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목격한 것들
여러 가지 일로 브런치를 접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SNS와 마찬가지로 피로감 때문에 쓰지 않으려 했는데, 모두가 놀랐던 12월 3일보다 더 놀라운 말들이 횡행하여 한번 고백해보려 합니다.
전국민 중 잠들지 못한 사람 전부가 실시간으로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목격한 일을 부정하는,
놀랍고 뻔뻔한 인간 이하의 정치가, 관료, 고위군경, 검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다만, "고도의 통치 행위"라는 말이 그럴 듯하다고 여기거나,
"탄핵"의 이유와 과정, 결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탄핵만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는 것 같아서, 한번 오랜 기억을 꺼내보려 합니다.
단,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70대 이상이라면 제 회상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미친 종교인들 밑에서 박수부대를 하는지 대충은 압니다.
낡은 깃발을 몸에 휘두른 채 추레하게 선 사람들 중, 계엄 시대에 잘 먹고 잘 산 이들은 드물겁니다.
그들은 세련되게 살았고 곱게 늙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금융 자산이 늘어나는 것을 즐기고 있을 테니 말이죠.
미친 종교인들의 말에 매달리고 싶은 당신들은 스스로 실수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왔으나 이제 쪼그라든 권력을 휘두를 곳 없는 가부장들, 혹은 자신에 대한 분노를 펼칠 곳 없거나 평생 그랬듯 자신으로 살지 못할 뿐아니라 지배권력의 논리를 온몸으로 흡수한 여성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그러나 자판 뒤에서 헷갈려하는 젊음들이 있다면, 비난 대신 제 짧은 목격담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광주처럼 처절하지도 않고, 당시 대학생들처럼 목숨 건 사람을 본 적도 없는, 아니 대학생 자체를 보기 힘들었던 서울 외곽의 시골 마을 아이의 목격담입니다.
그 시절엔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계엄인지 뭔지 몰랐습니다.
어렸고, 통금시간에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금서를 읽을 나이도 못 되었으니까요..
주위 어른들이 수군대는 건 보았지만, 대놓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없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어린 마음에 전두환이 세계의 찬사를 받는 대통령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이상한 나라를 순방하고 오면 언니오빠들이 멀미를 하며 서울까지 나아가 도로에 대열하여 깃발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빠가 읽던 조선일보에 나오는 전두환 이야기는 마치 전기문처럼 흥미진진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갈 때는 늘 조마조마했습니다.
바쁠 때는 짜증도 났습니다.
그때는 군인들이 길거리에 진지를 만들고 있다가, 길 가운데 뾰족한 철가시가 있는 구조물을 갈짓자로 몇 개나 늘어놓았습니다.
버스는 S자 코스 연습하듯 구조물 사이로 지나가 군인 초소 앞에 섰습니다.
네, 정류장도 아닌데 말이에요.
총을 든 군인 2명이 버스로 들어왔습니다.
버스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지만, 어린 아이는 그 분위기가 뭔지 몰랐습니다.
군인들은 젊은 남자들 앞에 빠짐없이 섰습니다.
신분증을 확인했고, 때로는 확인하고도 버스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학생 같은 사람도 있고 회사원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제가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20~3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습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커다란 가방을 든 남자들은 매번 내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그들을 초소에 두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젊은 남자 어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목적지에 가지도 못하고 버스 정류장도 아닌 데서 내리면 집에는 어떻게 갈까, 그게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동네에서는 흥많고 술 좋아하는 아저씨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삼청교육대'에 간 것이 아니냐며 수군댔는데, 그 아저씨네 가족 중 아줌마는 우리 집 마루에서도 한참 앉아 울고 가곤 했습니다.
뉴스에서 전두환이 부랑자와 수상한 자들,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자들, 깡패들을 삼청교육대에 집어넣어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통금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직업도 있고 가정도 있는 선량한 이웃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그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 어딘가 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에 가면 먼 곳의 최루탄 냄새에 눈이 매워 슬프지 않아도 매일 울었습니다.
신문에는 '데모하는 학생'들은 불순분자이며 빨갱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승의 은혜도 모르고 연장자를 존경할 줄 모르는 패악의 무리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생이 아닌 남녀 젊은이들도 무조건 오라고 하는 경찰과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아니라고, 바빠서 어디에 가야한다고 하면 머리채를 잡히기 일쑤였고, 그건 여자 어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20, 30대 젊은이들은 미친 듯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어디에서든 잠재적 범죄자이며 불온한 무리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끌려가 사라져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고도의 정치행위일 수 있겠죠. 단, 독재자 한 명을 위한 통치입니다.
통치자 밑에 기생하는 무리들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은 입을 닫고 눈을 닫고 박수를 치라면 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만일 윤석렬의 말에 혹하다면, 어느 정치인이 싫어서 무조건 저쪽 편이 되고 싶다면, 어떤 지역, 혹은 성을 혐오해서 위악을 보이고 싶은 거라면, 하나만 가려 하시길 바랍니다.
위악을 부리든 난동을 부리든, 살아있고 자유로워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윤석렬 주변의 기생하는 무리의 사돈이라도 되지 않았다면, 이 계엄령으로 콩고물 하나 얻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당신의 젊음이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마세요.
광주도 아니고 대학가도 아닌데 길거리에서 개처럼 끌려가던 젊은 오빠, 언니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군인이 어깨에 거는 총을 메고 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계엄이 성공한 우리 동네의 아주 평범한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