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해력과 수업 이해를 위하여; 한국인으로서 한국인 이해하기
그날의 온도, 습도, 그날의 음악, 그 분위기... 하나도 잊지 않고 있어.
제목은 경작이니 뭐니 거창하게 했으면서, 무슨 로맨스 소설의 대사를 늘어놓는지 이상하다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하지만 간지러운 저 대사는 굉장히 중요한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뇌의 기억 방식에 대한 비밀을 말이죠.
길을 가다가 지나간 유행가의 선율, 봄비 내리기 직전의 흙냄새, 새파란 가을하늘 아래 거의 다 잎을 떨군 은행나무 밑에서 잠깐 들썩이는 외투, 첫서리 무렵의 새벽 코끝으로 느껴지는 냉기... 이런 것들은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재현해 냅니다. 이 작은 현상들이 뇌 속의 잠자고 있던 뉴런들을 깨우는 트리거 역할을 한 셈이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기억은 같은 환경이나 분위기, 잘 아는 맥락 속에서 더 잘 활성화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제가 쓴 간지러운 대사는 첫사랑이나 첫 이별이 특정한 상황에서 강렬하게 환기되는 이유를 잘 열거하고 있죠. 심하게는 그때의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시간이 무색하게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극도로 생생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활용할 수는 없을까요? 기억법처럼 말이죠.
굉장히 멋없는 제안이기는 하지만, 이점이 정말 많은 방법입니다.
특히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에게 말이죠.
그리고 성인으로서 사회생활 속에서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는 데,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사고를 하는 데, 물론 독서력을 발전시키는 데도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한민족'이라는 말은 오해되기 쉬운 단어입니다. 이 단어 뒤에 '혈통', 'dna', 이런 말들이 붙는 것을 저도 끔찍하게 싫어하죠. 왜냐하면 그 저변에 깔린 맥락과 사건사고들이 뒤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족성'이라는 말을 마냥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히 이 땅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순간, 쌍둥이처럼 떨어져 있어도 비슷한 취향, '상식'이라고 인정받는 범위 등등을 생각하면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민족성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핏줄로 이어져온 것만은 아닙니다. 핏줄과 혼동이 될 만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비슷한 환경과 문화, 그리고 교과과정 및 사회규범 등을 통해 정립된 것이죠. 그리고 환경과 문화라는 것은 적어도 몇 백 년의 발효 과정이 필요합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의 민족성이란 대부분 조선시대로부터 쌓여온 것입니다. 주요 산업으로는 집단적인 농사가, 도덕 및 사상적으로는 유교가 주류였던 그런 사회 말이죠.
하지만 조선이 망한 지도 100년이 훌쩍 지난 데다 우리는 전례 없이 빠르게 성장한 자본주의 사회를 겪은 나라이기에 이 '민족성'이 더 이상 통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더구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인터넷 환경이 주류가 된 지금은 '동질성'이라는 것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단, 10년 전만 해도 시청률 60%의 드라마가 있었고, 100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있었으며, '국민'자가 붙은 대스타가 여럿 있었으며, <무한도전>이나 <개그콘서트> 같은 오락물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같은 유행어와 문화를 이해했지만, 텔레비전을 전혀 안 보는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도 그것을 문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밈(meme)이나 어떤 제스처, 이미지가 이슈가 될 때마다 '옛날사람'으로서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 흔한 디씨인사이드나 어떤 커뮤니티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저는 어떤 것이 어떤 의미로 문제가 되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죠. 마치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f**k'이라는 단어나 행동을 아무 의도 없이 무심코 하거나 내뱉는 것처럼,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저처럼 "옛날사람"은 인터넷이나 포털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알고리즘이라는 것도 여러 발전된 기능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세대에게는 자신이 보는 세계가 주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알고리즘 환경이 무서운 것은 취향 편중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자신이 보고, 듣고, 활동하는 환경이 남에게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밈이나 행동을 몰랐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직은 문화나 교과과정에서 '민족성'의 맥락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틀은 아직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그리고 일하면서 일머리를 키우는 데 크고 작은 힘이 됩니다.
