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의 해명
원문: Dottrina del diavolo in corpo (1951)
아마데오 보르디가 지음
바탈리아 코무니스타 1951년 제21호
AGITBURO 옮김 (2025.05.24)
방향을 잡지 못하는 나침반의[1] 영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국가자본주의의 문제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 학파의 다양한 전통적인 관념으로부터 수많은 기여들을 축적하였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 세계의 가장 최신의 양상일 뿐 아니라, 이 형태는 심지어 완성형의 것들을 포함하더라도 매우 오래된 것이고, 자본주의적 생산 유형의 발현과도 상응하는 것이다. 이는 본원적 축적의 주요 요소로서 작용하였으며, 사적 경영, 자유로운 주도권 및 다른 고귀한 것들로 대표되는 허구적이고 전통적인 환경을 모두 선행하는 것이고, 이 후자의 것들은 실재 세계보다는 변론의 영역에서 곧잘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이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그룹들이 공산주의좌파 반(反)스탈린주의 진영에서 많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전의 문헌들을 기반으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자면, “그곳이 어디든 간에 시장의 경제 형태가 있는 곳에서 자본주의는 사회적 세력이다. 이는 계급 세력이며, 자신의 재량 아래 정치적 국가를 지니고 있다.”[2]
이제 여기에 다음과 같은 공식을 추가해 보자. 이 공식은 우리 입장에서 가장 최근의 세계 경제 양상을 매우 잘 표현하는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는 국가 아래에 자본을 예속시키는 것이 아닌, 자본 아래에 국가를 더욱 굳건히 예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첫 번째 테제의 유효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이는 제국주의적 확장의 개화기인 1900년도까지는 타당하며,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적용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진화가 그 진화의 최종적 변천을 사적 주도권으로부터 배제하는 역할을 국가에 부여하게 될 때에 이는 불충분하다.”
나아가 그들은 말한다. 역사와 상응하지 않게 되는 시점부터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또한 경제학도 카이저[3]와 같은 “가공할만한 인물”의 글을 통해 국가 경제에 대한 연구로 마르크스의 분석을 보완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경제학 “문화”에 있어 뒤처진 자가 되는 것이라고. 치명적인 악습이도다! 대상과 진상의 주어진 관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테제는 그것을 대상과 진상에 대조하는 것을 통하여 확증되는 것이지, 강력하거나 강력하지 않은 인물의 저작에 달린 이름표에 의해서가 아니다.
인물을 논하는가? 카이저 따위는 개나 줘 버려라! 그리고 사적 주도권이라는 우상이 1950년에 타파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옛 카를 선생이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이를 산산조각 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야 우리는 최근 저작들을 읽기엔 너무 게으른, 꾸준히 뒤처진 자들이니까 말이지...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사적 주도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설을 들은 이 마냥 하늘을 바라보지 말고 그 고개를 내려 나침반을 보라 (역설: 문외한에게는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인 것).
우리는 이미 수천의 선전물에서 사회주의 강령은 생산수단의 사유재산의 철폐임을 선언한 바 있으며, 이는 고타 강령을 비판한 마르크스의 기여와 마르크스에 대한 레닌의 저작에 의하여 확증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재산이지, 사적 경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선행하는 경제는 사적, 혹은 개인적이었다. 재산은 더 이상 순수 경제 관계를 일컫는 단어가 아닌, 법적 관계를 가리키며, 생산제력뿐 아니라 생산관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사유재산은 부르주아 법전이 공인한 사적 권리이다: 이는 국가와 권력, 즉 한 계급의 재량 아래의 권력과 폭력을 함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응하는 사법적, 국가적 기반을 극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건실했던 우리의 공식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뿐이다.
이러한 기초적 개념들을 숙지한다면, 다음과 같은 교활한 테제를 쫓아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 재산의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 및 공장의 국유화와 함께 사회 강령은 설립된다.
