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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찬우 Aug 04. 2020

균형 맞춰 오래가는 사랑꾼: 지구 한아와 외계 경민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리뷰

최근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더 읽고 싶어 졌다.

주변에서 그렇게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추천할 때에도, 홍대병* 걸린 사람처럼 꿈쩍도하지 않았는데, 읽어보니 왜들 그렇게 간장게장 먹을 때 꼭 게딱지에 밥 비벼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처럼 정세랑~정세랑~했는지 알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SF, 여성주의, 생태주의 서사가 한 권에 담겨있는데,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시간여행을 하거나 우주여행을 하는 SF는 굉장히 많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창백한 푸른 점, 콘택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정도가 있다. 영화까지 포함한다면 더 늘어날 거다.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등등. 그러나 이 책은 내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지구 안과 밖의 시간 흐름의 차이를 깊이 있게 다루기보다 우주 이야기를 양념으로 하여 환경과 관련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졌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 한아는 옷을 버리지 않고 리폼해서 입을 수 있게 작업해주는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손녀의 요청으로 할아버지의 옷을 손녀의 옷으로 리폼해준다. 고등학교 때 입었던 반티를 들고 와서 추억을 오래도록 남길 수 있게 반 티의 흔적이라도 넣어서 새로운 옷으로 만들어달라고 찾아오는 네 명의 친구도 있었다. 작가는 낡고 해지고 인쇄된 코팅이 다 벗겨진 반티를 어떻게든 살려내서 놀러 갈 때 입기 좋은 조끼 등으로 재탄생시킨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한아는 외계에서 온 경민과 결혼 후 신혼여행지로 몰디브와 베네치아 중 한 곳을 신혼여행지로 정하고 싶어 하면서도 망설인다. 두 군데를 신혼여행지 후보로 올린 이유는 지구 평균기온과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몰디브와 베네치아가 점점 잠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몰디브와 베네치아를 선택지에 올리기도 망설여졌던 건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이란다. 비행기를 타면 화석연료가 많이 쓰이니까. 국제기구에서는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 각 지역 기구당 소비할 수 있는 탄소배출량을 정해둬서, 종종 비행기를 타면 2시간이면 도착할 곳을 버스를 타고 6시간을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부케는 꽃대를 살려 리본으로 묶기만 했다는 묘사까지 환경을 생각하는 한아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고, 또 그런 내용이 억지스럽지 않아서 더 각인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해야 할 일 10가지 이런 식으로 나열했으면 왠지 따분하고 지루한 설교 같아서 눈동자만 굴렸을 것 같다.



한아가 환경을 아끼는 마음,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삶을 존중하고 환경운동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은 한아가 추구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열쇠 같다. 환경운동가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처럼 '지속 가능한'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쓴다.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기보다는 let it be(내비둬~)나 쟤들 좀 건강하고 편하게 살도록 도와주자에 가깝다. 어떤 대상의 상태를 내 편의에 따라 제한하거나 조종하지 않고, 대상이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그 자리에서 잘 적응해가도록, 그렇게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한아가 지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한아가 사람을, 아니 외계 생명체, 음 그러니까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월등한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를 사랑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아는 경민의 껍데기를 쓴 외계인을 점차 진심으로 사랑한다(그렇다고 껍데기는 가라! 수준은 아니다. 껍데기도 좀 본다. 오죽하면 기왕 다른 사람 모습으로 올 거면 정우성이나 임시완으로 오라고 했을까). 한아는 점점 그의 하드웨어가 경민이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소프트웨어만 외계에서 온 경민이면 된다고 여긴다. 한아의 외계 경민에 대한 사랑은 껍데기<알맹이, 즉, 실존적인 사랑이다.


결국 여성주의든 생태주의든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의 근원은 '사랑'인 것 같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주체적이고,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고, 오래가며, 실존적인 사랑이 참신하고 재미있게, 그러나 불편하지는 않게 포장되어 있던 이야기보따리였다.



덧. 과학 설정에 대한 궁금증 두 가지와 외계 경민 설정에 대한 생각


- 찐 경민(엑스)가 푸석푸석하고 곧 가루가 될 것 같은 상태로 돌아왔을 때에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우주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보다 느리게 간다. 그런데 우주선을 타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경민이는 왜 잿빛 머리를 하고 있었던 걸까? 엑스의 시간이 궁금했다. 우주선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다른 행성에 잠시 들르면 또 다른 시간계에 속하게 되는 걸까?  각질 같은 게 많이 일어난다는 설정도 그렇다. 동물은 나이가 들수록 세포 재생이 더뎌진다고 알려져 있는데(그렇게 배웠는데), 잿빛 머리나 주름진 얼굴 등과 조합해 보았을 때 경민이는 굉장히 쇠약하고 나이 든 모습으로 한아 앞에 등장한 것 같다. 만약 엑스가 정말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면 한아보다 더 젊다고 설정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합당해 보였다.

두 번째 의문은 첫 번째와 조금 연결된다. 엑스는 뼈가 잘 부러지는 상태였는데, 이는 세포 재생이 잘 되지 않아서인 것도 있고, 우주여행을 하고 지구에 내린 뒤 대기압을 견디지 못해서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주복을 입고 우주선을 이용했다면 연료가 충분하다고 가정했을 때 기압차에 의한 뼈 손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구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엑스에게는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비하인드 스토리를 엮은 책이나 작가 인터뷰가 있었으면 좋겠다.


- 먼 우주에서 망원경으로 '저기만 보이네...'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구로 왔다는 설정이 로맨틱함의 극단에 있는 설정인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역시 극과 극은 늘 함께하는 건가?? 마치 재수학원 아래층에 호프집 있고 그 옆에 노래방 있고 그 위에 스터디 카페 있는 것처럼..? 외계 경민이 매우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 버전으로 찾아와 주어서 정말 다행스러웠다. 예민한 반응일 수 있으나 망원경으로 지켜봤다는 게 불법 촬영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떤 설정이 최선이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독자도 나도 시간을 갖고 좀 더 생각해보는 걸로...




*대중문화를 소비할 때, '마이너하고 독특한 취향을 가졌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알아보는 시람'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기 많은 아티스트의 작품은 잘 소비하지 않는데 그걸 독특한 포인트로 잡는다. 한 마디로 정세랑 작가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멀리했었다 뭐 그런 말이다

**생태주의적 사고를 하는 작가라서 일까? 이야기가 다양하고 개성 있는데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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