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직급 체계, 정말 '일의 크기'로 회복하고 있을까?
얼마 전, 직급을 '일의 크기(Job grade)' 개념으로 회복한 지 2년이 된 한 기업과 함께 일하면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제도는 바뀌었는데, 현장에서는 여전히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 이제 슬슬 승진할 때가 됐는데…"
"저 팀장님은 야근도 많이 하고 일도 엄청 많이 하는데, 왜 직급이 낮아요?"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사람들의 인식이 함께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직무 중심으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공(年功) 논리는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었고, 구성원들은 '직급 = 일의 양'이라는 오해 속에서 "고직급자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승진도 ‘보상’이 아니라 ‘선발’의 의미라는 메세지도 점점 현장에서는 희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상태가 고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새로운 제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역할 인식의 혼선이 팀 간 협업 저하로 이어집니다. 결국 변화를 위해 쏟아부은 에너지가 조용히 식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직무평가 가이드라인과 프로세스를 보완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오늘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공유드리려 합니다.
변화관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직무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봐야 하는지보다, 무엇을 보면 안 되는지를 먼저 명확히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① 일의 양
"바쁜 것은 직무의 크기가 아니라 인력 운영의 문제입니다."
야근이 많거나 업무가 몰린다는 이유로 직급을 올리게 되면,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논리가 퍼지는 순간, 구성원들이 '바빠 보이는 것'을 경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일의 질이 아닌 일의 양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조직은 서서히 소모됩니다.
② 자격 및 학위
"자격증은 입장권이지, 관람석 등급이 아닙니다."
특정 학위나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직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실제로 활용해서 어떤 수준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가입니다. 같은 자격증을 가진 두 사람이 전혀 다른 크기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들의 직급이 같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③ 근속 연수
"오래 앉아 있었다고 해서 의자가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근속 연수는 숙련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숙련도는 기대 기여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사람이 얼마나 잘할 것 같은가'의 문제이지, '이 직무의 책임 범위가 얼마나 큰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직무의 크기는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느냐와 무관하게 판단되어야 합니다.
④ 개인의 역량 및 성과
"메시(Messi)가 동네 축구장에서 뛴다고, 그 경기장이 월드컵 경기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네 가지 중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선의로 저질러지는 실수입니다. 뛰어난 인재에게 보상을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직무의 크기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뛰어난 사람이 작은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더 큰 직무를 맡겨야 할 문제입니다. 직무평가는 어디까지나 사람(Person)이 아닌 직무(Job)를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직무평가는 Input(직무 수행에 요구되는 지식·기술·경험), Throughput(수행 활동의 복잡성과 난이도), Output(조직에 대한 공헌도와 영향력)이라는 세 축을 종합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이를 실제 평가에 적용하기 위한 네 가지 구체적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이 기준들은 기준직무와의 쌍대비교(Paired Comparison)를 통해 체계적인 평가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①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수준
그 직무에서 다루는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변수 간 상호연관성이 높은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와 조건의 불확실성은 어느 수준인가? 정해진 매뉴얼대로 처리하면 되는 문제와, 매번 새로운 맥락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크기의 직무에서 다루어야 할 대상입니다.
② 영향의 범위
그 직무에서 내리는 의사결정이 미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본인 팀 안에서 끝나는 결정인지, 아니면 타 부서나 회사 전체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인지가 직무의 크기를 가르는 핵심 기준 중 하나입니다.
③ 필요한 지식과 경험의 수준
단일 분야의 기능적 지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여러 영역의 지식과 경험을 융합하여 새로운 솔루션을 도출해야 하는 일인가? 요구되는 지식의 깊이와 복합성이 직무의 크기를 결정짓습니다.
④ 오류의 가역성
이 직무에서 실수가 발생했을 때, 이를 되돌리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은 얼마나 막대한가? 쉽게 수정할 수 있는 오류와, 한 번 발생하면 조직 전체에 되돌리기 어려운 영향을 미치는 오류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가역성이 낮을수록, 그 직무가 요구하는 판단의 무게는 무거워집니다.
직무평가에서 언제나 가장 뜨거운 논란은 형평성 문제입니다. "왜 저 사람 직무는 높은 등급을 받고, 내 직무는 안 되는 건가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준도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계적 프로세스를 제안합니다.
① 직속 상위조직장(팀장)의 직무 재설계안 작성: 높은 직급의 직무가 발생하면, 팀장이 먼저 직위·직무 재설계안을 직급 안과 함께 작성합니다.
② 본부/실장의 기준직무 선정 및 검토 요청: 본부/실장이 해당 직급과 동일한 수준의 기준직무(본부/실 내 타팀의 직무) 3개를 선정하여, 소속 타 팀장들에게 검토를 요청합니다.
③ 타 팀장의 쌍대비교 및 검토 의견 작성: 타 팀장들은 앞서 제시한 4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쌍대비교를 실시하고 검토 의견을 작성합니다. 이 단계가 핵심입니다. 여러 시각이 고려될 수록 결정의 공정성과 설득력이 높아집니다.
④ 차상위 조직장의 검토의견 전달: 차상위 조직장은 쌍대비교 결과와 타 팀장 의견을 참고하여 검토 의견을 작성한 후 직속 팀장에게 전달합니다.
⑤ 직속 상위조직장(팀장)의 최종안 확정 및 소통: 차상위조직장의 의견을 참고하여 직속조직장(팀장)이 새로운 직위·직무의 직급을 확정하고, 차상위 조직장 및 HR과 최종 소통 및 확인을 거칩니다.
한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검토를 참고한 결정은, 설령 누군가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수용 가능한 근거를 갖게 됩니다. 이 과정 자체가 제도에 대한 신뢰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일의 크기' 개념을 진정으로 조직에 뿌리내리게 하려면 한 번의 좋은 결정으로는 부족합니다. 직무 재설계와 직급 결정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기록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직무·직급 변경이 발생하는 시점과 이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직속 조직장과 차상위 조직장이 함께 다음 네 가지 항목을 회고하고 기록으로 남기도록 합니다.
① 조직 차원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가? (배경과 근거)
②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방향)
③ 그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어떤 직무 재설계가 필요했는가? (전략-구조 연계)
④ 향후 이 결정이 옳았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회고 기준)
이 네 가지가 꾸준히 쌓이면, 조직은 단순히 '직급을 결정하는 것'을 넘어 '왜 그 직급이어야 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도가 형식이 아닌 시스템으로 자리 잡는 순간입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균형을 잡으려면 넘어지려는 방향으로 핸들을 살짝 틀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막상 타보면 어떻게 되나요? 본능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다가 더 빨리 넘어집니다.
인사관리의 변화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새로운 개념과 이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알고 있다'는 것과 '실제로 할 줄 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답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스텝은 단순합니다.
"일단 해보는 것."
작은 실행이 쌓이면 어느 순간 넘어지지 않고 페달을 밟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만히 있는 조직은 서서히 나빠질 뿐입니다. 움직이는 조직만이 나아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