명확히 하자면, 우리가 논쟁하는 대상인 이 그룹들은 국가자본주의가 그 자체로서 이미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들은 이 형태가 사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있는 제3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가 경제적 개입보다는 옛 경찰 기능을 더 유지하고 있는”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화된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권력 행사에 최대한의 역량을 부여하는” 단계이다.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 두 도식, 혹은 두 역사적 단계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동일하며, 지배 계급 또한 동일하고, 역사적 국가 또한 동일하다고. 경제는 생산과 분배가 일어나는 사회적 영역의 총체이며, 이는 이에 가담하는 인물들 또한 포함한다: 국가는 사회적 영역에서 작용하는 특정 기관이며, 자본주의 단계의 국가는 늘 한 계급의 이해관계 및 이 계급과 역사적으로 상응하는 생산 유형을 보호하고 정찰하는 기능을 지녀왔다. 경제를 자신 아래로 중앙화하는 국가는 부조리의 형태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국가는 늘 경제에서 존재한다—국가의 권력과 사법적 폭력은 언제까지나 경제적 요인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바람직하겠다: 특정한 경우에서 국가와 행정부는 산업적 사안에 있어 관리자의 역할을 하게 되며, 만일 이 전부를 관리하게 될 시에 국가는 이러한 사안들의 관리를 중앙화하게 되지만, 이것이 경제의 중앙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분배가 화폐 기반의 가격 매김을 통해 실행된다면 (가격이 공식적으로 동결되었다고 해도) 국가는 여러 기업체 중 하나, 여러 계약자 중 하나인 것이며, 더 비참한 사실은 노동당파, 처칠주의자 및 스탈린주의자들에서와 같이 국가의 각 사업체들이 기업체로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행정법의 문제가 아닌, 혁명적 폭력, 즉 계급 전쟁의 문제이다.
《국제공산주의좌파 프랑스 그룹[4]》의 동지들—우리는 아주 기꺼이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이 게재한 한 흥미로운 논설에서 이 문제는 보다 적절하게 제시된다. 추가적인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꽤 건설적인 질문들이 제기되었으며, 이 문제는 또한 저명한 《숄리외》 그룹의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제시되었다. 후자의 그룹은 “쇠퇴” 이론과 함께 자본주의에서 야만으로의 이행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혔으며, 이는 소위 “관료주의적” 정권의 참사와 마찬가지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오래 지껄였음에도 나침반의 바늘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련해서는 우리 운동의 한 내부 논설이 기여한 바 있는데, 이 텍스트에서 우리는 잘못된 하향곡선론을 다루었다. 과학적 체면은 잠시 제쳐 두고, 다음과 같은 서사는 정말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으리라: “오 자본주의여, 우리의 멱을 붙잡고 마음껏 유린해 보아라. 우리를 걷어 찰 자격도 없는 들개 취급을 하여라. 우리는 금방 되살아나리라—이는 오직 네 쇠퇴의 증거일지니...” 이게 과연 쇠퇴라면 쇠퇴 중이 아닌 상황을 상상해 보라...
야만이란 것은 문명의 반대선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관료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우리의 야만적 조상들은 운이 좋게도 명확한 지배계급과 명확한 영토라는 두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 기구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엥엘스 선생!). 이들에겐 씨족이 있었고 부족이 있었으나, 키위타스(civitas)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키위타스는 도시를 뜻하며, 또한 국가를 의미한다. 문명은 야만의 반대이며, 국가 기관을 의미하고, 따라서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제를 동반한다. 더 국가적일수록 더 문명적이라는 것이며, 이는 더 관료적이라는 것이고, 일련의 계급 문명이 잇따라 계승되는 한 이는 유효하다. 이게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바이다. 오늘날 우리를 세계 모든 곳에서 쥐어짜고 있는 것은, 야만으로의 회귀가 아닌, 바로 초문명의 개화이며, 이 세계는 근대적 국가 초기관(superorganization)의 괴물이 군림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일단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추종자들을 실존적 위기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자. 이들은 어차피 앞서 언급한 논설의 매우 적절한 제목으로 논파된다: 《Deux ans de bavardage (2년 동안의 수다)》. 몰랐나 본데, 원래 이쪽은 수다 따위 떨지 않아!
