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친했던 친구와 멀어진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친구 사이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서운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누구보다 친했으나 어느 순간 이전만큼 가깝지 않다는 느낌이 들 때는 애석함이 밀려온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이재은·임지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젊은 여성 신인감독 두 명이 합심하여 연출한 영화답게,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된 후 어쩔 수 없이 두 여자아이의 변해버린 관계를 세심하게 빚어냈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발견’ 부문 대상을 받아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이 작년 9월 추석쯤 정식 개봉한 후 약 1년이 흘러 또다시 추석이 다가온다. 이번 연휴, 고향에 내려가는 길에 미묘한 이유로 멀어진 옛친구를 오랜만에 떠올리며 이 영화를 보는 걸 추천한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고3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정희’(김주아)와 ‘민영’(윤아정)은 스무 살이 된 후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희는 대학에 가지 않고 테니스 클럽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그림을 그리고, 민영은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다닌다. 이때부터 둘 사이의 공통점이 서서히 줄어든다. 그러던 중 민영은 여름방학을 맞아 자신의 자취방으로 정희를 초대한다. 이 만남에서 둘은 그들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직시하게 된다.
정희와 민영 사이에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사소한 일로 인해 조금씩 어긋나는 둘을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톤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관객은 가벼운 마음으로 둘을 지켜보며 웃음을 짓다가도 자연스럽게 정희에게 이입하게 된다. 정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감독이 민영의 심리묘사에 소홀한 건 아니다. 후반부에서 정희가 민영의 일기장을 읽게 되면서 민영에게도 잠시나마 이입할 수 있다.
‘성적표의 김민영’ 제목의 의미
이 영화는 무엇보다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니라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제목이 독특하다.
민영이 자신의 자취방에 정희를 초대했을 때 정희는 민영을 오랜만에 만날 생각에 들떠 캐리어가 터지기 직전까지 보드게임, 배드민턴 채 등의 짐을 바리바리 싸간다. 하지만 민영은 그런 정희를 내버려 두고 교수님에게 성적을 올려달라고 간청하는 메일을 쓰기 급급하다. 정희는 편입을 준비한다던 민영이 성적에 신경 쓰는 것은 이해하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정희가 씻는 사이 민영은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서 빌겠다며 몰래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정희는 자취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민영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를 읽고 민영의 속사정을 알게 된 정희는 민영이 그렇게 무심하게 행동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민영에 대해 A에서 F까지 점수를 매긴 성적표를 남기고 돌아온다.
그러니 제목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친구를 내팽개칠 정도로 성적에 집착해 민영이 성적표를 받은 게 아니라 성적표가 민영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는 의미, 그리고 정희가 민영에게 남긴 성적표를 빙자한 편지를 의미한다. 여기까지 보면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만의 ‘민영’을 떠올리게 된다.
두 감독의 개인적 경험을 관객의 보편적 경험으로
관객이 영화에 이입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정희의 일인칭 시점 때문만은 아니다. 독특한 의상이나 에피소드도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를 보다 보면 묘한 이상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배우들의 의상 때문이다. 극 중 배경은 2019년이다. 배우들의 얼굴도 앳되고 스마트폰도 최신 기종인 데에 비해 의상이 다소 올드하다.
정희는 2009년쯤 유행하던 트레이닝 바지를, 민영은 더 이전에 유행하던 카고바지와 노란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촬영 당시 고등학생이던 배우 윤아정(민영 역)도 GV(관객과의 대화)에서 특이한 의상에 대해 언급했다. “처음에는 시대물인 줄 알았다. 옷이나 사용하는 아이템들이 되게 요즘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는 2009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두 감독의 기억 속에서 나온 의상인 듯하다. 시나리오 초고를 쓴 이재은 감독은 이 영화에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느끼던 미묘한 서운함을 잘 담고 싶었다고 말하며 자신들의 취향이 많이 반영됐다고 했다.
두 감독의 취향이 반영된 건 의상뿐만이 아니다. 두 감독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민영과 정희가 즉석밥으로 떡을 만들 수 있는지 내기를 하거나, 물안경을 끼고 빗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장면 등은 그들의 실제 학창 시절에서 착안했다고 언급했다. 이런 특정한 시기의 의상이나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몰입감을 한층 높인다. 친구가 ‘내가 밥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어’ 이렇게 말하는 것보단 ‘내가 제육볶음을 요리해서 막 먹으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어’라고 말하는 게 더 몰입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영화는 주변 환경이 변하면서 친구 관계가 점점 어긋나는 보편적인 일을 다뤘다. 하지만 영화 속 장면은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한 의상과 에피소드로 채웠다. 보편적인 현상을 특수한 디테일을 첨가해 풀어낸 것이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관객은 영화 속 세계가 나의 삶과 닮은 ‘평행세계’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니 영화에 쉽게 이입하면서도 그 느낌을 현실 세계로 끌어와 나의 민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관객에 따라 정희가 아닌 민영에게 이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반부에 민영의 일기에서 그의 속내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감독들은 두 주연 배우에게 “<성적표의 김민영>은 ‘둘 중 누가 더 외로울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민영과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정희. 그 누구에게 이입해도 괜찮을 만큼 두 캐릭터는 단단히 구축돼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의 민영 또는 정희를 오랜만에 떠올리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