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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엘 Sep 09. 2023

고택에서의 하룻밤



영월과 태백으로 짧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제일 뜨거웠던 휴가철 피크인 8월 초에. 그런데 숙소는 영월도 아니고 태백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봉화의 한 고택으로 정했다. 처음부터 확 끌리는 숙소는 아니었지만 봉화에서 하는 은어축제에 참가하고 여기저기 다닐 계획이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 늘 그렇듯이 돌발 상황을 만나는 일상의 순간들처럼 봉화의 은어축제는 가지 못했다. 장마로 예상보다 비가 많이 와서 취소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리 알았기에 갔다가 헛수고로 터덜터덜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쿨하게 넘겼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물고기를 직접 잡아본다는 호기심에 잔뜩 부풀어 있던 마음이 서운할까 눈치를 보니 아이들도 새로운 관광지의 설렘과 기대 속에 묻힌 듯했다.


아침 일찍부터 부랴부랴 집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누볐다. 1박! 2일!을 외치며. 마치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는 요원들 같이.

온몸이 땀에 젖고 녹아내릴듯한 뜨거운 기온에 녹초가 되어 피곤이 몰려왔을 때에야 숙소에 입장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어디 관광지에서나 두리번거렸던 기와집이 눈앞에 있었다.


돌담은 어찌나 정갈하게 쌓았는지 위에 기왓장을 얹혀 담벼락이 완성되었고 마당에선 이름 모를 꽃과 나무와 잡초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고택답게 오래된 흔적이 묻어나긴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어설픈 게 없이 정성으로 이 터와 집을 가꾸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자연과 조화로웠다.

뉘엿뉘엿 지고 있는 석양에 비친 기와집이 반짝거렸다.


고즈넉하다


'고즈넉하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다.
손님이 쓰는 집 뒤로 가운데 중정을 끼고 있는 안채에서 기다렸다는 듯 주인인 사장님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황혼을 바라보는 주인장 부부는 집처럼 고상하고 기품이 있었다.


얼음을 동동 띄운 허브차를 웰컴티로 정성스레 가지고 나오시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셨다. 화장실은 마당을 지나 맞은편에 있는데  밤에 화장실 가기가 불편하면 요강을 주신단다. 우리는 손사례를 치며 괜찮다고 웃었지만 진짜 밤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실도 따로 옆에 있고 이브자리가 있는 방엔 바닥이 배길까 봐 요를 세장씩 깔아 놓았다고 하셨다. 들어가 만져보니 그렇게 얇지도 않았는데  장이 깔려 있어 두툼하고 푹신하니 매트리스가 따로 없었다.


사장님 부부는 미소를 띤 채 다음날 숙소에서 나갈 때까지 자상하게 친절을 베푸셨다. 마치 시골의 부모님이 게시는 고향집을 방문한 것처럼 편안했다. 물론 신발 신고 벗고, 왔다리 갔다리 아이들도 그렇고 왜 불편하지 않았겠냐마는 푸근해진 마음에 견줄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강행군으로 피곤함의 여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낯선 숙소에서의 첫날은 잠을 뒤척이던 내가 완전 꿀잠을 잤다. 너무 쾌적하고 아늑했다. 숙면을 취하니 아침이 너무 개운하고 상쾌해져 기분이 좋았다. 

처마  풍경 소리가 바람이 살랑거림을 말해 주었다. 둘째 꼬맹이는 마루 한쪽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풍경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한참을 앉아있었다.


사실은 별 기대 없이 갔던 고택이었는데 달리 보였다. 어쩌면 불편하기만 할 거라는 알량한 선입견이 하룻밤을  나서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파트에 살면서는 절대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들을 수 없는 고즈넉함의 결정체를 선사해 주었다. 


  Photo by 수니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이다. 먼발치에서 두루뭉술하게 봤을 때는 몰랐는데, 하룻밤동안 은 이 집은 차근차근 자세히 보니 예쁘고 근사하기까지 했다. 하루 동안의 짧은 시간이 아쉬워 며칠 머물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곳에 두고 나왔다. 이렇게 사진으로 오랫동안 추억하다가 꼭 다시 한번 방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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