도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었거나 나중에 귀순했다는 이유로 인해 에도에서 먼 곳으로 보내지게 된 도자마 다이묘로서의 차별이 대대로 원한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에 병약한 쇼군의 후계문제로 두 세력이 맞부딪쳤다.
3. 당시 병약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 (德川家定 1824-1858, 재위: 1853-1858)
에도 막부의 13대 쇼군으로 1824년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세 형이 있었지만 모두 죽어버렸고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탓에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뇌성마비가 아니었나라는 후대의 추측도 있다.
이런 탓인지 아버지 이에요시는 이에사다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정하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베 마사히로 등의 가신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탓에 결국 이에사다를 후계자로 정하게 된다. 1853년 미국 제독 페리가 이끄는 미국함대의 개항요구(쿠로후네 사건))이 있던 차에 이에요시가 사망하고 이에사다가 쇼군직을 이어받았다.
쇼군이 교체되는 혼란기였던 탓인지 막부에서는 페리 제독에게 1년 후에 다시 보자라고 하고 일단 돌려보냈다. 그러나 1년 뒤에 페리 제독이 다시 7척의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결국 미일 화친조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아베 마사히로가 주관했으며 이에사다는 쇼군 취임 이후로 안 좋던 건강이 더 악화되어서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1857년에 아베 마사히로가 사망한 뒤로는 홋다 마사요시가 정치를 주도했다. 그래도 쇼군이라고 1857년 10월 21일에 미국공사 타운젠트 해리스를 접견하기도 했다.
병약했던 탓에 정실부인을 세명이나 맞았지만 모두 요절하고 자식을 남기지 못했으며 가장 총애했던 아츠히메는 요절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다. 결국 차기 쇼군직은 도쿠가와 가문 사람 중에 한 명으로 정해져야 했지만 이를 두고서 가신들간에 논쟁이 일었다. 설명했듯이 에도막부의 가신 그룹에서는 기슈의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이에 모치)를 민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밀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에사다는 1858년 6월 25일에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망 전날에는 요시노부를 지지한 하토츠바시파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858년 7월 6일 사망했다. 이에사다의 지정에 의해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이름을 바꾸고 14대 쇼군이 되었다.
사실 미국이 함대를 이끌고 개항협박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로 갈 조짐이 일던 시점이라 매우 중대한 시점이었음에도 병약한 이에사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몸이 좀 움직일만한 날이면 카스텔라 같은 과자를 만들어 가신들에게 주곤 했다고 한다. 이런 탓에 에치젠의 영주였던 마츠다이라 요시나가 같은 사람은 고구마 쇼군이라고 부르며 평범한 사람 중에서도 최하등이라고 대놓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부의 관료였던 아사히나 마사히로는 메이지 시대에 "이에사다를 회고하면서 에치젠이나 사츠마(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비교하면 그렇지만 300명 다이묘 중에 이에사다보다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뇌성마비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는데 그 근거는 이에사다를 접견했던 미국공사 타운젠트 해리스의 회고에 근거했다. 해리스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먼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로 바닥을 치곤 했는데 이는 뇌성마비의 전형적인 증세였다는 것. 이것이 일종의 신호로 해리스에게 답변할 말을 지정받기 위한 사인이었다는 주장도 있긴 하나 신호를 줄 것 같으면 회담 도중에 이마를 만진다든지 등등 별 내색 안 하고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한데, 굳이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뇌성마비 주장이 일리가 있다.
죽음에 관해서 요시노부를 지지한 하토츠바시파에 대한 처분을 발표하겠다고 한 다음날에 사망한 점. 그리고 인세이의 대옥이라 하여 이이 나오스케 주도 하의 대규모 숙청도 있었기에 당시 하토츠바시파 혹은 존왕양이파가 쇼군의 주치의를 매수해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워낙 병약했던 쇼군인 탓에 병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 주된 결론이다.
4. 이이 나오스케 (井伊直弼 1815-1860)
당시 치열한 대립의 정세 속에서 에도막부의 대표 격인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허락도 받지 않고 미일 수호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쇼군의 후계자로 요시토미를 결정해 버리자, 천황 측과 조이(양이) 파가 격분했다. 이때 일본의 실제 권력자는 쇼군이었지만 형식적으로는 천황의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막부의 세력이 강성 했을 때에는 이런 형식적인 절차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설령 천황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막부의 세력이 약해진 그 시기에는 이이 나오스케의 독단적인 행동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존왕양이파들은 노골적으로 막부에 도전해서 이이 나오스케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이 나오스케는 강한 분노를 드러나며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숙청을 벌였으니 그것이 바로 안세이 대옥이라는 사건이다.
그러면 이이 나오스케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1815년, 히코네번주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들도 많은 데다가 어머니가 첩실인 탓에 그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갈 기회는 없었다. 노베오카번에서 양자로 들이려고 생각했던 적을 빼면 다른 가문에서 양자이야기도 없었을 정도. 부친의 사후 산노마루 오스에쵸의 저택으로 옮겨가 30대 초반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은둔자처럼 지내면서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했는데 다도라든지 와카, 북 치기, 참선 같은 것을 배웠으며 그 외에도 창술 등을 익히기도 했다.
그런데 1846년, 14대 히코네번주이던 형 이이 나오아키의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게 되자 형의 양자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850년 이이 나오아키가 사망하자 15대 히코네번주에 올랐다. 히코네번에서 번정 개혁으로 명군소리를 들었고 중앙정계에서는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그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베 마사히로가 미국의 개항요구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본래 쇄국론자였음에도 임기응변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항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만 이이 나오스케가 적극적인 개항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방편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즉 이이 나오스케의 반대파들이 양이론자들이라 개항론자로 변신했다는 게 이들의 평가다.
