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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Apr 12. 2017

단지 세상의 끝, 이 아니다

영화 [ 단지, 세상의 끝 ] _ 자비에 돌란, 2016




주인공의 이름은 루이, 그는 유명한 극작가이다.

게이이고, 어떤 병인지는 모르지만 죽을병에 걸렸다. 루이는 얼마 후,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 12년 만에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  



영화는 루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전에, 노래 한 곡이 먼저 깔린다.

Camille 의 'Home Is Where It Hurts' 라는 노래이다. 집은 마음을 다치게 하는 곳이라니!


My home has no door
나의 집은 문이 없어

My home has no roof
나의 집은 지붕이 없어

My home has no windows
나의 집은 창문이 없어

It ain’t water proof
물이 다 새고 말 거야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집은 온전하지 못하고, 흔히 생각하는 화목하고 따뜻한 집의 관념을 뒤집는다.

'문과 지붕과 창문이 없는 집'은 외부로부터 가족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집 자체도 얼마 가지 않아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자비에 돌란 감독은 영화를 구상하면서, 이보다 적확한 노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의 불완전함은 어딘가 균열이 나고, 상호 간의 균형이 깨진 가족을 그려내기에 충분한 상징이 되니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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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행기 안의 루이다. 루이는 첫 독백부터 매우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누구나에겐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덧붙인다.

12년 간 남처럼 지냈던 시간을 모두 뒤로 하고, 자신의 죽음을 알리러 가는 이 귀가길이 자신에게는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전개 방향을 모르는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그는 영화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 하나를 던진다.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루이는 스스로 본인의 힘과 의도대로 '가족과의 재회와 그 이후의 상황',


즉, 아주 오랜만의 방문 상황을 이끌고 조절하는 역할을 일종의 환상이라고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그 환상이 가족들에 의해 깨질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시한부 판정'을 알리기 위해 밑도 끝도 없이 12년 만에 가족을 찾는 상황을 연출해 낸

자신이 '재회를 주도하지 않고', '재회에 자신을 맡기는 꼴, 가족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상황'을 자처하겠다고 말한 것이 된다.


그의 환상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루이

.

.

그는 아침 일찍 그의 고향에 도착했음에도, 공항에서 간식 먹기, 신문 보기 등 소일거리로 시간을 때우다가

넉넉히 정오가 가까워질 쯤에야 집에 도착한다. 선뜻, 반갑게 집에 들어서기엔 익숙치 않은 모습이다. 당연하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담담해 보이기도 하고 두려움이 얼핏 비치기도 한다. 꼭 두려움을 담담함으로 위장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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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선 루이의 엄마(이름 밝히지 않음, 나탈리 베이 역), 형 앙투안, 형수 카트린, 동생 수잔이 기다리고 있다.


새 가족이 된 형수 카트린은 루이를 실제로 처음 보는 것이고,

평소에 안하던 화장까지 하고 옷도 예쁘게 차려입은 동생 수잔은 오빠를 성인이 되어서 처음 보는 것이다.


누구나 다 마음 속으로는 그랬겠지만, 특히나 수잔은 오빠를 아주아주 많이 기다려 왔다. 그녀는 은밀하게 오빠 루이를 동경해왔다.


수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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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구성은 비교적 단조롭다. 영화의 대부분은 한정된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루이가 카트린, 수잔, 어머니, 앙투안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 시간을 가지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식이다.


어머니


이 프랑스 가족은 한국의 관례와 시선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되어지지도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 간의 처절한 희생과 양보, 부모형제 간의 의무와 도리, 미덕 같은 것, 평생 용서받지 못할 잘못과 깊은 회한 같은 것이 이 가족에겐 비춰지지 않는다. 한국의 가족에겐 그러한 것들이 너무 흔하지 않던가!


루이는 시종 가족의 유대감을 의심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두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듯한 가족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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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새로운 가족 구성원인 카트린이 무거운 공기를 깨기 위해 루이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건다. 형 앙투안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채, 어딘지 모르게 계속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뿔을 세우고 있다.

