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한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이 말에는 두 겹의 뜻이 있다. 하나는 ‘가장 좋고 훌륭함’이라는 결론을 이야기하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온 정성과 힘을 기울임’이라는 과정이 담겨 있는 언어다. 나에게 최선은 언제나 후자에 가까웠다. 비록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않아도, 과정에서 흔들림 없이 노력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여겨왔다. 완벽을 향한 무리한 질주보다, 삶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편안한 삶을 선호해 온 까닭이다. 많은 돈보다는 소확행을 추구할 수 있는 돈을, 화려한 명성보다는 소소한 친목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결과 중심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가 더 잘 맞았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남에게 드리울 때는 때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중적 올가미로 변하기도 했다.
지난주 금요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올해 수능 성적표가 드디어 우리 집에 도착했다. 이미 주변 수험생 엄마들로부터 한숨 섞인 소식을 들으며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정작 우리 둘째는 수능 직후부터 유난히 해맑은 얼굴로 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나에게 ‘혹시 생각보다 잘 본 건 아닐까?’라는 조심스러운 기대를 품게 했다. 게다가 아들은 수능을 치르고 난 뒤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했다. 맞아, 저렇게까지 말한 걸 보면 그래도 괜찮은 점수를 받았겠지. 그런 은근한 기대로 2주를 버텼다. “우리 애도 잘 못 본 것 같아요.”라며 속상해하는 주변 엄마들과 공감할 때도 ‘우리 애는 다를 거야’라는 한 톨 희망이 마음 한쪽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성적표를 보는 순간, 그 기대감은 소리도 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게 최선을 다한 점수라고?
‘최선’이라는 말의 기준은 어느새 나와 아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시험 공부할 때도, 수능을 마친 뒤에도 둘째는 늘 ‘열심히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 안에는 ‘나는 할 만큼 하니 더 이상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두터운 방어막이 겹겹이 깔려 있었다. 아들이 말하는 ‘최선’은 늘 좋은 결과보다는 무언가를 해 본 과정에 더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강조해 온 ‘결과보다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지론이 그 녀석의 말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아들의 이런 태도에 내가 딴지를 건다면, 노력의 과정보다는 눈앞의 성적을 요구하는 엄마가 되는 걸까?
기본적으로 나에게 ‘최선’이란 절실함을 품은 말이다.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투사처럼, 가진 힘을 끝까지 다 쓰는 치열함이 ‘최선’의 글자 속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둘째가 고3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아이가 그 마음의 일부라도 품고 있기를 바랐다. 예전 수험생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사당오락(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고3이라면 그만큼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둘째의 모습은 나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3 내내 그는 오직 ‘수능 최저’를 맞춰야 하는 과목에만 집중했고, 나머지 과목은 그저 흘려보내듯 대했다. 수시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하면 정시를 위해 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아들은 치열한 싸움을 대비하는 현명한 전력가이기보다는, 쉽고 빠른 길만 골라 따라가는 초보 병사에 더 가까웠다. 고3의 한 해 내내 그는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준비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대학 안 가도 괜찮아.”
“가서 잘하면 돼.”
그러나 이런 말들은 지금의 나에게 닿지 않는다. 나는 아들의 점수를 슬퍼하는 것을 넘어, ‘1% 부족한 최선’으로 이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그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갇혀 있다. 운도, 재력도, 특별한 배경도 없다면 결국 붙잡을 수 있는 건 ‘최선의 노력’뿐이 아닐까? 인생엔 정답이 없다지만, 나는 늘 이렇게 믿어왔다. 한순간의 최선이 다른 문을 열어줄 수 있다면, 그 문을 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보는 것이 옳다고.
50대가 된 지금, 나에게 ‘최선’은 숨 고르기를 위한 거리 두기에 가깝다. 남은 길을 오래 걷기 위해 체력을 남겨두는 방식의 최선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 일이 있고,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내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사회에 발을 디디지 않은 둘째에게, 과정만 중시하며 살아온 나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확신할 수 없다. ‘신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적당한 포기가 그 아이에게 맞는 길일지, 아니면 끝까지 내달리는 치열함이 행복의 열쇠일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생에서 닫히는 문이 있다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는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지금 아들의 이 선택이 상처가 아니라 더 좋은 미래를 향한 첫걸음이 되기를, 그리고 그 ‘최선’이 바래버린 나의 ‘최선’과는 다른 모양으로 단단히 자리 잡기를 조용히,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