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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수 Jul 15. 2015

여행의 공평함

작년 11월의 제주

제주의 하늘은 항상 낮게 펼쳐져 있었다. 제주의 마을은 풍경을 가리고 서 있지 않았다. 어딜 가든 시선의 끝에는 지평선이 놓여 있었고, 하늘과 땅과 바다를 하나의 풍경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살짝 높은 언덕에만 올라가도 시선을 한참이나 멀리 던질 수 있었다. 시야가 탁 트이니 마음이 청명했다. 다녀온 곳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세 군데가 있다. 신천바다목장과 아끈다랑쉬오름, 그리고 아예 그곳에 살아보고 싶을 만큼 좋았던 세화리다.


5박의 여행에서 4박을 제주도 북동쪽 세화리에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날씨는 거의 흐렸다. 구름은 하루도 게으른 날 없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빼꼼 나왔다가 숨었다가를 반복했다. 멈춰 서서 구름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으면 해가 언제 고개를 내밀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구름에는 틈새가 있다. 해는 구름의 틈새로 파고들어 빛을 쐈다. 그러면 구름 밑으로 햇살이 쏘아지는 길이 보였다. 쏘아진 햇살은 넘실거리는 바다를 겨냥하며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세화리 앞바다 위를 온통 덮고 있던 햇살의 잔해가 잊히질 않는다. 해가 질 때쯤 해변가에 죽 늘어선 가로등 불빛들이 거친 숨을 내쉬는 바다 위에서 수채화처럼 일렁이던 광경 또한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姑 김영갑 선생은 20년 동안 제주의 구름을 지켜 봤다. 그는 구름은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고 말했다. 변화무쌍한 제주의 구름처럼 자기 마음이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룩한 배낭을 메고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일정한 박자로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 끈의 감각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발걸음에 맞춰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니는 여행이 좋다. 멀면 버스나 기차를 타면 된다. 그 여정 속에는 낯선 사람의 삶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까지 담겨 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머물렀던 곳을 떠나오는 시점에 찾아드는 어떤 느낌이 있다. 꼼꼼하게 배낭을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언가를 두고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대체 뭘 두고 온 걸까? 분명히 잘 챙긴 것 같은데 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 기묘한 상실감. 집에 돌아와 배낭을 풀어 봐도 두고 온 물건이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무언가를 두고 왔다. 확신에 찬 듯한 느낌이 그렇게 말해준다. 나는 여행지에 무엇을 두고 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떤 감정이 아닐까.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이 있고 얻어 오는 것이 있으니 나도 여행지에 무언가를 내 주고 오는 거겠지. 내어준 한 켠이 조금 허전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오히려 공평한 것 같아서, 여행은 언제나 이렇듯 다음 여행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 같아서 떠나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


동네로 돌아오니 눈 앞의 풍경이 몇 시간 전과 너무 달라서 어색했다. 겨우 5일을 머물렀을 뿐인데 현실감을 잃었다.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여행을 꿈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이따금 되새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camera : yashica 35me

film : kodak colorplus 200, agfa vista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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