카트린


카트린은 자신의 첫째의 이름을 '루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준다. 그녀의 집안에는 후세대 아이들의 이름을 집안의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따라 짓는 전통이 있는데, 자신은 자식의 이름을 '루이'라고 짓고 싶었다고. 남편의 이름인 '앙투안'은 어딘가 촌스럽고 이상해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카트린은 루이에게 떨어져 있었지만, 결코 '떨어져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카트린의 말은 앙투안의 불편한 심기를 더욱 돋운다.


앙투안


루이의 형 앙투안은 루이를 가장 반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에게 루이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루이에게 크나 큰 자격지심이 있어 보인다. 그 자격지심은 어느 정도 미움으로 번지는 듯하다. 그는 늘 동생과 견주어 후순위에 밀려났다. 또한 그는 자신이 루이보다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뒤떨어지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동생은 천부적인 예술 감각으로 대중을 매혹하는 작가가 될 때, 자신은 아주 조그만 마을에 목수가 되었다. 자신은 루이에 비해 특출난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12년 간 외따로 지냈지만, 루이의 존재감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의 존재감은 유명 작가로서 더욱 커지고, 부인 카트린이나, 동생 수잔에게 더욱 이상화되어갈 뿐이다. 엄마 역시도, 겉보기에는 집을 떠난 루이에게 어떠한 악감정도 가지지 않고, 내밀하게 자랑스러움을 키워가는 듯 보인다.


루이가 현관에 발을 내밀 때, 앙투안만 빼고 세 여인의 입가엔 자랑스러움과 반가움으로 미소가 번지지 않았던가!


금의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견하고, 타지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주어서 고맙고(?), 자랑스러운 것은 분명히 맞다.


앙투안은 그들의 처사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12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주기적으로 달랑 엽서로 안부와 얄팍한 생존 신고만 전해오던 루이가 아니던가! 괘씸하고 얄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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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루이! 그는 왜 집을 떠나야만 했는가?

영화에서 그 이유는 소상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루이의 말을 통해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저들은 잘못을 잊었거나, 나를 용서하지 못하거나"라고 밝히는 대목이다.


잘못과 용서? 가족들은 루이에게 잘못했을 수도 있고, 루이를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철저하고 전형적이게, 자신을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이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추측컨대, 루이의 가족들은 스스로 루이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루이의 오랜 방황과 가출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루이는 '혼자' 피해망상에 젖어 '혼자' 가족들을 떠났다. 마치, 가족에겐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다.


루이의 성적 지향은 '게이'이다.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마도 그의 성적 지향이 루이의 마음 속에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을지. 내부의 소용돌이를 휘몰아 결국 집 바깥으로 그를 내몰게 하진 않았을지.


가족이라고 해서 의례적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사회 제도, 관습 같은 것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루이의 숨통을 점점 조여왔을 수도 있다. 그 아무리 프랑스여도 말이다!


또한 하나 더 짐작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살던 예전 집에서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옛사랑' 때문이다.

루이는 같은 마을의 누군가를 사랑했다. 물론 남자다. 그와의 사랑과 가족 사이의 형언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다. (후에, 그는 앙투안으로부터 얼마 전, 루이의 옛사랑이 죽었다고 전해 듣는다.)


아무 것도 확실치는 않다. 루이는 가족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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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가 왜 떠났는지' 또렷하게 밝히지 않는 이 영화는

'루이가 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또렷이 밝힌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이지만, 그는 향수가 일었다고 했다.



가족과의 식사에서 그는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옛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겠지만, 그 자리에 가서, 자신의 유년이 머물렀던 그 집이 어떻게 변했을지 보고 싶다고 했다. 일종의 향수 같은 그런 마음이 그냥 일었다고 했다.


어쩌면 이 루이의 말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부수적인 것일 수 있다.

옛집, 옛터, 즉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가족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부수적이라고 해서, 가족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니, 그 결과로 지금의 시간이 있으니, 루이에게 가족은 분명 소중한 존재가 맞다. 얼핏 그리움이 밴.


이 미약한 그리움은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참 너무 하지 않는가!


가족들은 하나 같이 그에게 '왜 돌아 왔냐'고 묻는다.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어 설풋 웃음으로 답례하는 루이는 꼭 꺼져 가는 불씨 같다.

마지막 몸짓으로 불을 피워 올리는 작은 불씨.


루이와 가족은 남은 불씨처럼 미약하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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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결고리는 루이와 어머니의 대화에서 '명중 되듯이' 확인된다.


