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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Aug 03. 2020

"걔? 큰딸 있는데 셋째한테 무슨" 원조 유교걸 심시선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리뷰 ver.1

유튜브 채널 <문명 특급> 2020.01.02 클립. 이효리의 U-Go-Girl을 재치 있게 개사했다

"네? 제가 장년데, 재산 상속은 남동생한테 간다고요? 안 돼~~!!"

2020년 1월, 스브스 뉴스 문명 특급에서 이효리의 U-Go-Girl을 개사해서 만든 '유교걸'을 발표했다. 유교걸은 삼강오륜 붕우유신 잘 지키는, 곧고 바르게 자란 girls가 남동생한테 모든 재산을 상속해준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교걸, 불교걸, 기독걸 다 모아서 안돼요 안돼!! 를 외치는 이야기다. 유교걸 노랫말 이야기 전개에 대해 조언을 준 김이나 작사가 왈, "평생 조아리고 살 수는 없잖아”.

단지 성별에 따라 차별하지 말라는 메시지만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는 사람으로 나를 봐 달라. 사회에서 요구하는 편견의 틀에 나를 가두지 말아 달라'. 이런 게 유교걸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 아닐까 싶다.


2020년에 유교걸이 처음 등장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일 수 있다. 적어도 <시선으로부터>의 세계에서는 심시선이 바로 원조 유교걸, 유교그랜마다.



이 책에서는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하기 전에 심시선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 원고, 방송 자료 등을 실어 심시선으로부터 챕터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 흐름이 넘어가도록 한다.


자신이 세상을 뜨면 큰딸이 집안 대소사를 책임질 것이란 심시선의 말에 질문자가 되묻는다. 아드님 있으시잖아요? 보통 아들이 대소사를 맡지 않느냐, 왜 딸에게 맡기느냐라는 뜻일 테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심시선의 말이 통쾌하다.

 심시선씨, 유일하게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 발언을 하고 계신데요.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그럼요.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봤자 뭐하겠습니까? 사라져야 할 관습입니다.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아 따님에게요? 아드님 있으시잖아요.
셋째요....? 걔? 걔한테 무슨. 나 죽고 나서 모든 대소사는 큰딸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걔?"


한 단어가 주는 임팩트가 이렇게 크다니!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박장대소했고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확 올라갔다. 걔? ㅋㅋㅋ별소리를 다 한다는듯한 저 계산되지 않은 말과 태도. 인생짬바(?)가 글을 뚫고 나온다. '걔? 걔한테 무슨.'이라는 대사에 내가 크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해외에서 아직 입국하지 못한 아들 대신 딸이 상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인 조카가 상주를 하는 타개한 유명 정치인의 장례 현장을 목격해서, 결혼식 축의금은 남자가 받는 거라며 여자 형제를 제쳐두고 온 집안을 뒤져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는 남자를 찾는 아버지를 둬서,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외삼촌의 사업 초기 자본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둘째인 외삼촌에게만 상속해준 재산임을 알면서도 아들이 하나니 거기 다 준 거 아니겠냐며 넘어가는 이모들을 둬서, 그리고 이런 당연하지 않은 듯한 일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였다.


심시선 가계도라는 문구와 아내가 왼쪽, 남편이 오른쪽에 있는 게 어색하다*. 상헌이 이 집안은 모계사회라고 농반 진반 말한 게 어떤 느낌인지 가계도만 봐도 조금은 알겠다.

시선네 가문에서 '걔'를 담당하는 셋째 이명준의 아내 김난정은 시선을 '며느리인 자신의 취향에 관심을 가져주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시선의 강단 있는 모습을 꼭 닮은 명혜의 남편 태호는 시선이 집에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숨겨주었던 일, 시선의 집에 여러 예술계 거물들이 스스럼없이 편히 드나들던 일, 커피를 너무 좋아했던 시선이 커피를 못 마시게 되었을 때 시선에게 디카페인 커피를 디카페인임을 알려주지 않고 마시게 했다가 명혜와 시선에게 말로 쌍펀치 맞았던 일 등등을 추억한다. 시선의 손녀인 화수는 시선이 죽기 전 '새가 있는 그림은 화수에게 줘. 저 아이가 저 그림 앞에서 가장 오래 서 있었다'라고 하는 말을 기억한다.


