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에서는 성적 쾌락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가 그랬다. 특히 야만인 존이 사랑하는 사람 레니나를 보면서 성욕을 느낄 때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거나 레니나를 채찍으로 때리는 장면은 예술로 받아들여야 할지,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자극적이고 폭력적으로 기술했다고 여겨야 할지 참 난감했다.
그러나 SF소설은 새로운 설정(과학적 설정) 그 이면에 있는 철학을 살펴야 한다는 해설처럼, <멋진 신세계>은 매우 정교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가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면서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사실 신세계라고 일컫는 문명인들을 비판하고, 야만인 쪽을 찬양하는 식의 전개를 예상했었는데, 읽어보니 작가는 어느 쪽을 더 옹호하거나 비판/비난하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여 독자에게 판단을 넘긴 것 같았다. 90여 년이 지났음에도 생각할 거리를 계속 만들어주는 작품. 아직도 <멋진 신세계>가 고전으로 대접받으며 예술의 영역에 있을 수 있는 이유에 이 부분이 한몫 단단히 했을 것 같다.
책을 읽고 정리한 메모**. 문명세계와 야만세계의 특징. 크게 자유의지, 계급, 젠더문제와 성적쾌락의 표현,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서 차이를 보인다.
야만인들의 세계를 비위생적이고 토템 느낌이 나는 종교를 숭배하는 듯 그려놓은 점,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묘사한 점 등에서 '과연 2300년대에도 기계, 통제, 인간 외 다른 개체군과의 영역분리 등이 런던 같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일어난 곳에서만 한정적으로 일어날까? 그 시기에도 전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헉슬리는 야만인의 세계를 지나치게 문명과 동떨어진 곳으로 그려놓은 것 같았다. 까딱 잘못 서술했다가는 인종차별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었을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평론가 중 최소 한 명은 이런 이야기를 언급했으리라.
헉슬리도 결국 인간이어서 이 사람의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었나 보다. 런던은 문명세계의 수도 격이고, 아이슬란드는 유배지, 뉴멕시코는 타지라니. 작가 소개를 보지 않아도 이 사람이 잉글랜드 귀족 혹은 준귀족(?) 출신일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도 결국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인물인 버나드, 레니나, 린다, 존처럼 자신이 사는 세계의 세계관과 그 세계에 속한 자신의 계급의 문화(아비투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음이 어느 정도 증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신세계>가 정말 멋진 예술작품인 까닭은 올더스 헉슬리가 1차 세계대전 후,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과학만능주의에 빠지는 등 '인간성'을 경외시 하는 사회, 자유의지를 앗아가는 전체주의 사회가 초래할 결과를 문명인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많은 이들이 당연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무감각, 과학만능주의, 정부의 통제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음을 경고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초점을 맞춰 생각해볼 내용은 크게 계급과 아비투스, 성과 관련된 문제(성적 쾌락의 표현, 결혼, 임신, 출산 등),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유 의지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기엔 한 달음에 긴 글 쓰는 데 필요한 나의 코어 근육이 좀 부족하다. 오늘은 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나머지는 다음 버전에서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문명세계에는 공고한 다섯 개의 계급 알파-베타-감마-델타-엡실론이 존재한다. 알파에서 엡실론으로 갈수록 계급이 낮고, 단순한 일을 하고, 결정권이 적으며, 수정란 하나에서 최대 96 쌍둥이까지 태어나고, 알파 계급과 달리 소마(진통제 겸 환각제)를 그때그때 정량 배급받는다. 문명세계에서는 어릴 적부터 성욕을 표현하고 성적 행위에서 오는 쾌락을 즐기는 일이 터부시 되지 않는다. 단, 문명세계에서는 결혼과 임신(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잉태)을 하지 않는다. 베타인 레니나는 성적인 쾌락을 즐기면서도 임신을 하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벨트에 있는 피임약을 꺼내서 먹는다. 그러나 야만인의 세계에서는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워하고, 당연히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일은 세속적인 일이며, 결혼을 하면 아이를 자궁에 착상시켜서 낳아야 한다. 자궁 밖에서 발생*** 및 분열 중인 수정란에 알코올을 주입하는 등의 조작을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존은 린다와 현 문명세계 국장의 아들이다. 즉, 혈통(?)으로만 보면 문명세계에 속해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존은 18세 남성에게 채찍을 맞으면서 강강술래를 시키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야만인 세계에서도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다 닳아빠진 셰익스피어 책을 끼고 살면서 책 속 세상을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믿었다.
베타 계급인 레니나는 어느 날 호감이 있던 남성과 뉴멕시코로 떠났다가 문명세계로 돌아오는 길에 문명 세계를 그리워하는 린다와 린다의 아들 존을 데려온다. 레니나와 존은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생겼다. 그런데 존은 레니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호감이 성욕으로 발전하는 데 대해 고통스러워한다. 레니나는 존에게 문명인답게(?) '나는 너한테 호감이 있다! 우리 서로 하자!'라고 하는데, 존은 레니나의 고백과 문명 세계 속에서 린다의 죽음을 겪은 후 문명세계에서 최대한 야만인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섬으로 향한다.
