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에 맥주한잔
멸치는 집에서 두루두루 쓰이는 음식 재료다. 우리 집에선 멸치로 볶음을 제일 많이 만든다. 멸치 대가리를 따고 배를 손톱으로 갈라 똥을 빼내고 바람드는 햇볕에 하루 정도 말린다. 잘 마른 북어 대가리 마냥 빳빳해지면 먼저 닳 달궈진 팬에 한 번 볶아 비린맛을 빼준다. 다음에 간장이나 고추장을 넣고 물엿 조금, 마늘도 넣어주고 견과류에 알싸한 청양고추 얇게 썰어 달달 볶아주면 갓 지은 밥, 찬밥에도 어울리고 물 말은 밥에는 찰떡궁합인 반찬이 된다. 입맛이 없거나 바쁜 아침에도 옹색하지만 한 그릇 뚝딱 먹고 나설 수 있다.
멸치볶음에 대해 추억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도시락이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반찬과 밥을 따로 들고 가는게 싫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책가방에, 유리병에 김치를 담거나, 스테인리스 통에 찬을 넣으면 가방도 무거워지고 만원 버스에 큼큼한 김치 냄새로 행여 좋아하는 여학생이가방이라도 들어 줄까봐 잘 여며지는 플라스틱 통에 밥과 짭짤한 멸치볶음만 단출하게 싸서 다녔다. 식은 밥에 짭조름한 멸치볶음은 밥을 많이 먹게 하는 밥도둑이었다. 아버지도 멸치를 좋아하셨다. 웬만하면 마른 멸치와 고추장이 밥상에 자주 올라왔다. 아버지가 좋아하니 어려서부터 우리 집 식구는 의례 밥반찬인 줄 알고 먹었다. 고추장 멸치를 먹을 때는 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후루룩 싱거운 밥과 함께 먹는 고추장 찍은 멸치는 다른 반찬 없이 금방 상에서 동이 났다. 난 새우깡을 기본 안주로 주는 투다리를 좋아했지만,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혼자 살때 밥 먹기 싫을면 집 앞 호프집을 찾아갔다. 이유는 고추장과 함께 주는 생멸치를 서비스로 내주었다. 우리 집 말곤 어디를 가도 밥반찬으로 나온 생멸치를 구경도 못 했는데 동네 호프집에서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500cc 맥주에 대가리 띠고 손톱으로 내장을 뺀 멸치는 막걸리에 왕소금 한 꼬집 집어먹는 맛만큼 맛깔스럽고 중독성이 강하다. 고추장 찍은 멸치의 짠맛에 맥주를 쉴 새 없이 찾게 되고 짠맛이 베인 입에 맥주가 한 모금 들어가면 입속은 짠 기가 가시면서 달콤한 맛이 난다. 그래서 멸치 안주로 술을 먹으면 금방 취한다. 맥주 몇 잔 먹고 집에 오는 길 손톱엔 발리면서 밴 비릿비릿한 멸치 냄새에 집 생각이나 안부 전화를 하곤 했으니 멸치가 효자 노릇도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여름엔 멸치에 꽈리고추 넣고 볶아도 맛있다. 간장을 자작하게 붓고 멸치를 조려내면 어머니는 선풍기 앞으로 가서 연신 휘저으셨다. 찬바람으로 빨리 식혀야 꽈리고추 빛깔이 안 변해 보기에도 좋다고 하셨다. 기억나는 멸치 요리는 이거 말고도 많다. 국을 끓일 때도 한 움큼, 찌개 끓일 때도 한 움큼, 국수를 할 때도 한 움큼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생멸치, 볶은 멸치, 삭힌 멸치까지 유용하게 요리 재료로 쓰인다. 생김새로 나뉘면 국물 내는 대멸치, 찍어 먹고 중멸치, 볶아먹는 잔멸치 크기로도 요리는 가지각색이다.
많이 찾고 쉽게 손이 가지게 고마움을 모르고 쉽게 생각한다. 갑자기 찾을 때 없으면 당혹스러우면서 말이다. 멸치가 빠진 국물은 화학조미료가 그 맛을 대신 해주지 않으면 뭔가 심심하고 빠진 맛이 들어 자꾸 양념만 하게 되고 나중엔 음식은 본연의 맛보단 양념 맛에 재료의 풍미가 감춰져 버린다. 그만큼 음식에 있어 멸치의 존재는 대단하다. 요즘 세상인심은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 식이다. 내가 조금만 일해도 돋보여야 하고 아쉬운 소리해야 하고 최소의 노력으로 나의 능력이 드러나야 한다. 묵묵히 성실히 일하고 조용히 빠지면 인정을 못 받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배우가 아니어서 묵묵한 건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는 단점이 있다. 오래 버텨야 하니 조바심도 버려야 하고 간간이 존재감도 드러내야 하니 웬만한 처세술의 대가가 아닌 이상 힘들다. 하지만 어느 음식에나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들어가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재주를 가진 멸치처럼 지내보자. 냉동실 검은 봉지에 둘둘 말려져 있지만 입맛이 없을 때 밥상의 밥도둑인 멸치볶음이 돼 듯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인심이 아무리 변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세상엔 공짜가 없고 손해 보는 인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