프랑스 동지들이 앞서 말한 질문을 고안하는 데에 이용한 균형 잡힌 공식을 들여다보자—국가자본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의 정의, 그 정의의 정확성 혹은 부적절성: 자유주의 혁명의 상속인인 자본주의. 이 그룹이 주장하는 결론은 정당하다: 관료를 마치 프롤레타리아트의 품 안에 교활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자율적 계급인 것 마냥 간주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도리어 관료는 자본주의의 범세계적 진화의 주어진 역사적 상황과 연계되어 있는 거대한 기구로서 인지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 모든 계급 사회에서 확인되는 관료는 계급이 아니며, 생산력도 아닌, 주어진 계급 통치와 대응하는 생산 “형태” 중 하나이다. 특정 역사적 단계에서 이는 그 단계의 주역으로서 보이게 되는데, 쇠퇴의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겠으나, 후자는 사실 혁명 이전 단계 내지 최고도 팽창의 단계이다. 혁명의 산파를 기다리는 사회를, 신사회의 탄생을 일으킬 조산사를 왜 쇠퇴기, 혹은 퇴폐[5]라고 부르는가? 불임도 아닌 임산부의 경우에는 이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부풀어 오른 복부를 본 숄리외는, 부푼 자궁을 다루는 조산사의 미흡한 솜씨를 임산부의 허구적 불임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크렘린의 관료들이 권력 남용을 통해 우리에게 사회주의의 사산아를 남겨주었다며 저격한다. 그러나 잘못은 혁명의 겸자를 들어 유럽-아메리카의 복부를 절개하려 하지 않은 것에 있으며, 이는 번영하는 자본의 축적에 의하여 저지되었고, 결국 난임의 자궁에 헛된 노력을 하게 된 꼴이다. 혹은 이는 어쩌면 수정되지 않은 자궁일지도 모르겠다, 수확을 위한 투쟁에서 후퇴하여 씨를 뿌리기 위한 투쟁으로 전진하며 말이다.
짧은 해명 이후에 순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자유주의 혁명의 상속인인 자본주의”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예리한 역사적 논제를 핵심 요점으로서 올바르게 제시한다: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혁명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잇는 계급적 외길인 한 순환계이며, 혁명 마르크스주의를 단념하지 않고는 이것을 여러 개의 순환계로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후술 할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인데, 자본주의는 자유주의 혁명이 아닌, 부르주아 혁명을 통하여 일어난 것이며, 더 정확히는 “반봉건” 혁명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자유주의가 일반적 이상으로서 이러한 혁명들의 목적이자 동기가 되었다는 관념은 부르주아적 변론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개념을 거부하였으며, 그에 있어서 이러한 혁명들의 역사적 목적은 바로 자본가 계급의 지배에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파괴하는 것에 있었다.
그 함축된 공식은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꽤 명확하다: 자본은 자신의 본질을 바꾸지 않고도 수월하게 자유주의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사실 또한 명확하다: 변질의 의미는, 즉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변질은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에서 더 발전된 유형의 자본주의를 위한 혁명으로 향했다는 것이 아닌, 순수 자본주의 혁명으로 향했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일련의 연속적 단계를 통해 다양한 곳에서 옛 봉건적·아시아적 형태를 제거하였던 범세계적인 자본주의 지배와의 경쟁으로 나타났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이 자본주의 혁명으로 하여금 자유주의의 형태를 취하도록 하였다면, 20세기에서 이는 전체주의적, 관료주의적 형태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차이라면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질적 변형에 의해서가 아닌, 양적 발달에서의 막대한 편차에 의해서이며, 또한 각 대도시의 밀집 정도와 행성 표면에서의 확산의 정도라는 요인도 있다. 사실 자본주의가 자기 보존을 위해서나 발전 및 확장을 위해서나, 자유주의적 입발림보다는 경찰과 관료주의적 압박을 더욱 선호하는 추세라고 해도, 주어진 역사적 방향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수단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도 적용해야 할 것이라는 확신에 그 어떤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러한 폭력, 권력, 국가, 관료제, 즉 전제주의를 이용하게 될 것이며, 이는 공산당선언이 103년 전 매우 무시무시한 것으로 묘사했던 것이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없애버릴 방법을 알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의사는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 첫 숨을 들이쉬기 전까지, 삶에 대한 찬가를 부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피범벅이 된 메스를 내려놓지 않는다.
