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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수 Jun 23. 2015

이별은 영원히 함축된다

비밀스런 애틋함으로

그 날 밤 그들은 그들이 만나온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눈동자를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과 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고, 다리 위로는 서로 뒤엉킨 수십 개의 단어들이 은밀하게 오갔다. 무구한 눈빛들이 서로에게 건네어졌다. 물리적인 육성은 한 마디도 교환되지 않았지만 현실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둘만의 음성이 분명히 교차되고 있다는 것을, 둘 사이의 버젓한 침묵이 증명하고 있었다.


남자는 끓는 마음을 순수한 말로 제련하지 못한 채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여자는 닫힌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남자는 엄지와 검지로 턱끝을 매만졌다. 입술이 몇 번 열렸다가 닫혔다. 해석될 수 없는 투박한 신음만이 남자의 입에서 짧게 새어 나왔다. 여자는 남자의 입에서 새어 나온 공기를 눈으로 좇았다. 모음만 희미하게 남아버린 어떤 문장의 원형을 추론하듯 여자의 눈빛이 소리 없이 거칠게 흔들렸다. 적막한 미풍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두 사람의 눈빛이 연주하는 정적의 음악이 클래식처럼 얼마간 감상되었다. 남자는 고개를 떨궜다. 푸른 빛이 섞인 그의 파마 머리는 먹구름처럼 곧 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먹구름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빗방울 같은 것이 남자의 허벅지 위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코 먹은 소리가 났다. 여자의 손이 순간 남자를 향해 들어 올려졌다가, 곧장 여자의 무릎 위로 철회되었다. 먹구름이 울컥거릴 때마다 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여자는 떨리는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연극의 종료와 함께 무대 위에 속절없이 내려지는 두꺼운 막처럼.


그 날 밤 그들이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대화의 내용이 성실히 기억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의 종착에는 명쾌한 해답과 해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버젓한 침묵과 정적의 음악만이 그 날 밤 그들의 결론을 함축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자문과 자답이었고, 그 문제에 관한 정확한 해설지는 그들이 사는 차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향한 막연하고 무조건적인 애틋함을 일생의 비밀처럼 간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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