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쳐 주었더니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고 섭섭해합니다. 잘못하고 있는 일을 지적했더니 보는 사람이 있는데서 말했다고 불쾌하다고 합니다. 저도 모르게 후배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눈치를 봅니다. 좋은 점도 있습니다. 혹시나 놓친 일이 없을까 걱정이 되어 물어보면 제가 걱정한 것은 물론이고, 미처 생각지 못한 일까지 꼼꼼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예민해질 필요가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후배들이 든든하게 일처리를 합니다. 작은 실수야 있지만, 그 정도야 문제 될 부분이 아닙니다. 그 시기엔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나이가 된 저도 여전히 실수하거든요.
굳이 예민하게 살필 일이 줄었습니다. 감정이 크게 오르는 일도 드물어졌습니다. 무던하게 일이 흘러가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럴수록 제 자리가 작아져 가는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사로 등장하는 멋진 선배, '팀장님이 없으면 안돼요.'라는 말을 들을 기회가 오면 좋겠지만, 세상천지 그럴 일이 없습니다. '잠깐만요. 지나갈게요'라는 말이 '막고 있으면 치고 가버릴 거야'로 들리는 순간이 올까 긴장합니다.
그러게요. 아마도!
'이제 저는 조금씩 물러나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
새로운 기획에 가슴이 뜁니다. 트렌드에 올라타고 한바탕 즐겁게 서핑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번뜩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놓치기 싫은 즐거운 기회를 이 친구들에게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합니다.
문득 지금 저의 역할은 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100장 1000장짜리 퍼즐은 떨어지지 않도록 굳혀주는 유액이 필요합니다. 필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투명한 존재이니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인공도 조연도 아닌, 카메라 밖의 존재들입니다.
'풀'의 의미를 확장시켜 보았습니다. 미래와 과거를 이어주는 풀, 권위와 개성을 이어주는 풀, 스테레오와 트렌드를 이어주는 풀, 조직과 개인을 이어주는 풀. 우린 이들을 '중간자中間子'라고 합니다. 물리학에서도 같은 용어가 있습니다. 중간자는 '상호 대립하는 두 힘을 매개, 연결시켜주는 역할'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 때문에 매우 전문적인 분야인 물리학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세대, 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화용론적 변주를 거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매개하고 연결하는 역할, 그리고 빠질 때 빠져줘야 하는 역할입니다.
'나 없어도 잘할 거야'라는 말이 진심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울면서 말하면 안 되겠지요. 왠지 서글프고 우울해지는 문제이지만, 열과 성을 다해서 웃으며 빠져주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물러나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진짜 나의 자리를 찾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매거진은 그런 고민에서 찾은 작은 조각들을 붙이는 작업입니다.
관심 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독자분들의 조언과 고민 퍼즐도 함께 던져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매거진은 여러분의 이야기와 저의 이야기를 잘 엮어붙여 나가고 싶습니다.
- <물러나고 있습니다>를 시작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