공장의 주인으로서 생산을 조직하는 사적 개인의 소실과 함께, 자본주의의 근본적 형태 역시 사라지지 않는가? 경제의 영역에서 제기된 이 이의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곤 한다. “자본가”는 마르크스에 의하여 수백 번도 넘게 쓰인 단어이다. 반면 “자본(capital)”은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caput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따라서 전통적으로 자본은 소유주 일신(一身)의 직함에 달린 부를 뜻하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닌, 기존의 것을 해명하기 위해 몰두하여 고안한) 테제는 정당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기업체를 소유하는 인간 개인을 필수적 요소로서 지니지 않는다. 이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인용문은 셀 수도 없기에, 하나로 결론을 짓도록 하겠다.
“자유로운” 공장 형태의 소위 “전형적” 자본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마르크스는 늘 이러한 표현을 따옴표를 이용하여 수식하곤 했다. 실로 이러한 표현은 마르크스가 그의 경제적 관념으로 맞서 싸워 파괴하고자 했던 부르주아 학파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항상 간과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예시를 계속 연장하자면, 자연스럽게 최초의 자본가인 아무개 씨가 어느 정도의 돈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좋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저작의 모든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답한다: “어째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다: 절도, 약탈, 고리대금, 암시장, 혹은 우리가 꽤 자주 본 적 있듯이 왕의 명이나 국가의 법률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아무개 씨는 매일 밤마다 손으로 더듬어 보기 위해 금화를 마대에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사회적 이상이 부여된 한 시민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숭고한 자세로 위험의 부담을 짊어지고 자신의 자본을 유통한다. 이제 첫 요소로서 화폐의 축적이 해결되었다. 두 번째 요소는 원자재의 확보인데, 수많은 글로부터 익히 알려진 생목화 등이 있겠다. 세 번째 요소는 공장 터 및 베를 짤 일터의 확보이다. 네 번째 요소는 기술적, 행정적 조직화 및 감독이다. 전형적 자본가는 이를 스스로 시행한다. 그는 이에 대해 공부하고 여행을 통해 경험을 쌓았으며, 목화 더미를 가공함에 있어 대량으로 직조하여 단가를 절감하는 새로운 체계를 고안하였다. 옷을 입지 않고 생활하던 어제의 거렁뱅이나 중앙아프리카의 유색인민들을 그는 저렴한 값으로 옷을 입힐 수 있던 것이다. 다섯 번째 요소는 직조기를 다룰 노동자들의 확보이다. 이들은 일터에 그 어떤 실감개나 생목화 1그램 조차 가져올 의무가 없다: 이는 개별적 생산의 반(半)야만적 시대에 요구되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바지를 수선하기 위하여 목화 실 한 가닥이라도 빼 간다면 고통을 보게 된다. 이들은 노동한 시간의 공정한 등가물로서 임금을 받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의 합에 의하여 전체 과정의 동기와 목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과 직물 더미. 필수적 사실은 이는 오직 자본가에 의해서 시장에 조달되는 것이며, 금전적 이득은 모두 오직 그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이다. 익히 알려진 일상이다. 그렇다. 모두 이 간단한 산수를 알고 있지 않은가? 지출: 생 목화의 가격; 공장과 기계의 유지보수를 위한 금액; 노동자의 임금. 수입: 판매된 생산물의 값. 후자는 지출의 총액을 초과하며, 차액은 기업체의 이윤 마진을 구성한다.
