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일찍 이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나 클라우디아 아란치스 [죽음이 물었다]

by 오후의 책방

https://youtu.be/agEyoB4Etng


어렸을 적에 하루는 어머니께서 '한 가지 소원이 있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난 깨끗하게 늙어서 편안하게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제가 너무 어려서 그 말씀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죽음이란 원래 그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지금 제가 그때 어머니 나이가 되고 나니 그리고 흘러간 시간만큼 어머니의 굽어진 등과 거친 손을 보니, 그 말씀의 의미가 가슴 저리게 느껴집니다. 가족, 친구, 사랑했던 이의 죽음 그리고 이름 모를 이에 죽음을 참 많이도 목도해 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별을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 요즘 드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2022년의 마지막 날, 아내가 ‘우리가 이제 몇 년 더 지나면 50살이 되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제 반밖에 안 왔는데 뭐'라고 했는데요. 문득 '그 남은 반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먹먹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 소개하는 책 <죽음이 물었다>는 그래서 이제 중년의 접어드는 분들께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읽어보라고 권해 드리고, 아직 죽음을 생각해보지 못하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죽음이야말로 당신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놓치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살아갈 날을 위해서라도 꼭 한번 읽어보라라고 권해드립니다.

제가 들고 있는 판본은 출판사로부터 받은 가제본이고요. 지금은 정식 출간이 되었습니다. 표지가 은은하게 예쁩니다.

저자 아나 클라우디아는 '완화의료' 즉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150살은 살 수 있다고 하는 시대, 노화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질병으로 보는 시대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어떤 의학적 기술적인 도움으로도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순간의 '죽음', 그 시대에 맞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는 반드시 올 테니까요.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 또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일 겁니다. 아나 클라우디아는 상파울루의 한 병원에서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환자들을 진료하고 또 상파울루의 한 호스피스 병원에서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노숙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부나 학위, 경제,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삶에서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들은 엇비슷하고 또한 그들은 죽음이라는 동일한 현실에서 만납니다. 때가 되면 세상 돈을 다 주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대개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후회를 많이 하고 그저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던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확신을 가지더라,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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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은 저자가 호스피스의사가 되기까지의 배경, 에피소드를 들려주고요. 두 번째는 호스피스 의학의 현실과 이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필요한 관점이나 태도가 무엇인지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들려줍니다. 그리고 저는 이다음에서부터 정말 많은 공감을 하고 배울 점이 많았는데요. 제가 책을 소개할 때면 어느 부분을 낭독해 드려야지 하고 선택을 하는데 이 책은 저자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1/3 지점부터는 정말 다 낭독해 드리고 싶은 내용들이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오늘 책을 소개하는 영상 다음에 두 번째 영상으로 낭독영상을 따로 제작할까 합니다. 낭독은 두 챕터를 읽어 드릴 텐데요. <책임감 있는 두려움>이라는 장은 짧지만 아주 명확하게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고, <마지막에서야 보이는 것>이라는 장은 우리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서술한 장입니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제가 이 챕터를 읽을 때 ‘자연스러운 죽음은 결코 어둠이 아니라 빛을 향해서 나가는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영상 다음에 올리는 낭독영상도 꼭 시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정말 큰 통찰을 드릴 겁니다.

저자는 육체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남은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의사 본인이 준비되어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데요. 87p에 보면 맹목적 공감의 위험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100마일을 갈 수 있는 연료가 들어있다고 하자. 만일 그 차로 100마일을 간다면 돌아올 연료가 남지 않는다. 그처럼 간단한 문제이다. 만일 당신이 타인의 입장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지녔는지 모른다면 타인의 입장이 되었다가 자신의 입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멀리 가버릴 수도 있다.”

자동차에 대한 비유가 아주 적절하죠. 그래서 완화의료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한 분을 상담한 적이 있어요. 그 분과 첫 통화를 하고 난 뒤에 거의 2~3일 꼴로 한 시간씩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업무나 회의가 있는 날에는 이미 지쳐 있는 상황이 돼버린 거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나 좋은 우정을 만들어 갈 때 저자의 말을 잘 새겨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의 에너지를 일방적으로 줘야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가 정말 안 좋아질 때는 서로의 에너지를 빼앗으려고만 합니다. '나만 바라봐' '내 이야기를 왜 안 들어줘' '너는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해' '결국에는 내 잘못이라는 거네' 이런 대화가 오가면서 서로를 지치게 합니다. 저자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만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야만 한다면 도중에 재충전할 휴게소에 들러서 음료도 마시고 기름도 넣고 또 화장실도 가야 한다. 타인에게로 가는 길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목욕도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한다. 당신을 이해해 주고 당신 곁에 있어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면 자신의 한계는 생각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에는 꼭 필요한 것이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책임감 있게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돌보는 행위는 위선이다. 자신에 대한 신체적, 정서적, 영적 관리에 부족으로 인해 독성 가득한 쓰레기가 쌓이게 되고 타인을 제대로 돌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환자에게는 고통을 이해해 주고 의미 있는 무언가로 바꿔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라고요.

