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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l 04. 2023

마지막으로 남긴 책

요리책은 종이책으로 읽어야 제맛

나는 꽤 오래 종이책을 고수하던 사람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이 e북의 편리함을 자랑하고 아이패드나 크레마로 책을 보는 걸 알았어도 '책은 종이로 봐야지'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고수했다. 사실 나는 새로운 형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성격이고 새로운 일을 하기 전에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는 타입이다. 그래서 e북으로의 전향(?) 역시 늦어졌다.


첫 번째 종이책을 정리했을 때는 결혼을 해서 집을 옮길 때였다. 그때 큰 책장 두 개를 정리해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 몇십만 원을 벌었다. 만화책만 천권이 넘었고 소설책이나 인문학책도 몇백 권은 됐을 것이다.




남편과 살면서 종이책을 사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 됐다. 왜냐면 남편과 함께 대학원을 다니게 됐고, 우리는 거의 주말마다 학교 도서관에 들려 책을 수북이 빌려왔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이라 한 번에 책을 10권 이상 빌릴 수 있었고 대출기간도 한 달이었다. 둘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20권 정도 빌리고 한 달 동안 쌓아두면서 보니 책을 살 일이 없었다. 그렇게 종이책과의 인연이 이어졌었다.


종이책과의 인연이 확실히 끊어진 것은 아이를 낳고 나서 조리원에서부터다. 조리원에서 나는 또다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기 전 불안이 굉장히 높아지는 시기를 겪었다. 나는 불안할 때 책으로 도피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모자동실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 책을 읽었다. 조리원에 가져간 책은 딱 한 권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e북을 보게 됐다.




종이책을 볼 때 가장 불편한 것은 기록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유료어플 '북모리'를 사용해서 기록하고 싶은 책의 페이지를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겨뒀다.


북모리는 책 페이지를 찍으면 저절로 텍스트로 전환해서 저장을 해준다. 아이폰 기본 기능으로도 쓸 수 있지만 북모리를 사용하면 좀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서 유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북모리로 읽은 책을 정리한 모습.


물론 이 어플은 종이책을 읽을 때마다 옆에 노트북을 두고 기록하던 과거의 행태보다는 훨씬 편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계속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려야 해서 책을 읽으면서 집중이 깨졌다.


나중에는 책에 포스트잇을 더덕더덕 붙이고, 다 읽고 한꺼번에 사진을 찍는 식으로 정리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나의 독서 습관 때문에 책을 다 읽지 않으면 기록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렇게 책을 기록하는 문제 때문에 종이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꼈다. 그런데 조리원에서 e북에 길들여지니, 기록하기가 너무나 편했다. 나는 '밀리의 서재' 멤버십을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밀리의 서재에 없는 책은 알라딘 e북 리더기를 이용해 책을 읽었다. 두 플랫폼 모두 책을 읽으면서 그저 손가락으로 하이라이트 할 부분을 드래그하기만 하면 저절로 기록이 됐다.


밀리의 서재 하이라이트 모음 페이지.


이제 종이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거나 노트북에 타이핑을 하는 식으로 기록하는 행태는 할 수 없는 몸이 돼버렸다.




조리원에서 퇴소를 하고 집에 있는 종이책도 모두 처분했다. 아기를 위한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 기도 했으나 더 이상 종이책은 읽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완전히 e북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모든 책을 정리하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책이 딱 한 종류 있다. 바로 요리 레시피 책이다.


집밥 레시피 책, 일본 가정식 책, 아이를 위한 요리책, 다이어트를 위한 저탄수 레시피책, 한 에피소드마다 황금 레시피가 나오는 요리 만화이자 나의 최애 만화 '어제 뭐 먹었어' 시리즈, 중국에 여행 갈 때를 위한 '차이니즈 봉봉 클럽', 조경규 작가의 최신작이자 서울 맛집 투어를 위한 '오늘도 냠냠냠' 정도를 남겼다.

 



'밀리의 서재'에서도 요리책을 몇 권 다운로드하였지만 뭔가 당기지 않았다. 요리책은 종이책으로 읽어야 제맛인 것 같다. 요리를 할 때도 핸드폰보다 종이 레시피 책을 펼쳐놓고, 그 책에 양념들을 튀겨가면서 요리하는 맛이 있다. 


뭔가 심심할 때 집밥 레시피 책을 뒤적이고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나오면 곧바로 그것을 만들어 먹는다.


요리책이 좋은 점이 아기와 함께 보기도 좋다는 점이다. 대부분 사진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리 책을 볼 때 아기를 옆에 두면 아기는 책에 나오는 사진을 보느라 눈이 똘망똘망해진다.




오늘은 이계정 작가의 '그래도 집밥이 먹고플 때'를 펼쳐서 이것저것 집밥 아이디어를 얻었다. 점심에는 샥슈카를 해 먹고, 저녁에는 불고기 크림 파스타를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위한 책은 종이책으로 사겠지만, 나를 위한 책으로 종이책을 사서 모으는 날이 다시 올까 싶기도 하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책은 요리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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