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쓺, [창작과 비평 2017 봄 호] 중에서
대한민국호가 비틀대면서도 침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복원력을 우리는 세월호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구명조끼가 모자라자 "내 거 입어"하고 벗어주기도 했다.
물이 들어오는 화급한 순간에도 다섯살짜리 꼬마가 있는 것을 보고 "애부터 애부터" 해서 먼저 내보낸 것이 우리 아이들이었다.
선장이 도망친 마당에 "선원은 맨 마지막이야, 너희들 구하고 난 맨 나중에 나갈게"라는 의연한 태도를 보인 스물두살 박지영은 매점에서 물건 파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오백명 가까운 승객 중 선생님이 15명이었으니 비율로 따지면 3퍼센트쯤 된다. 그런데 아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홉분 중 두분이 선생님이다. 왜 선생님들이 탑승자로는 3퍼센트이지만 미수습자에서는 22퍼센트나 될까. 아이들을 찾아 제일 깊이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좋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 세월호사건이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복원력밖에 없다. 촛불이 바로 대한민국호의 복원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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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 보낸 하루가 내일의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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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 : 광장만 있고 민주주의는 없는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여의도에 5・16광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무려 12만평. 넓이로 치면 세계 최대의 광장이었다. 1971년 준공된 그곳에서는 우리가 지금 '광장'이라는 말을 쓸 때 가득 담겨 있는 민주주의와 소통이라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군중을 동원하여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따위의 구호를 외쳐대고 군사퍼레이드나 하는 곳이었다. 유신시대에 국가의 광장은 있었지만 시민의 광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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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이전 우리에게는 광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시청 앞 광장이나 인천역 앞 광장이나 광장이라는 공간은 있어도 지금 같은 의미의 광장 집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6월 항쟁 이전 80년대의 가두투쟁에 일반 시민이 참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가두시위의 시간과 집결장소는 학생운동조직이나 재야단체의 열성 성원들에게만 "6시 53분 종로3가 세운상가 앞" 하는 식으로 은밀히 전달되었다.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주동자가 구호를 외치면 갑자기 차도로 달려들어가 구호 몇 번 따라 외쳤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은 이런 시위방식을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너무도 폭력적인 전두환정권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짱돌을 날리진 못한다 해도,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어떻게든 표하고 싶어했다. 당시의 운동진영은 시민들의 이런 마음을 잘 포착했다. 박종철의 추도식이 열린 2월 9일 운동진영은 화염병과 짱돌 대신 검은 리본을 달고 추모묵념을 드리자고 제안했다.
정해진 시간, 놀랍게도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묵념을 올렸고 길거리의 차들도 길게 경적을 울리며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많았구나를 새삼스럽게 느끼며 사람들의 분노는 마음 속에서 더욱 단단해져갔다.
6월 항쟁. 사람들은 다른 여러 구호를 놔두고 오로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만을 외쳤다.
6월 항쟁은 한국사회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체제를 벗어나 민주화라는 거역할 수 없는 길로 방향을 돌리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절반의 승리였다. 민주진영의 어느 누구도 직선제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독재세력에 패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정말 지면 안되는 싸움에서 져버렸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직후 친일파를 청산하자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이 친일파에게 거꾸로 청산당한 이래 수구세력으로서는 두번째의 성공적인 엑소더스였다.
수구진영은 정권을 간신히 유지했고 의회에서도 제1당 자리를 지켰지만,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군사독재세력은 김영삼, 김종필 세력과 야합하여 3당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을 실시했다. 6월 항쟁 직후 영남과 호남으로 분리되었던 민주화운동진영은 이제 돌이킬 숭 벗는 대립관계에 빠져들었다. 영남지역에 기반을 둔 민주화운동세력 대부분이 김영삼을 따라 군사독재세력과 손을 잡을 만큼 급격히 보수화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에는 7,8,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것이 크게 작용했다.
6월 항쟁에 뒤이어 갑자기 7,8,9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 노동조합이 일 년 사이에 천 수백개가 결성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