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용기 벗어나기
대구 첫 대형마트는 대구역 인근 홈플러스였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이지만(폐점일 뉴스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오픈 당시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자가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트까지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택시 타고 장을 보러 갈 정도의 열정을 불태웠다. 코스트코가 처음 대구에 입성했을 때도 제일 먼저 달려갔다. 그렇게 대형 마트에 가는 것은 손꼽아 기다려 다녀오는 놀이동산 같은 기쁨을 안겨주었다.
과거 전형적인 맥시멀 리스트였고, 집안 곳곳 여유 있게 뭐든 저장되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퇴근 후 아이들 픽업에 저녁 준비까지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이유도 보탤 수 있겠다. 각종 생필품부터 시작해서 먹을거리들은 냉장, 냉동고는 물론이고 상온까지 항상 넉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장을 보다 보니 마트에 다녀오는 날이면 세간살이들이 더 복작거렸다. 어떤 신상이 나왔는지 궁금한 호기심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선을 가져다 놓기 바쁘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훌쩍 흘러 푸드코트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마트 특유의 다양한 먹거리들을 맛보는 시간도 포함시킨다. 언제나 큰맘 먹고 시간과 지갑을 준비해서 들리는 대형 마트이다.
생활 태도의 변화는 장보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다. 덜 소유하고, 단정한 살림살이를 통해 마음의 풍요를 얻고자 하는 지향점이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다. 일단, 대형마트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대신 동네 야채가게, 재래시장의 방문 빈도가 많아졌다.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난 야채가게들은 점점 엄마들의 인기 장소로 각광받고 있는 듯하다. 접근성이 좋고 소포장의 매력에 가격 또한 착하다. 나 역시 퇴근길 참새방앗간처럼 들리는 곳이 되었고, 조금씩 자주 장을 보는 패턴으로 변화되었다. 어제는 꽈리고추 한 봉지와 감자 한 소쿠리, 오늘은 호박 1개와 상추 한 봉지 이렇게 장바구니가 간소화되었다. 이러한 소비 형태는 냉장고에 묵혀 두는 시스템이 아니라 신선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려주었다. 또한 지출되는 비용도 어마 무시하게 줄어들었다. 하루에 꼭 필요한 지출만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바로바로 즉석에서 요리해 먹고, 냉장고에 보관하는 일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과일도 제철과일로 두세 가지 정도 장을 보고, 다 먹으면 다음 과일을 사는 식이다. 당연히 싱싱한 과일, 야채를 먹는 빈도가 올라가면서 가공식품들과는 저절로 거리두기가 수월해졌다.
쌀, 생수, 휴지 외 생필품들은 웬만해선 인터넷으로 구매를 한다. 집 앞까지 내일이면 도착하니 그 마법 같은 마력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그래서 점점 애정 하던 대형마트와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냉장고는 저장 장소가 아니라, 식품들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라는 생각은 공간의 여유를 가져왔다. 빼곡히 검정 봉지에 쌓여 틈이 없었던 냉동실, 밀폐용기로 가득한 냉장실은 문을 여닫을 때마다 답답한 공기를 내뿜었다. 마음잡고 냉장고 청소를 하는 날이면 언제 들어갔는지 기억도 가물한 (수분기가 다 날아가 바짝 마른) 음식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던 시간들이었다. 소박한 살림살이를 꿈꾸며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건 단연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컸다. 소스, 계란, 야채, 과일 등의 위치를 정해주고 밀폐용기들에 보관하는 것들은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청소를 하려면 시간과 품이 많이 들어가니, 매일 섹션별 행주로 닦아주며 청결을 유지한다.
얼마 전 가지고 생활하는 그릇 종류들을 점검하려고 싱크대 상부장을 열었다. 그리고 손이 가지 않는,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정리하고, 잠시 밀폐용기들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저 밀폐용기들을 다 없애버릴까? 밀폐하지 않고 바로 소비하는 삶도 가능하지 않을까? 모아 두고, 담아두고, 보관하기 바쁜, 그래서 정작 지금의 신선함을 놓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언제 올지 모를 미래의 시간을 위해 현재의 소중한 순간들을 저장해 두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얼마 전 이불빨래를 위해 빨래방에 갔다. 건조기에 이불을 넣고 결제를 위해 건조시간을 입력하던 중 예상시간보다 초과해서 입력하고 말았다. 당황스러웠던 건 당연히 되돌리기 버튼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상연락망의 전화번호를 눌렀고, 상황을 전달하니 사장님께서 초과 입력 시간만큼 바로 송금해 준다고 하셨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했고, 너무 당연하게 되돌리기 버튼에 익숙해진 일상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인생에도 되돌리기 버튼이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매 순간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언젠가를 위해서 묵혀두는, 과거에 젖어 밀폐된 삶이 아닌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면서 라이브 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