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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폭우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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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바로 야에코가 행복해질지도 모르는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를 기다리는 나날이 실제로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점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앞날을 예측할 만큼은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나날은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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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란 소름 돋는다는 뜻이 무언지도 모를 만큼 하찮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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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나는 열차 시간에 늦지 않았는지 물었다. 야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열차라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어쩌면 행선지조차 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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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어떤 일이라도 해치울 것 같았다. 마음 먹은 일을 금방이라도 실행에 옮길 것 같은 위험한 힘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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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간에 서서 발가벗었다.
순간, 등골에 오한이 느껴지면서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그대로 목욕탕으로 뛰어들어가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덥혔다. 태풍이 사라진 하늘에는 만월이 떠 있었다. 더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에코가 마을을 떠난 지금 딱히 생각해야 할 일도 없었다. 나중에는 전신의 힘이 다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영혼이 달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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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 하고 법사는 중얼거린다.
바람 소리가 마치 칼을 휘두를 때의 신음 같은 소리를 낸다. 초원을 헤쳐 가며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잘 있어"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그는 '어제'와 헤어져간다. 아마 날이 밝기 전에 바람과 풀, 달빛밖에 없는 황야를 가로지를 것이다.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는 분명 유랑을 그만두고 싶다. 그래서 사과밭 골짜기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비파와 승복을 태워버리고, 숨 쉬는 횟수를 반으로 줄이고, 여생을 사과나무에 맡길 작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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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끝장이다.
내 모든 것이 종말로 치닫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든다. 이미 아주 오래, 몇백 년이나 산 것 같다. 아직 가정을 가진 적조차 없으면서 모든 일을 와수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야에코와의 3년……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변화는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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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야에코는 마을을 떠났다.
집과 무덤, 논밭과 사과밭을 남겨둔 채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가버렸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한 일이란 시내 기차역까지 태워다 준 것, 약간의 전별금을 건네준 것, 단 두 가지다. 사정을 물으려 하지 않았고, 이별의 말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내쫓은 셈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는 그 소중한 3년을 지켜내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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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에서 또 사슴이 울기 시작한다.
몹시 춥다. 서리 내리는 밤의 추위다. 내일은 하루 종일 떨어진 사과를 주워 모아야 하지만 출하할 만한 물건은 못된다. 그렇다고 잼 공장에 싸게 팔아치우지는 않겠다. 사과주를 밀조하리라. 남으면 통째로 소금에 절여두어야지. 아니다. 올해는 모두 술로 만들어버리자. 봄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고, 마시면서 취한 채로 지낸다 해도 나쁘지 않겠다. 잠들기 위해 마시고, 마시기 위해 잠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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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 가슴속에는 약 천 일 동안 야에코와 보낸 추억이 남아 있다. 또 백 그루가 넘는 사과나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나는 내일부터도 그 둘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 길뿐이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확실하게 죽어간다. 야에코의 인생은 드디어 시작되었지만, 내 인생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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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인다.
창 너머 달이 보인다. 달은 파랗지도 빨갛지도 않은 현묘한 빛을 온 마을에 뿌리고 있다. 사슴 울음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바람에 떨어진 사과를 먹으러 이쪽으로 내려오는 것이겠지. 실컷 먹어라. 전부 먹어치워도 상관없다. 나는 야에코네 사과를 먹을 테니까. 갑자기 달의 형태가 일그러지면서 빛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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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얄팍한 늑골과 마른 살에 덮인 빈약한 가슴 속에서는 풍요로운 선율과 끝없는 낱말이 끓어올라, 파도처럼 바람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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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오늘 결국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론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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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처럼 밤 한가운데에 있다.
어젯밤처럼 심장을 위쪽으로 하고 드러누워 얼굴은 병풍을 향하고 있다. 눈은 반쯤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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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와들이 결혼도 못했다는 불행 따위는 그 멋진 죽음으로 충분히 말소되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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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비정상이다.
나 스스로도 인정한다. 남들은 줄곧 독신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상한 게 아닐까? 10년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한층 더 나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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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오랜 나무일수록 위험하다는 사실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 겨울에도 또 몇 명인가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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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전반기'는 끝나 있었다. 과연 내가 42년이라는 세월을 헤쳐온 사내일까? 확실한 증거라도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