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리기

러닝크루 없는 사람들의 모임

홧김에 시작한 모임이 500명 규모가 됐다

by 정진영

"이러다 500명도 넘을 것 같은데 활동 안 하는 회원은 정리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래도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관리가 어렵긴 하네요."


이런 대화가 오간 곳은 한 모바일 메신저 대화방.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대화방에 사람이 늘자 계속 회원수를 늘릴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한 운영진 사이의 대화였다.


그리고 내가 이곳의 방장이다.


'러닝크루 없는 사람들의 모임'은 크루가 있든 없든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와서 대화하고 러닝 기록을 인증할 수 있는 방이다. 2019년에 만들어서 벌써 5년째 운영하고 있다.


사실 처음엔 반쯤 장난이었다. 그맘때쯤 러닝을 시작한 나는 주변에서 함께 뛸 사람들을 찾다 '러닝 크루'란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 러닝 크루란 것이 가입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내 러닝 페이스는 7분 30초 정도였는데, 크루에 가입하려면 최소한 7분은 돼야 했다.


뭔가 울컥했다. '에잇, 치사해서 가입 안 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못내 아쉬워서 오픈 대화방을 만들었다. 그게 '러닝크루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running.jpg 느려도 응원 받는 러없사(런없)

당시 나는 짝꿍과 러닝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채널에 '러닝크루 가입 안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러닝 좋아하는 사람 모이라더니 느리면 끼워주지도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린 이 영상이 온라인에서 나름대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영상을 보고 한 명, 두 명씩 채팅방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명 남짓으로 소소하게 시작했던 방이 금방 30명, 60명이 되고 100명까지 넘겼다.


회원수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관심사가 모인다는 뜻도 된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재미있는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러없사 멤버들은 함께 자체적인 언택트 기부런을 진행했고, 지자체와 협업한 영상을 만들기도 했으며 품앗이한 기념품을 모은 자체 대회도 열었다.

기부런.jpg 러없사에선 여러 번 기부런도 진행했다

이제는 500명에 육박하는 회원들. 이 안에는 전문적으로 러닝을 하는 사람도, 섭3(풀마라톤을 3시간 안애 주파하는 것)를 달성한 이들도, 아직 풀마라톤을 뛰지 못 한 이들이나 아파서 러닝을 잠시 쉬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한편으론 러닝 양말을 만들어 파는 사람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도, 나처럼 러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기록도 페이스도 가지각색이다.


운동을 하라고, 나가서 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다. 그게 강퇴의 이유도 아니다. 그런데도 회원들은 저마다 마음을 모아 각자 월별 활동량을 정해 뛰기도 하고 체중조절 등의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우리 방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이 방의 취지가 '느림보 러너'들을 위한 것이었던 것만큼 페이스를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리 느리게 뛰어도, 하물며 1km밖에 뛰지 못 하더라도 러없사에선 모두를 얕잡아보지 않고 격려한다. 물론 우리방 사람들이 잘 뛰어서 중계 화면에 잡힐 땐 느림보 러너들도 자기 일처럼 주변에 자랑을 하곤 하지만 말이다.


사는 곳도 성별도 나이도 페이스도 모두 다르지만 딱 한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두가 달리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싶다는 마음이든 건강한 삶에 대한 열망이든 대회 후에 오는 성취감이든 우리 모두는 달리는 행위의 어떤 부분을 사랑한다. 이 마음이야말로 러없사를 하나로 묶고 5년여간 이어지게 해온 원동력이다.


사람 많은 곳에 어찌 잡음이 없으려냐만은 앞으로도 이 마음 하나로 방 운영을 지속하고 싶다. 느리든 빠르든 어디에서 뛰든 채팅방에서나마 응원을 보내며 함께 있는 것 같은 마음과 에너지를 불어넣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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