자본가가 벌어들인 돈이 자신이 원하는 곳에 쓰인다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무것도 제조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그는 본 투자금을 아무 곳에나 쓸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투자 이전의 상태로 이윤을 축적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많은 돈을 쥐고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를 모두 소모해 버릴 수 있으며,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무언가가 그로 하여금 많은 몫을 투자하게 만든다. 이를 다시금 새로운 자본으로 전환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길 자본의 삶은 오직 영원적으로 스스로를 복제하기 위한 가치로서의 자기 운동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자본가 일신 개인의 욕망은 요구되지 않으며, 이를 스스로 지체시킬 수도 없다. 경제결정성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 시간을 매매하게 할 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자본가로 하여금 투자하고 축적하는 것을 요구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자유로운 계급과 노예 계급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 계급과 폭리를 취하는 계급이 존재하나, 이들은 모두 역사적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법칙에 얽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과정은 사업체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이며, 오직 이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업가 일신 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생산적 사업체의 마진의 한 몫의 분배로 대체되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이론이 마르크스에는 이미 존재한다. 첫째로, 금전은 주기적 이자를 지급받는 대금업자나 은행으로부터 확보된다. 둘째로, 이때 그 돈으로 확보한 원자재는 실질적으로 사업가의 재산이 아닌 금융인의 것이다. 셋째로, 영국에서는 건물이나 가옥 및 공장의 주인은 해당 토지의 소유주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가옥과 공장은 임대될 수 있는 것이다. 직조기 및 다른 기계와 공구들이 마찬가지로 임대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네 번째 요소로는, 사업가가 기술적, 행정적 관리 능력이 부재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기술자나 회계원을 고용하게 된다. 다섯 번째 요소는 바로 노동자의 임금인데, 이것의 지급조차 금융인에게서 받은 대출금으로 성사된다.
사업가의 엄밀한 기능은 앞서 나열한 요소들의 총액을 초과하는 판매가를 가진 특정 생산물에 대한 시장 수요가 있다는 사실을 직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자본가 계급은 사회적, 정치적 세력인 사업가 계급으로 제한되며, 이는 부르주아 국가의 중심적 기반이다. 그러나 사업가 계층은 돈, 토지, 가옥 및 공장의 주인 및 상품 공급처 계층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인식하는 데 있어 두 가지 근본적 형태 내지 요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생산물과 매출이익을 마음대로 처분할 생산적 사업체의 권리가 방해되지 않고, 불가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 통제 혹은 물자의 청구는 이러한 매출이익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중심적 권리를 애초부터 보호하는 것은 계급 독점이며, 이는 권력의 토대이고, 국가는 사법부 및 경찰과 함께 이 규범을 방해하는 자를 징계한다. 이것이 바로 기업형 생산의 조건인 것이다. 다른 요점이라면 각 사회적 계급을 분리하는 ‘경계선’의 부재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더 이상 카스트나 신분이 아니다. 지주귀족에 속한다는 것은 세대를 거듭해 작위를 물려주는 것이었기에 한 생애를 초과하여 지속되는 것이었다. 평균적으로 건물이나 거대 금융의 소유는 최소 한 생애 동안은 지속된다. ‘주어진 인물의 지배계급 지위의 평균 기간’은 대체로 이보다 더 짧은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발단된 형태에서는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닌 자본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 감독관은 고정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디서든지 사람을 발굴해 징집하며, 현란한 속도로 이들을 교체한다.
레닌의 “기생적 자본주의” 개념이 산업자본가들보다 금융자본가들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해명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더욱 복잡하게 진화하고 점진적으로 금융, 기술, 설비, 및 행정과 같이 사변적 이익에 기여하는 다양한 요소들로 분할하지 않고서는 널리 확장하거나 성장할 수 없었다. 최대 마진과 사회적 통제가 실체가 있는 능동적 분자의 손에서부터 벗어나 점진적으로 투기꾼들과 산업 깡패들의 손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마르크스에서... 스투르초 선생[6]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후자의 인물은 특유의 신중한 태도로 INA 보험사 사태를 해결한 바 있다. 그는 한 흥미로운 발언을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파시즘 시기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난 말할 수 없소. 왜냐하면 난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요. 그래도 이런 것들이 일상의 이치인 상황에서는 여러 다른 것들이 곧 빛을 보게 되는 법이오!” 우리는 확신한다. 현대 이탈리아의 기생적 자본주의는 무솔리니의 것을 능가하는 것이며, 둘 다 미국계 기업체의 횡포와 비교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INA 보험사는 거대한 금융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슷한 이니셜을 가진 여타 준(準)정부 기관과 같이, 노동자들이 사회보장을 위해 지불한 금액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험금 지급은 느리기에 막대한 양의 현금이 금고에 차 있었다. 그렇기에 INA는 이 다량의 부를 썩혀 두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머리도, 몸도, 영혼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우리는 하베아스 코르푸스[7]—'몸을 가져오너라'—의 문명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것으로 투자를 하고 말았다. 아, 오늘날의 사업가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자본이 없이도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변증법적 이치로 근대 자본이 웃대가리 없이도 자본인 것처럼 말이다: 머리의 부재.
