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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Jul 27. 2020

뫼르소에게서 느껴지는 N포세대의 모습

알베르 카뮈 <이방인> 리뷰[1]

뫼르소가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장례식에 참여하여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을 때, 나는 <아몬드>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혹시 뫼르소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선천적인 결함이 있는 걸까? 그러나 책을 두 번이나 탐독한 결론은 '아니다'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과 첫 문단.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왔더니 가장 처음에 뫼르소가 단 한 문단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뫼르소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덕적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조금 덜 하고 살뿐이며, 자신의 감정에 조금 더 충실하고, 사회가 기대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는 자일뿐이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적당히 체념할 것 체념하고 소소하게 만족하면서 살아가다가, 문자 그대로 한 순간에 남의 장기를 burn-out*한 죄로 사형을 구형받는다.  


뫼르소는 다른 사람들이 사교의 표현 혹은 사회생활의 한 맥락에서 하는 행동들(예를 들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며 조의를 표하거나, 상복을 입은 직원에게 괜찮냐고 물어주는 일 등)을 할 줄 안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으며, 남이 그런 행동을 해주길 기대는 하지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종종 그런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타이밍을 놓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귀찮아서' 안 하고 넘어간다. 

 

여러 번의 '귀찮다'라는 뫼르소의 말에서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뫼르소가 인간관계에 다소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그저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는 모습은 '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학생 시절을 회상하고, 사장이 파리로 전근을 가 보라는 제안을 하는 점, 직장은 있으나 어머니를 돌볼 사람의 임금을 지불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뫼르소는 요즘으로 치면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버는 청년인 듯하다. 그는 늘 자신이 창고를 지키는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왠지 그 말이 의심스러운 남자와 피부병에 걸린 노견을 학대하듯 키우는 노인이 거주하는 다세대주택에서 산다. 사장이 파리에서 더 좋은 조건에 일을 해보라고 해도 삶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거절한다. 

....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삶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볼 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았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을 때, 나는 곧 그런 것이 사실상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뫼르소는 비록 대학생 시절에 가졌던 야심은 이제 없지만, 그런 야심은 이제 중요하지 않단다. 삶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뫼르소가 대학생 때 가졌던 야심은 삶을 바꿔나가는 일과 관계있었을 터인데, 야심이 없다라. 어떤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N포 세대'


나는 이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N포세대, 살아갈 희망이 없어서 연애, 결혼, 출산, 주택구입 등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사는 청년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과 동시에 유행한 말이 소확행**이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불교계에서는 법정스님께서 무소유라는 베스트셀러를 남기고 가셨고, 기독교에서는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라한다(분명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소비 트렌드가 소확행인 것은 종교계에서 작은 것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소비가 있어야 자본이 순환하고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소소할 필요가 있는가? 거창하고 오래가는 행복이 유행할 수는 없는가? 


소소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다분히 시장경제체제에서 벗어난듯한 저 말은 "한 때는 야심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닌" 청년들이 지나친 염세주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청년들이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에너지를 내 만들어내는 최면 같은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판사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뫼르소에게 "당신은 나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그리고 판사는 뫼르소가 '영혼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낙인찍어 버린다.

<이방인> 2부는 법정에 선 뫼르소와 뫼르소를 대하는 판검사, 변호사, 기자, 배심원, 그리고 주변인들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뫼르소는 그 사회의 이방인이다. 종교에 관심 없다고 단호하게 표현하며, 모두가 신부님을 'Father'라고 칭할 때, 신부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를 왜 Father라고 부르지 않느냐는 신부의 말에 뫼르소가 하는 말이 꽤 논리적이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지 않소

그러나 신부는 이렇게 대답하는 뫼르소가 기이하기만 하다.

판사는 뫼르소에게 십자가까지 보여주며 신을 믿는지 물어본다. 뫼르소는 종교에 관심이 없으며,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배심원들은 술렁거리고, 아랍인을 네 발의 총알로 살해한 범죄자에 대한 재판은 신을 믿지 않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뫼르소가 담배를 피우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매사에 무관심한 자,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식날처럼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총을 쐈다는 자에 대한 심판으로 변질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잣대를 거부한 자에 대한 심판이 된 것이다. 어쩌면 사회가 '합의한' 도덕(?)을 거스르며 살면 뭐 어떠냐는 뫼르소와 그런 모습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뫼르소가 재판을 받는 내내 판사와 검사가 뫼르소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범죄의 배경을 파악하는 수준을 넘어, 범죄자에게 '사회 부적응자'의 낙인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


뫼르소는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다. 어느 한 부류로 콕 집어서 이 인물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뫼르소는 작중에서 대학생 때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큰 상실을 맞았고, 이로 인해 사회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청년 상이 있다면 뫼르소는 그 경계에 머물면서,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면서 살았다. 체념 → 현식적인 상황 인지 → 관조 →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사회적 페르소나를 만드는 데 최소한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 1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령에 살던 청년 뫼르소는 힘들게 구한 직장에서 받은 소중하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맛있고 값비싼(비싸 봤자 집값만 하겠냐) 디저트를 먹으면서 소확행 하는 이 시대 N포세대와 확실히 닮았다. 



*요즘에는 언론이나 책에서 번아웃을 번아웃 증후군, 즉,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상태를 이르는 말로 자주 쓴다. 나는 그 부분을 노리고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 네 방으로 죽인 걸 burn-out(태워버리다)로 표현했다. 사실 내 눈에 <이방인>의 뫼르소는 번아웃이 왔거나, 오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고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뫼르소가 모든 면에서 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미묘하게 아랍인과 프랑스인(아마 백인일 것이다)을 구분 지으며, 여성을 때리고 협박하는 남성(레몽)과 그걸 말리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방관자(뫼르소), 순종적인 여성상(마리)을 그린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서 사회의 부조리함, 특히 법정에서의 부조리를 어느 부분에서는 '이 작품 코미디인가?'싶을 정도로 판검사의 권위의식과 비논리적인 재판 과정을 풍자한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뫼르소가 보이는 잘못된 여성상, 정당하지 않은 폭력에 방관하는 모습은 아무리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쿨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소확행은 번 대로 쓰고 현재의 행복에 충실하자는 욜로를 지나 요즘엔 통 크게 쓰고 보자는 FLEX로 넘어온 것 같다. 통 크게 쓴다지만 집값만 하겠는가? 결국 돈 모아서 안전한 주거지 마련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우니 다른 곳에 돈 쓰면서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아가 보려는 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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