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 쓺, [문학과 사회 2017 봄] 중에서
우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대한 설명을 보자.
알튀세르 (Althusser)는 이 단어를 억압적 국가기구와 대립시켜서 사용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생산조건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노동력의 재생산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말은 일할 수 있는 육체들, 즉 건강하고 맡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지녔으며 무엇보다 규율에 복종할 줄 아는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는 뜻이다.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보장한다는 말은 자본가가 이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뜻이다.
이런 과제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국가는 경찰, 법정, 감옥, 군대 같은 억압적 수단에 의지할 수도 있고,
교회, 가족, 학교, 정당, 조합, 미디어와 문화산업같이, 주체들을 길들이고 가르쳐서 체제의 유지에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에 의지할 수도 있다.
전자가 '억압적 국가기구'이고 후자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다. 둘은 다음의 심층적인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
"억압적 국가기구가 폭력을 통해 작동한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한다."
주의할 점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지배계급에 완벽하게 장악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알튀세르가 꼽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은 사회학에서 흔히 '사회화 기관'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사회화 기관'대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말을 씀으로써 알튀세르는 사회화가 결코 계급 중립적인 과정이 아님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사회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계급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물론 지배계급은 그렇게 하려고 투쟁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는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우리가 아는 한, 어떤 계급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기구들 안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않고는 국가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지배계급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피지배계급의 편에서도 저항과 전복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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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개인을 고유한 정체성을 갖는 주체로 호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호명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또 하나의 주체, 즉 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 호명된 사람은 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예시)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말한다. 여기 네가 있다. 너는 피에르다! 여기 너의 기원이 있다. 너는 서기 1920년에 태어나긴 했지만 영원한 신에 의해 창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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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선 다른 사람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본다.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
알튀세르는 주체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효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체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러한 선택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선택 이전에 먼저 주체여야 하는데, 주체가 되는 과정은 특정한 정체성을 갖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관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