어쨌든 당시 쇼군이던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해서 국정을 이끌 능력이 없었고 막부의 정치는 로주 아베 마사히로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본래의 막부체제와는 달리 아베 마사히로는 세력이 큰 다이묘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에 따라 이이 나오스케는 외교자문역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베 마사히로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양이론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특히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양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이이 나오스케는 갈등이 빚어졌다. 미국과의 통상조약 비준을 놓고 양측은 대립했으며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아베 마사히로에게 강력하게 어필해 개항론자인 마츠다이라 노리야스와 마츠다이라 타다가타를 로주에서 해임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해 개항론자이자 자신의 친구인 홋타 마사요시를 수석로쥬로 밀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1857년, 아베 마사히로가 사망하자 홋타 마사요시는 마츠다이라 타다가타를 다시 로주로 불러올렸다. 여기에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던 히토츠바시파와 대립해 기이한의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옹립하려 했다.
1858년 4월 23일, 난키파와 홋타 마사요시, 마츠다이라 타다가타 등의 정치공작에 의해 이이 나오스케는 다이로에 취임했다. 그리고 6월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14대 쇼군에 취임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현안문제이던 미국과의 통상조약은 천황의 칙허를 받지 않고 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행동에 코우메이 천황은 크게 분노했고 히토츠바시파도 누가 당신 마음대로 조약을 체결했냐며 이이 나오스케에게 따졌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를 홋타 마사요시와 마츠다이라 타다가타의 책임으로 돌려 그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의 후임으로 오타 스케모토, 카나베 아키가츠, 마츠다이라 노리야스를 임명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양이론자들을 막부에서 축출시켰는데 자신과 대립하던 미토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마츠다이라 슌가쿠에게 칩거형을 내렸고 여러 관리들을 파면시켰다. 그러나 1859년, 오타 스케모토와 카나베 아키가츠가 해임되면서 점점 고립되는 형국에 몰리게 된다.
이런 조치에 미토번의 가신들은 분노하여 코우메이 천황(코우메이는 당시 양이파였고, 그 때문에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에게 하소연했고 이에 코우메이 천황은 무오의 비밀칙서를 내려 전례 없는 파란을 일으켰다. 천황이 직접 다이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은 이전에는 없었던 탓에 이이 나오스케는 이 사태에 크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히토츠바시파와 존왕양이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바로 안세이의 대옥사이다.
결국 미토번의 가신들은 이이 나오스케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해 1860년 3월 24일 사쿠라다문밖에서 막부로 출근하던 이이 나오스케의 가마행렬을 기습해 그를 암살한다.(사쿠라다 문밖의 변) 그의 암살 이후 히코네번은 안세이의 대옥사등의 실정을 이유로 감봉조치를 받으면서 히코네번은 막부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리는데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결정해 일본의 역사를 바꾼 뛰어난 정치가라는 평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잔인한 권력자라는 평이 엇갈리고 있다. 또한 과연 이이 나오스케가 진정한 개항론자였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방편으로 개항론을 선택했고 막부의 실권을 회복한 뒤에는 다시 양이를 실행하려고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사후 자택의 서재에서 다량의 세계지도와 서양서적이 발견된 것을 들어서 이이 나오스케가 부국강병이란 입장에서 서양과의 통상교류를 선택했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히코네번에서는 번정 개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만큼 능력만큼은 있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중앙의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하고 대립갈등을 빚었던 것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는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번주의 후계자로 지명되기 전까진 여러 가지 취미생활로 풍류를 즐겼고 무예에도 수준급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 검술, 거합도, 창술, 포술, 유도등에 능했다고 하며 거합도는 신심류를 배워서 자신만의 새로운 유파인 신심 신류를 열었다고 한다. 사쿠라다문밖의 변에서도 미토번 가신들이 쏜 총에 맞지만 않았다면 거합도로 위기를 벗어났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나기 며칠 전에 미토번 가신들이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음에도 경비나 호위를 강화하지 않는 이상한 면모를 보였는데 대체적으로는 경비나 호위 강화가 반대파에게 실정을 인정한 꼴이라는 것 때문에 일상적인 경비 수준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5. 안세이 대옥
안세이 대옥(일본어 安政の大獄)은 에도 막부의 이이 나오스케가 1858년에 자신의 반대파를 체포하기 시작해서 다음 해까지 100여 명의 존왕양이파 및 히토쓰바시파 인사를 대량 숙청한 사건으로, 무오의 대옥( 戊午の大獄)이라고도 불린다.
에도막부의 가로인 이이 나오스케와 로즈 마나베 아키카즈 등은 덴노( 일왕, 천황)의 칙허를 얻지 않은 채로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고, 에도막부의 제14대 쇼군의 후계자 분쟁에서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세우는데 일조한다. 안세이 대옥은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존왕양이를 주장한 이들과 히토츠바시파를 처벌했고 이때, 연루된 인원들은 100명 이상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명령을 내려 모두 처벌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이이 나오스케가 모두 명령했다.(이에 사다가 명령을 내렸던 것은 이에사다 사망 직전인 7월 5일, 도쿠가와 요시카츠( 徳川慶勝)와 마츠다이라 요시나가( 松平慶永),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요시아츠( 徳川慶篤)와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一橋慶喜)에 대해 은거, 근신명령(요시아츠만은 등성금지와 근신)만으로, 대옥이 시작되는 초기의 잠깐이다.) 이 안세이 대옥은 에도 막부가 마지막으로 위세를 펼친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시대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 편은 문제의 3월 24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