그 현명한 시칠리아인 신부님이 말하시길 (이미 방청객들은 그의 장례식에서 과도한 칭송과 함께 추도를 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악은 바로 INA의 영향 아래 너무 많은 유령회사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도대체 유령회사가 무엇이란 말인가? 사업에 능통하고 호화스러운 사무실을 가졌지만, 자기 명의의 건물이나 증권도 없이 빈털터리인 채로 경제판 및 정계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이들이 있는데 (심지어 이들은 저택을 임대하지도 않고 커다란 호텔에서 산다. 바노니[8]를 매우 잘 알지만, 정작 바노니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주어진 사업 기획을 “고안”하여, 이 기획안 외에는 아무 자산이 없는 한 법인을 등록하게 된다. INA나 다른 비슷한 기관은 이런 법인에 자금을 조달하게 되고, 만일 사소한 “특수법”이 요구될 시에는—예컨대 침몰된 어선의 잔해에서 꽃게 양식장을 차리기 위해서라던지—정부의 무능을 탓하는 야당 의원의 강력한 연설을 통해 이 문제는 고위 공직자에게로 급히 전달되고는 하며, 이 방법은 실패를 모르는 법이다.
실제로 옛날 옛적에 한 평범한 사업가가 자신이 계획한 사업을 위한 자금을 대출받기 위하여 은행에 들렀다고 한다. 은행이 답하기를, “물론 드리고 말고요. 그런데 담보는요? 자산이나 다른 소유권 모두 내놓으셔야지요…” 그러나 국영 기관은 이렇게 속 좁은 요구에서 면제된다: 나라의 안녕은 돈을 꺼낼 충분한 사유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뒷일은 예상 가능한 수순이다. 기획안과 생산프로젝트를 가진 이 작자가 결국 죽을 쑤어 모두 다 날려버렸다면 그는 끝난 것이다: 돈도 잃고 온갖 망신과 함께 고용주 계급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총명한 참모들을 거느리는 우리 유령회사는 이런 공포에 떨지 않는다: 만일 꽃게가 양식이 된다면 좋은 마진으로 미식인들에게 팔면 되는 것이다. 돈 버는 일이다. 만일 꽃게 양식이 성공할 기미가 안 보인다거나 혹은 아무도 꽃게를 먹으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센티브나 배상, 분배금 등으로 모두 현금화되었고, 엉터리 꽃게 양식장 사업에 대한 금전적 손실은 INA가 보는 것이다.
국가자본주의가 (혹은 국가에 중앙화된 경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사소하고 평범한 예시로 설명하였다. INA가 겪은 손실은 매일매일의 임금의 일부를 계속 그들의 금고 속으로 바치는 불운한 자들 모두의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가자본주의는 사업 주도권의 순간적 계략에 휘둘리는 국가에 집중된 금융이다. 이익은 남고 손실의 위험은 모두 제거되어 공동체로 전가된 이 시기의 사업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다.
오직 국가만이 원하는 만큼 화폐를 발행할 수 있으며 위조범을 징계할 수 있다. 소지주의 점진적 수탈과 연속적인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 자본주의적 집중은 이 근원적 권력의 원리를 중심으로 행해진 것이다. 기업체가 회계를 담당하고 교환이 화폐에 의하여 매개되는 경제에서는 이러한 법칙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복적으로 올바르게 표명해 왔다.
