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나 영애의 조용한 격투

by 요나

기린은 우아하다. 곧고 길게 뻗은 목은 진주목걸이를 걸치지 않아도 고고하고 아름다운 선을 그린다. 커다란 눈에 달린 숱 많은 속눈썹은 벨벳처럼 부드러워 보이고, 날마다 촘촘한 빗으로 정성껏 빗질한 것처럼 윤기가 나는 몸은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사바나 영애’ 기린은 뛰는 것도 남다르다. 톰슨가젤이나 얼룩말처럼 사방팔방 흙먼지를 뿜어내며 방정맞게 파다닥 뛰어가지도 않고, 세렝게티에서 가장 노안인 누우처럼 괴상한 소리로 울며 쫓기듯 뛰지도 않는다. 긴 다리로 소리 없이 사뿐사뿐 가볍게 초원을 가로질러 간다. 그 모습이 정말 우아하기 짝이 없다. 동물판 <브리저튼>을 만든다면 단연코 기린이 주인공이어야 할 것이다.



초식 동물인 기린이 조용하게 아카시아 나무를 먹고 있는 곳이라면, 주위에 위험한 동물도 없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별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다는 뜻이다. 그 주변에 차를 대고 있을 때면 나도 마음이 풀어지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사자나 치타 같은 ‘빅캣’을 찾는 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면 정말 금세 지친다. 뭐라도 찾는 게 좋은 거지만 너무 피곤한 날에는 눈앞에 아무것도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단 생각도 한다. 이런 치사한(?) 생각을 하며 기린 옆에서 점심을 먹으면 양심에 좀 찔리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롭고 느긋한 휴식시간이 반갑기만 하다.






그날도 이리저리 사자를 찾아 배회하고 있었다. 친한 운전수들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사파리 서킷을 빙글빙글 돌아다녔지만 이미 자리를 뜬 건지 사자무리는 없었다. 그런데 근처에 사파리차 다섯 대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있게 아닌가?! 사자가 있나 하고 가보니 단지 기린 두 마리뿐이었다.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패스였다. 기린은 특성상 역동적인 컷이 잘 안 나온다. 화면에 붙박이 같은 존재랄까. 기린을 지나쳐 계속 주변을 탐색하는데 서킷에 돌아올 때마다 아까 그 차들이 계속 서있었다. 그냥 기린이던데 대체 뭘 볼 게 있다고 그러는 걸까? 궁금해져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차를 댔다.



아악! 세상에, 너무 깜짝 놀랐다. 보자마자 기린이 죽은 줄 알았다. 기린 목이 다른 기린의 목에 괴상하게 감겨있었기 때문이다. 목이 부러져 죽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꼬임이 스스륵 풀리더니 다시 꼿꼿하게 섰다. 내가 아는 곧은 목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대 기린의 목이 둥글게 휘어지며 찰지게 감겨 들어오는 바람에 기린 목 중간이 움푹 들어가고야 말았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넥킹(necking)이었다.


두 개의 채찍처럼 휘릭휘릭 움직이는 목을 계속 보니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구부러지며 기린 목 두 개가 뱀 또아리처럼 엉키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말도 안 돼! 목이 저렇게 된다고? 알기로는 기린의 목뼈 개수도 인간이랑 똑같이 7개라던데? 아예 목뼈가 없는 것 같은 기묘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주변이 이상하리 만치 조용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격한 싸움이다 보니 '퍽퍽‘ 하는 과격한 타격음이 나야 정상인데 내가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거 같았다. 이렇게 고요한 가운데에 싸움이 지속되니 분위기가 더 험악하게 느껴졌다. 목이 부딪힐 때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그래도 소리가 나긴 했다. ’폭폭‘ 하는 작은 소리였는데 마치 저 구석방에서 누군가 힘없이 베개싸움을 하는 소리 같았다.



한참 관전을 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두 마리의 무늬가 서로 달랐다. 한 마리는 기린 중에서 가장 키가 크다고 하는 '마사이 기린‘이었다. 일반적인 기린의 무늬는 모서리가 둥근 다각형인데 비해 마사이 기린은 이리저리 굴러다녀 찢긴 낙엽처럼 모서리가 삐죽삐죽하다. 마치 마사이 기린의 더러운 성질 머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마사이 기린은 상대기린을 목으로 쳐대는 것에 모자라 몸통으로 마구 밀어대고 있었다. 결국 상대 기린은 뒤로 밀려나다가 관목 사이로 달아나고야 말았다. 영역싸움에서 진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영애, 우아한 기린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야생동물이니 당연한 거지만.. 그저 우아하게만 보이던 목이 저렇게 매서운 채찍으로 변할 줄이야. 그렇게 휘두르는데도 가녀린 목이 부러지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하다. 야생의 초원에서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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