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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Jul 12. 2021

콩국수의 잠든기억

날이 더워지는 이맘때면 어머니는 콩물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콩은 창고 한편에 어둡고 바람이 제일 잘 통하는 곳 하얀 포대에 한가득 담겨 있다. 간혹 두부를 만드시느냐고 콩 자루를 풀어놓으셨지만, 집에 있는 콩 자루의 목적은 여름내 먹는 콩물 재료이다. 하얀 콩을 물에 불려 여러 번 물에 헹 궤 껍데기와 불순물을 거두어 낸다. 큰 들통에 넣고 한참을 끓인 후에 믹서기에 콩을 갈아 하얀 면포에 걸러 고운 콩물을 만드셨다. 한 번에 많이 만드시지 않았다. 손이 탄 콩물은 냉장고에 얌전히 보관해도 금방 변하기 때문에 페트병으로 2개 정도만 만들어 냉장고에 담아 두셨다. 



콩물은 한여름에 식구들이 좋아하는 식재료다. 입맛이 없을 때면 어머니는 국수를 금방 삶아 채반에 물기를 빼고 그릇에 담아주면 우린 냉장고에서 콩물을 한가득 담아 소금 조금 넣고 국물부터 후루룩 마시고 국수를 게 눈 감추듯 비웠다. 어머니가 콩물을 만드신 이유는 식구들의 건강을 위해서였다. 특히 약주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삼복이 끝나가는 8월 말까지 냉장고엔 콩물이 끊기질 않았다. 전날 술을 많이 드셔 그냥 나가시는 아침에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 억지로 한잔은 꼭 드시게 했다. 일년내내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경동시장에 가서 한약재를 사다 어머니만의 레시피로 갈색 물을 만들어 일 년 내내 드시게 했다. 

아무튼, 아버지 덕에 우리도 여름내 시원하고 고소한 콩물을 먹어 여름이 지나도 까무잡잡한 아이들과 다르게 허여멀건한 얼굴을 유지했을는지도 모른다. 여름에 본가에 가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냉장고엔 콩물이 한두 병 놓여있었다.

“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금방 쉬는데 또 만드셨네요”

“네가 온다고 해서 어제 만들어 둔 거다. 오늘 한 잔 먹고 갈 때 한 병 가져가라”

하시곤 머그잔에 한가득 콩물을 담아주신다. 어머니가 따라주신 콩물은 진하고 맑다. 취직하고 직장 동료들과 콩국수 집에 가 콩국수를 처음 시켜 먹고 난 깜짝 놀랐다. 내가 평소에 먹던 맑은 콩물이 아니라 걸쭉한 콩물에 굵은 면이 수북이 담긴 콩국수를 먹은 것이다. 그리곤 지금까지 한 번도 맑은 콩물로 담아주는 콩국수 집을 못 가봤다. 집에 돌아오면 냉장고에 덩그러니 놓인 콩물을 보면 아버지 생각도 나고 어머니의 정성이 아쉬워 변하기 전에 먹으려고 노력한다. 국수도 삶아 먹고 이른 아침에 비타민 챙기듯 냉장고를 열어 담백한 콩물을 먹곤 했다.     




오늘은 콩물이 생각나도록 더운 날이었다. 직원들은 날이 갑자기 더워졌다고 아이스아메리카노며 새로 입점한 공차 음료를 한 잔씩 먹으며 더위를 달래지만 나는 어머니가 이맘때 만들어주시는 콩물이 생각났다. 맑고 고소한 콩물에 소금 한 꼬집 넣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고소한 시원한 콩물 한잔이 말이다. 날도 더운데 어지럽고 복잡하고 서로 엉켜 사는 세상에 하얗고 담백한 콩물에 소금 몇 알갱이만 들어가고 생기가 돌아 고소해지는 콩물처럼 세상도 담백하고 하얗고 순수하게 감칠맛이 돌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엉뚱한 상상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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