시선은 순탄하지만은 않은 젊은 날을 보냈다. 하와이 사진결혼 끝물에 하와이행 배를 탔고, 독일로 건너가서 화가와 살면서 그림을 익혔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살던 집을 확장해서 경찰에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었다. 그러나 자신과 관련된 잘못된 질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에겐 단호하게 Nein!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함께 살았던 화가 엠앤엠과는 연인 사이가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이 그의 마지막 사랑이란 이야기는 잘못되었다고 확실하게 전달한다. 종종 조언인 듯 예언인 듯 기대인듯한 말을 해주기도 한다. 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서 알고자 노력하며, 스스로 성장하고자 했고, 거절과 대접은 확실하게 하는 사람. 정세랑 작가는 심시선을 그런 사람으로 그렸다.




나는 심시선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그렇고 남을 대할 때에도 사회에서 시선과 어떤 이 사이에 규정해놓은 관계(예를 들어 엄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장모님과 사위)의 룰에 대해 관대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쟤는 사위면서 내게 왜 이런 것도 안 해주나, 쟤는 며느리가 되어서 내 아들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고/ 나한테 전화도 잘 안 하고 이런 모습이 매우 드물다(내가 놓쳤을 수도 있고, 묘사가 덜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드물다는 표현을 썼다.) 심시선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대신 심시선과 김난정, 장모와 사위 대신 심시선과 이태호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시선은 자기 가족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가족들은 저마다 심시선과 함께했던 추억을 어린 시절 날씨가 아주 선선하고 화창한 날, 친구들과 걱정 없이 밝게 웃으면서 서로를 마주했던 순간처럼 언제든 꺼냈을 때 청량하면서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결국 근본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역할 꼬리표가 붙는 순간, 사람들은 사회적 페르소나를 쓰고 그 페르소나를 유지하기 위해 미디어 등에 노출된 엄마, 아빠, 사위, 며느리, 아들, 딸은 역할에 맞는 성향을 학습해간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심시선은 개개인의 취향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아들이어서 해야 할 일, 딸이어서 해야 할 일을 요구하거나 크게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이 남편과 아내, 아들과 며느리, 아빠와 엄마로 살면서도 자기 자신의 취향과 생활패턴을 최대한 잃지 않도록 해주었고, 덩달아 자신도 엄마, 시어머니, 할머니의 표본이 되기보다 그냥 심시선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혹자는 제사가 사라진다면 명절에 가족들이 점차 모이지 않게 될 거라는 걱정을 한다.

눈동자를 잠시 화면 밖으로 굴리면서 생각해보자. 제사가 문제인가, 며느리는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을 하라며 일 시키고 스트레스 주는 게 문제인가? 제사를 없애라고 해도 10주기니 다시 살려보자는 시선의 가족들은 제사가 없어지고 서로 소원해졌을까? 자고로 며느리라면 제사상을 차릴 줄 알아야지, 제사는 아들이 지내야지, 상주는 아들이 해야지, 재산은 아들한테 더 많이 물려줘야지... 이런 틀에서 벗어나서 너랑 나에 집중해서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시선으로부터> 리뷰 1탄은 난정이 딸 우윤 친구들의 엄마를 만나서 한 대화를 끝으로 마무리해볼까 한다.

... 편애가 없어서 편했어. 아들에 대해서나 딸에 대해서나, 자기 자식에 대해서나 데려온 자식에 대해서나.
무관심하셨나? 그거 좋았겠네.
아니, 무관심하진 않았어. (중략) 겉도는 대화는 절대 안 하는 분이었달까. 보통은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내용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람의 가계도를 그릴 땐 보통 남성을 왼쪽 여성을 오른쪽에 표시하더라(대학교에서 쓰는 유전학 교과서나 고등학교 교과서, 각종 시험문제 등에서).

**큰딸에게 집안 대소사 맡긴 일은 예외로 봐야 한다. 누구 하나 챙겨야 한다면 태어난 지 제일 오래된 사람, 자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자식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하는 게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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