사랑하는 관계에도, 가족 간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당신을 이해해 주고 곁에 있어줄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경우가 아닌 대개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해드립니다. 저자는 자신이 힘들 때 명상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큰 도움을 얻지 못했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명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명상이 일종의 고급 취향처럼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던데요. 저자는 명상을 고민이나 갈등을 해소하는 정도로 생각했나 봅니다. 생각 버리기는 명상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과정 또는 방법이거든요.

깊은 고요 속에서 내 영혼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상처나 분노, 트라우마를 알게 되고 또 내 몸에 또는 마음의 병이 원인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영혼의 기억 속에 깊이 트라우마로 남아 현재의 나에게 투영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화해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래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이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주에서 처음 태어났을 때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삶의 의미와 생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을 갖춰나갑니다. 나의 신성을 회복하고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진리를 찾는 영성을 가진 존재로서 명상수행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인 반면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장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아마 호스피스 의사로서 개개 환자를, 환자의 죽음을 보면서 든 의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조금 더 넓게 확장해서 우리 사회 전체를 보았을 때는 사회는 늘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승화하고 죽음을 예식화 해왔습니다. 인간사회는 앞 세대의 죽음을 전제로 후대에게 계승됩니다. 단적인 예로 제례문화가 있습니다. 장례와 제사 문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리는 가장 수준 높은 예식입니다. 자연계에서 생명은 죽음을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본성은 생명의 지속성이 있습니다. 그 지속을 위해서 생식을 하고 유전자를 전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나라는 존재의 한 여정을 끝내고 그 유산을, 역사와 문화의 영속성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리추얼이거든요. 사회 가정 국가 등 집단을 이루는 인간에게 죽음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걸 업業이라고 합니다. 대자연의 변화 위에서 나 한 사람이 역사적 존재로서 우뚝 서서 살아가면서 그 유업을 후손을 통해 전달하는 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선조와 후손의 관계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해마다 그것을 기리는 의식을 국가에서나 가정에서 치러왔습니다. 그러니까 제례문화는 굉장히 수준 높은 문화의식인 것이죠. 그래서 제사를 지내지 마라, 제사를 왜 하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말 저는 몰지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문화도 역사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성도 완전히 무너진 사람들이라는 비판적인 입장을 늘 취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와서 한 개인의 죽음문제로 돌아보면 가장 존엄하지 않는 죽음은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죽음일 겁니다. 죽음의 순간 누구도 곁에 없는 죽음 말이죠. 149p에

“나는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보다 더 성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에는 다음 기회가 없으니까. --(중략)-- 당신이 죽어가는 사람 곁에 있어줄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 짐덩어리나 장애물, 성가신 존재가 된 기분을 느껴선 안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을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 우리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호스피스 의사로서 자신은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합니다. 병원에서 일하시는 저희 누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분은 멀리 떨어진 자식이 찾아올 때까지 버티시다가 자식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돌아가시는 분도 있었다고 해요. 또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누님이 병원에서 쓴 시가 있는데 잠깐 낭독해 보겠습니다.


차가운 병실 가쁜 호흡소리

임종을 보시려면 지금 오셔야 합니다


죽으면 연락 주세요


어떻게 살았을까 떠나는 이는

어떻게 살았을까 보내는 이는


햇살 좋은 날 그녀는 떠났다

남겨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존엄하게 산다는 것>의 저자 게랄트 휘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죽음이 존엄하길 원한다면 먼저 삶의 존엄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나 클라우디아가 책 <죽음이 물었다>해서 전하고자 하는 요지를 잘 요약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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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주검>이라는 챕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몸은 멀쩡히 기능하는데도 '진짜로 살아있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정서적, 가정적, 사회적, 영적 측면에서 스스로 매장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죄책 감 없이 살거나 지레 겁을 먹고 타인과 신을 믿지 않거나 남을 용서하지도 않고 축복하지도 않는 산 주검인 채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표현합니다.

증산도 『道典』에 이런 성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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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잘 닦는 자는 그 정혼精魂이 굳게 뭉쳐서 죽어서 천상에 올라가 영원히 흩어지지 아니하나 도를 닦지 않는 자는 정혼이 흩어져서 연기와 같이 사라지느니라. "

[각주]를 보면 ‘몸이 늙어 죽으면 신神은 몸에서 이탈하여 신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인간이 죽어서 태어난 인격신은 살아서 도를 닦은 만큼 정기精氣가 뭉쳐있다. 즉 도를 잘 닦은 자는 정혼이 굳게 뭉쳐 죽어서 신명이 되어 천지와 더불어 영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정혼이 흩어져 연기와 같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의 나'에게도 결정적이란 의미입니다. 오늘 소개한 책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한 내용은 다루지 않고 있지만요. 『道典』의 말씀을 보면 육체의 죽음은 일차적인 것이고 진짜 죽음은 영혼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다루는 어떤 이야기도 절대 가벼울 수 없을 겁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살아온 삶 전체를 돌아봐야 하니까요. 책의 두께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죠. 이 책은 절대로 가볍지 않은 책이고, 또 첫 장을 시작하기가 무척 망설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순간부터 여러분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고, 지금 현재의 나를 훨씬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아나 클라우디아의 <죽음이 물었다>

저는 다음 영상에서는 낭독 영상으로 이 책을 한 번 더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오후의 책방]이었습니다. 유튜브도 구독, 좋아요 해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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