어머니 : "난 널 이해 못 해, 그러나 널 사랑해. 그 마음만은 누구도 못 뺏어가."

우리는 루이의 어머니의 말에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빼앗음'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뱉어진 말이란 것도 명심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중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많다.

이해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누군가가 '빼앗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냐 했을 때, 우리는 투항해야 한다.


더불어 '빼앗지 못하는' 사랑이 가족, 즉 혈육 속에서 존재 가능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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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시계에서 뻐꾸기가 두 번 튀어 나왔다.

낯설고 묘한 공기가 흐르는 집안에 뻐꾸기의 울음 소리는 무척이나 요란하게 들린다.

시계 속에서 뻐꾸기새 한 마리가 나와 매시를 알린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공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12년 만에 돌아온 루이는, 가족들에게 미처 자신의 시한부 선고의 운을 떼지 못한다.


깜깜 무소식으로 지내다가, 단지 가족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싶었었는데,

자신의 비극적인 소식도 꽤나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루이는 망설인다. 주저한다.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이제는 더욱, 자주,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동생 수잔에게는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한다. 그 일상적인 말에, 모든 비극이 묻혔다.


그리고 카트린으로부터 와인 한 잔을 건네 받는데, 잔의 발목에는 작은 파랑새 잔 악세서리가 걸려 있다.


그는 처음 본 루이의 모습에서 를 발견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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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새.


카트린이 루이에게 와인에 걸어 건넨 새는, 복선이었다.


새는 단지 세상의 끝의 엔딩에 한 번 더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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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의 해가 집안의 구석까지 들어, 모두의 얼굴이 볕으로 가득 달아올랐다.

그 중에 유독 열이 달아오른 이가 있다. 형 앙투안이다.

앙투안은 벌겋게 달아올라 루이를 애써 되돌려 보내려 한다. 루이의 존재와 행동을 더 이상 마땅히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수잔, 카트린은 모두 루이에게 더 머물다 가라고 말하지만, 앙투안은 묵언으로 그에게 돌아갈 것을

그리고 다시는 찾아 오지 말 것을 강요한다. 마침 루이도 '떠나려던' 참이었다.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족들은 루이의 등을 떠미는 앙투안에게 원성을 보낸다. 앙투안은 그만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루이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불끈 쥔다.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고작 3시간 뿐이었는데.


망연자실한 결과에 가족 모두 자리를 뜨자, 현관 앞에 루이만 혼자 남게 된다.


그때다, 다시 정각을 알리는 뻐꾸기가 운다. 뻐꾸기의 울음은 루이의 등 뒤로 처절하고, 요란하게 울린다.

울음이 절정에 다다를 때쯤, 뻐꾸기가 참새가 되어 튀어 나온다. 그리고 날개를 퍼덕거리며 온 집안을 배회한다.

루이의 머리칼을 훑고 쌩 날아가기도 한다.


몇 번이나 가로막힌 사방, 단절된 벽에 부딪힌 참새는 루이의 앞으로 와 벌러덩 배를 까고 죽어 간다.


루이는 새를 보며, 앞으로 자신의 행보를 확실히 안 듯하다.


그는 아침에 도착했을 때처럼 모자를 푹 눌러 쓴다.

석양이 뜨겁다. 굵은 땀줄기가 목을 타고 흘러 내린다. 루이가 집을 나서고, 여전히 참새는 가쁜 숨을 쉰다.


참새의 세상은 곧 끝나간다.

환상이 깨질 것이라는 루이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런데, 그가 쓸쓸히 집을 떠났어도, 어딘지 모르게 이게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지.


엔딩이 너무 처절하고 아름다워서일까!



루이는 가족과의 만남을 세상의 끝,
마치 종말처럼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을 삭이기 위해, '이것은, 단지, 세상의 끝, 이 아니다'라고 되뇌었다.

'끝'을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은 루이일까, 가족일까.
무엇보다 왜 그들은 가족이란 자격으로 '끝'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일까.

'가족'이란 것이 달콤하지 않고, 얼마간은 참 아프다.


자유, 가족, 속박, 미움, 사랑, 가족, 자유
그리고 다시 가족을 곰곰이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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