민족적 맥락을 잘 알 때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교과 공부인데, 역사는 물론이고 국어, 사회, 지리, 정치 등등에서의 '민족적 맥락'이란 곧 '그날의 온도, 습도'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겠지만, 우리 교과과정에서 '민족적 맥락'이라 할 만한 주제들은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만일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면 국어에서는 어휘와 관용구 등을 외우고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적 계급 등을 외워야 할 겁니다. 사회나 역사에서는 사건과 배경과 결과와 그 흐름까지 일일이 외워야겠죠.
하지만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만일 한국역사에 대해 문외한인 외국인이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는 마치 아일랜드 굶주림(대기근) 사건을 모르면서 <Danny Boy>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외국인은 문화를 향유하지 않으면 그만이니 상관없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교과과정을 계속 고통스럽게 공부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면 어떨까요?
https://youtu.be/FKWLiC1Y_tA?si=GSFcpn_uIQOk8b2o
수학의 길에 왕도는 없다는 말은 있지만, 제 생각에 한국인으로서의 맥락이 바탕이 되는, 혹은 한국인의 바탕을 만드는 교과과정에 도움이 되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소설 <토지>를 읽는 것입니다. 물론 교과 과정 중에서 이 책의 일부를 읽기는 하겠지만 공부로서 말고 독서로서 <토지>를 중2나 중3쯤의 시기에 읽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토지>가 '그 시기의 온도, 습도, 향기, 음식, 음악, 스타, 유행어 등등'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시대가 바탕인 과목과 과정을 공부할 때마다 첫사랑처럼 그날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떠올라 뇌의 해마를 잔뜩 자극할 것입니다.
혹시 속았다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네요.
중학생이 <토지>를 읽을 수 있다면 국어 공부는 걱정도 안 하겠다거나, 독서력의 단계에서 가장 상위 단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웬 왕도냐고 말이죠. 맞는 말씀입니다. <토지>는 현재 전권 20권으로 나와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20년 이상 쓰셨고 등장인물도 700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자체로 시작하기 겁나는 책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뒤로 갈수록 그 사상과 현실에 대한 분석이 도도하게 넘쳐흘러 활자를 따라가는데 힘에 부치기도 하죠.
그래서 박경리 선생의 생시에 허락을 얻어 <토지>의 청소년 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절판되기는 했지만 동화 버전으로도 나온 일이 있었네요. 이렇게 다양한 버전이 있으니 우선은 겁내지 말고 시도해 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날의 '분위기' 혹은 한국인의 원형과 우리말의 다양함과 쓰임새를 맛보는 데는 1부로도 충분합니다.
전권을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하고 재미있고 쉬운 부분이죠.
완벽한 여인 '서희'의 핍박, 출생의 비밀, 음모 등등이 재미 요소가 충분한 데다, 그 배경도 조선 말기 우리나라 농촌이기에 지명이나 문화가 비교적 낯익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우리 사회를 이루었던 각 계층의 인물들이 바로 옆집에 있는 듯 살아있어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큽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며, 이분들의 하루하루가 우리의 문화 자체이니,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분위기'를 익히거나 관련 공부를 하는데 아주 좋은 맥락 이해가 되는 것이죠.
1부는 서희와 마을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가기 전까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부 4권인데, 원래 소설로 읽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이 어려운 분들은 청소년 버전으로라도 읽기를 권합니다. 읽는 동안 우리말 어휘를 엄청나게 캐내면서도 올바른 쓰임새가 입에 배이기까지 할 테니 말이죠. 그리고 학생들이라면 구한말의 역사와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맥락, 지리적 문제 등이 배경 지식으로, 하나의 분위기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 후의 이야기, 즉 2부부터는 독서력과 취향에 따라 이어가거나 중단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단언컨대 1부를 읽는다면 고생에 비해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성비가 큰 독서, 올여름에 4권만 읽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