국가의 권력은 따라서 기업체의 사변적 구상으로 폭리를 취하는 자들의 수렴적 이해관계와 깊게 자리 잡힌 그들의 국제 관계망을 기반으로 한다. 국가에 진 빚을 절대 갚지 않는 와중에 피억압 계급을 탈취하여 빚을 청산하려는 이 깡패들에게 자본을 빌려주지 않을 국가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투자하는” 국가들은 부르주아 계급에 영원히 빚을 지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채권을 발행하여 자기 화폐를 다시 수거하고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중앙집권 경제”의 사회주의적 행정은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어느 “기획안”에게도 외부에서부터 수익을 제공하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화폐가 다루어지지 않는다. 국가에 중앙화된 자본은 오직 잉여가치와 이윤을 위한 생산을 수월하게 다루어, “모든 이” 혹은 사업가 계층의 손아귀의 범위에 위치시키기 위한 중앙화이다: 더 이상 단순생산의 사업가가 아닌, 공공연하게 사업을 위한 사업가인 것이며, 더 이상 상품의 생산이 아닌, 마르크스가 이미 말하였듯이, 잉여가치의 생산인 것이다.
일신의 자본가는 더 이상 이것에 관여하지 않는다—자본은 그가 없이도 동일한 기능을 백 곱절로 유지하며 살아간다. 인간 주체는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자신을 구성할 개인이 부재한 계급? 사회 집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닌, 성령이나 악령의 소행과 같은 무형의 불가항력을 따르는 국가? 여기 이 아이러니한 지점이 바로 우리 카를 경의 영역이다. 이제 앞서 약속한 인용문을 첨부한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위한 자재 및 노동 과정의 요소의 역할을 하는 상품으로 전환하고, 살아있는 노동력을 생명이 없는 대상성으로 융합함으로써, 동시에 가치를 변신시킨다: 이는 대상화되고 생명이 없는 과거 노동의 자본으로의 전환이며, 이는 스스로를 증식시킬 수 있는 가치이고, ‘마치 악령이 깃든 육신처럼’ ‘노동’을 하기 시작하는, 혼이 깃든 괴물이다.” [9]
자본은 그 머리에 솟은 뿔째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각주:
[1] 《미쳐버린 나침반》 (Bussole impazite), 바탈리아 코무니스타 1951년 제20호 참고.
[2] 《재산과 자본》 (Proprieta e capitale), Iskra, 밀라노, 1980. 130쪽
[3] 미국의 산업가 헨리 카이저 (1882-1967)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카이저'는 보르디가와 오노라토 다멘 (Onorato Damen) 간의 1951년 다섯개의 서신 중, 다멘이 보르디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신에서 등장하는데, 본 글의 해당 부분 및 바로 이전의 인용문에서 보르디가는 다멘과의 서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Groupe français de la gauche communiste internationale. 이 그룹의 일부는 후일 본 글에도 언급된 숄리외(Chaulieu)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1922-1997)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Socialisme ou Barbarie) 그룹을 창설하게 된다.
[5] 쇠퇴와 퇴폐 모두 로망스 계열 어원을 가진 단어 decadence의 번역이다.
[6] 루이지 스투르초 (1871-1959): 신부 출신의 이탈리아 정치인. 기독교민주주의자이며, 이탈리아인민당 (PPI)의 창립자이다.
[7] Habeas corpus. 인신보호청원 제도의 라틴어 표현이다.
[8] 에치오 바노니 (1903-1956): 당시 이탈리아 재무장관.
[9] 카를 마르크스, 《자본》 제1권, 제7장 ‘노동 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2절에서 발췌. 역자 옮김.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 “마치…”는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 술집 장면을 마르크스가 오마주한 것인데, 원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라는 표현이 《자본》의 일부 번역본에서는 (예를 들어 조제프 루아(Joseph Roy)가 작업한 첫 프랑스어판) 본 제목과 같이 “악령이 깃든 육신처럼”이라고 의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