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밖보다는 안을 선호하는 편하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더더욱이나 집순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눈 뜨자마자 책상 앞에 앉는 재택근무 환경이 되어놓으니 - 사랑해마지않던 방이 점차 스트레스 가득한 업무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저녁 6시가 되어 노트북을 닫아도 뭔가 퇴근한 것 같지가 않은 찜찜함이 남는 것이다.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대폭 늘어난 요즘 같은 때, 집에서조차 번아웃을 겪지 않으려면
공간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활용하여 낮과 밤,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줘야 한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던 어느 초여름, 새단장을 결심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지면서 업무 시간 중에는 대체로 밝다. 그래도 6-7시 즈음 일을 마무리하고 밖을 보면 살짝이 어두워져 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얇은 흰색 커튼을 치는 것이다. 새로운 분위기를 내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그러면 일하는 중간중간 고개 들어봤던 바깥 풍경이 차단되면서 내 방으로 온전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는 낮은 조도의 조명을 켠다. 무조건 노란 계열의 할로겐. 형광등은 화상 회의할 때 외에는 쓰지 않는다는 주의다. (흰 불을 켜고 앉아있으면 치과 대기실에 온 것만 같다.) 불빛으로 분위기를 잡고 나면 향초를 켜거나 조금 오래된 향수를 낮게 뿌려 특정한 무드를 살포한다. [꿀팁] 여름에는 시트러스/우디 계열의 향초나 향수를 쓰면 레몬 나무가 가득한 숲 속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다.
집순이인 내게도 "땡기는" 장소들이 있다. 대체로 바(bar)가 그렇다. 위스키 병이 잔뜩 늘어선 나무 인테리어의 단골 바나, 시원한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야경이 최고의 안주인 이태원 칵테일바 등은 일주일에 몇 번을 가도 모자라다. 하지만 요즘은 그럴 수가 없으니 - 소소하게 내 방에서 술을 즐긴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술의 종류보다도 계속해서 손에 쥐고 눈으로 어루만질 술잔이다. [꿀팁] 자주 쓰지 않더라도 집에 묵직한 위스키 잔, 수려한 샴페인 잔, 우아한 와인잔 그리고 동그란 얼음 틀 정도를 구비해두는 것은 매우 추천하는 바이다.
조명과 향으로 분위기를 잡아둔 방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두고 샴페인을 마시며 책을 읽노라면 - 그 어떤 바도 부럽지 않다. 에어컨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플러스다.
완전히 모드를 바꾸고 싶은 날에는 옷을 갈아입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근무 시간이 끝나고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며 프로젝트 문서를 업데이트하고 이메일에 답장하기를 수없이 반복한 후에 마련한 장치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입은 옷에 따라 행동이 바뀌는 습관의 동물이다.
대학생 때부터 29CM 덕후라 "제대로 예쁜" 물건을 사고프면 이 사이트를 쓴다. 가운, 로브, 블랭킷 등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검색해보면 내 취향에 맞는 천 쪼가리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패턴이 화려할 필요도 없다. 수건 재질의 샤워가운만 사서 입어도 호캉스를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내 루틴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6시 30분, 흰 커튼을 치고 할로겐 등을 켠다. 향초를 켜고 샴페인 잔을 꺼내 소비뇽 블랑을 한 잔 따른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가운을 입은 뒤 책을 한 권 집고서 편하게 앉아 저녁을 즐긴다.
이 작은 의식을 치르면서 정신은 일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방 안에서 완벽하게 퇴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