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세상에 '아무나'는 없다

존중받아야 할 개인이 있을 뿐

by 오후의 책방

편집실에 앉자마자 완벽히 외부 소음을 막아주는 두꺼운 헤드폰을 쓰고, 초집중 모드로 편집을 한다. 소리가 차음 되듯 세상과 완벽히 차패 된다. 그렇게 똑같은 패턴으로 어제와 오늘이 구별되지 않는 하루를 몇 주간 보내고 나니, 마침내 몸이 아우성을 쳤다. 늘 그렇듯 출근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는데,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몸이 터지려고 한다.

그만, 잠깐만, 그 좋아하는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산책이라도 하란 말이야.
안돼, 시간이 부족해, 난 주의를 흩트리면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이야.
너,,, 그러다 진짜 방전된다. 혼잣말로 중얼중얼하다. 결론 내렸다.
에라! 나가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한 휴식은 책 한 권을 들고 카페에 가는 거다. 읽다만 여러 책들 중에 한 권을 무심코 집어 들고 별다방에 자리 잡았다. 알람을 한 시간 맞춰놓고 핸드폰은 외투에 넣어 꾸깃꾸깃 말아 건너편 의자에 던져버렸다. 그래 딱 한 시간만 쉬자!

들고 온 책은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
어디까지 읽었었더라? 겉표지를 말아 넣은 중간즈음을 펼치고 머리구석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기억조각들을 가져와 맥락을 더듬어보았다. 다분히 손석희 씨의 추천글에 반해 구입한 책이다. 그래 그렇지라고 하다가, 글쎄라고 하다가, 손 옹께서 무엇 때문에 이 책을 그리 추천했던가 의구심도 들다가, 덮어두었던 책이다. 다시 펼친 중간즈음부터 읽어가다, 문득 맞춰놓은 알람이 한 시간이었던 것이 실수란 생각이 들었다. 아! 오늘 그냥 작업 접을까? 그냥 이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고 싶다란 욕구가 생겼다. 판사로써 겪은 부조리하고 불의한 여러 사건들, 선악이 구별되지 않은 일상다반사 속에서 느낀 소외를 읽어가며 그가 말한 합리적 개인주의가 무엇인지 나 또한 서서히 공감하고 젖어들고 있었다.

문득 세상은 수억의 개개인이 모인 사회임을 환기했다.
아차, 나 지금 소음을 차단하려 쓴 두꺼운 해드폰처럼, 귀 막고 살고 있지 않은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자체가 온통 관심이었던 '예전에' 내가, 낯설게 기억된다. 요즘 다분히 원하는 답변을 얻으려는 목적성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나? 기사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참 이슈되고 있는 기사 본문만 읽고 그 글에 달린 댓글은 소음쯤으로 생각하고 스크롤해버린다. 꽤 오래전부터 인 것 같다. 포털 사이트의 기사에 달린 댓글은 대개 익명성을 담보로 쏟아내는 배설 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이 말이다.

소통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듣지 않고는 공감할 수 없을 테다. 어쩐지 요즘 내가 부쩍 나이 들어 보인다 했다. 그래서 점점 고집만 세지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나 이렇게 꼰대가 돼 가는 건가?
혹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무작정 거리에 나가 사람들과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다. 아무나 붙잡고 대화하다 보면 그 '아무나'가 실은 '아무나'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프로그램 말이다.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그의 삶과 생각의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고 , 그것이 곧 시대정신, 세상의 흐름을 알아가는 것과 연관되지 않을까? 물론 꼭 이런 의도라기보다 그저 오늘은 책에서 느낀 감정을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 또 소홀했던 개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여러 기사에 달린 댓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의식적으로 좀 더 또박또박 읽었다. 그동안 엄지손가락을 튕겨 날려버렸던 댓글에는 개개인이 있었다. 생각보다 배설은 드물었고, 무척 성숙한 개인들이 있었다.


알람이 울렸다. 아쉬움에 딱 5분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일어났다.
행여 아무나의 이야기를 소음이라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세상에 ‘아무나’는 없을 테니까, 존중받아야 하고 존중할 줄 아는 개인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헤드폰은 일할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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