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유수 Jun 24. 2015

상공에서

우리는 잠깐이지만 시선을 나누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솟구치고 있었다. 눈앞이 침침했다. 눈을 비비려고 했으나 팔을 굽힐 수 없었다. 응당 바닥을 딛고 서 있어야 할 내 몸은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았다. 허공이었다. 순간 발을 허우적거렸다. 침침했던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내 배 아래로 보이는 녹음이 짙은 산간, 연한 상아색과 회색이 뒤섞인 시가지를 분간할 수 있었다. 위성 지도를 보는 듯했다. 나는 하늘에 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목 뒤로 내리쬐는 태양광의 열기가 묵직했다.


낯선 상황이었지만 금세 적응되었다. 내 몸이 날고 있음을 자각했고 날갯짓을 하듯 양팔을 길게 뻗었다. 눈을 감고 한 번 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연스럽게 목이 내밀어졌고, 목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몸과 일직선을 이루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소박한 교향곡이 되어 내 주위를 휘감았다. 문득 낮게 날아보고 싶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아래로 꺾어 몸을 휘게 했다. 팔을 뒤로 젖히고 차렷 자세를 하듯 허리에 바짝 붙였다. 나는 중력에 힘입어 강하게 활강했다.


어느 아파트 상공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내 시선은 105동이라고 적힌 아파트의 옥상에 고정되었다. 쨍한 녹색 페인트로 뒤덮인 옥상의 난간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아이가 서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였다. 푸른색 치마의 주름이 하늘거렸다. 귀를 겨우 덮을 정도의 짧고 검은 단발이 주춤거리며 휘날렸다.


아이는 자신의 위를 맴돌며 날고 있는 나의 출현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아이는 치마 주머니에서 하얀 분필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 들더니 입에 물었다. 담배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 궁둥이에 불을 붙였다. 아이의 볼이 음푹 파이더니 담배 끄트머리가 별처럼 반짝였다. 아이의 귀고리가 함께 반짝였다. 나는 옥상 위를 계속 맴돌았다. 아이는 이른 아침 떡집의 연기처럼 입과 코에서 뿌연 안개를 뿜었다. 눈은 여전히 가늘게 뜨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발견한 아이는 입술을 오므려 한 번 더 길게 담배를 빨았다. 나는 담뱃불처럼 아이에게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시선을 나누었다. 아이는 나의 눈동자를 무심히 꿰뚫었다. 타들어가는 담뱃재가 꼬리를 잘라 바닥으로 던졌을 때, 아이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심히 안타까웠다. 내 안의 주춧돌 하나를 빼앗긴 것 같았다. 고작 아이의 시선을 잃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웅대한 선박의 뱃고동 소리가 내 마음을 옥죄어 드는 것 같았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고개를 돌리게 하여 아이의 어깨에 날아들어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아이의 이름이 떠오르질 않았다. 시야가 휘청거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땀에 흠뻑 젖은 앞머리가 꼬불거리며 나의 시야를 가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렴풋한 활강의 느낌을 더듬었다. 손바닥의 축축함을 느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사랑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