존은 문명세계 사람들이 지나치게 흥분이 되거나 슬퍼질 때마다 먹는 행복을 찾는 약인 '소마'를 스스로 거부하였고,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으려는 알파 계급들에게도 거부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존도 자라면서 학습한 관습, 관념, 문화 등 세계관(앞서 말한 아비투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존은 종종 레니나가 생각날 때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채찍질한다. 이 장면이 <멋진 신세계> 속 디스패치에게 포착되어서 구경꾼들이 몰리는데, 아뿔싸, 존 앞에 착륙한 헬기에서 레니나가 내린다.
자신의 몸을 채찍으로 때려가면서까지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레니나가 왔는데, 이상하게도 존은 레니나를 채찍질하기 시작하고 레니나의 피가 튀는 가운데 문명세계 사람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사람이 채찍질당하는 장면을 웃으면서 구경한다.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필요해
감각 영화(문명인들이 보는 영화. 철학적 내용은 없고 말 그대로 감각을 자극하여 입술이 달싹달싹거리게 하는 내용의 영화다) 제작자가 했던 대사가 다시금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만약 야만인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레니나를 채찍질하는 존을 말렸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야만인들은 자신들 기준으로 도덕적, 종교적 관념에 위배된 생각이나 행동을 한 자에게 채찍질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도 어쩌면 문명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집단일지도 모른다. 삐뚤어진 종교 및 도덕관념을 가진, 즉, 개인의 인권보다 전체(실은 상위계급 일부)가 결정한 사회의 관념이나 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집단 말이다. 결국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인물 중, 그 누구도 레니나에게 채찍질하는 존을 방관하지 않고 막을 자는 없다. 진정한 디스토피아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그 어떤 세계도 도덕적이지 않다.
소설은 존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발이 높은 곳에서 뱅그르 도는 모습을 문명세계 사람이 목격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구경거리로 만든 뒤 슬픔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꼭 현진건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를 닮았다. 아픈 아내가 설렁탕 먹고 싶다고 할 때는 '이놈의 여편네가!' 하던 김 첨지가 비 오는 날 김가네 인력거에 손님들이 줄을 서서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설렁탕을 사 들고 왔는데 이미 숨을 거두고 없는 아내를 흔들면서 "오늘은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하면서 우는 모습이 충격적이면서 처량하고 야속하게 느껴졌었다. 존도 자신의 몸에 피 튀기게 채찍질을 해 댈 정도로 그리워하던 레니나를 보자마자 마구 때린다. 이건 '오다 주웠다 ㅎ' 식의 무심한 척 자상한 모습이 아니다. 운수 좋은 날의 남편은 아픈 아내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약 한 달간 약을 사주지 않고, 존은 사랑하는 여인이 겁을 먹고 욕조에 숨게 만들거나 그 여인을 채찍질하고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만든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1924년에 발간되었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8년 차이면 거의 동시대인데, 하루의 1/3이나 차이나는 시간을 사는 두 나라의 남성 작가가 너무도 비슷한 인물과 장면을 묘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절 인간들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영국인의 머릿속에서도 김 첨지가 튀어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왜 미래, 심지어 미래의 유럽에 김 첨지 같은 삐뚤어진 츤데레가 살아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말 그대로 죽일 듯 괴롭힌 뒤 잘못을 후회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감각 영화 제작자가 했던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이 필요해'라는 대사가 좀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올더스 헉슬리와 현진건이 글을 쓴 1920년대와 30년대에도, 현재도, 헉슬리가 묘사한 미래에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으로 사랑의 탈을 쓰고 연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합의하지 않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거나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모습이 소비되었고, 소비된다.
김첨지, 가난해서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한 남성으로 포장되지만 사실 가난 껍데기를 쓰고 아픈 아내에게 약을 주지 않으면서 학대한 거나 다름없다. 존,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성욕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해야 하고 그 욕구를 남들 앞에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채찍을 휘두르다 사랑 껍데기를 쓰고 연인을 위협하고 가해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정말 멋진 작품으로 오래오래 읽힐 수 있었던 까닭은 앞서 말했듯 아무렇지 않게 넘겨서는 안 될 사회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를 계속 멋진 예술 작품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고 예술과 사랑이랑 이름을 쓰면서 연인끼리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장면을 사용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장을 날릴 거대 담론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세계관이란 퍼즐 조각이 맞물리듯 서로 밀접한 관계로 엮이고 연결된 믿음 체계다(리처드 드위트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 p.17).
**더 예쁘게 적으려고 했지만 날것의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그냥 이걸 찍어서 싣기로 했다. 절대 다시 쓰기 귀찮아서 갈겨쓴 메모를 공개하는 건 아니다. 엣헴엣헴
***발생이란 줄기세포처럼 아직 기능이 정해지지 않은 세포가 호르몬 등의 영향을 받아서 어떤 기관을 구성하는 세포가 될지 정해지는 과정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