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그루포 바르바리아: 강령 테제

Grupo Barbaria: Tesis programáticas

by AGITBURO

원문: https://barbaria.net/2024/09/23/tesis-programaticas/

국제주의 공산주의자 동맹 (LIC) 영역본: https://internationalistcommunists.org/2024/09/25/programmatic-theses-barbaria/

[업데이트] 바르바리아 홈페이지에 번역이 게시되었습니다. 링크: https://barbaria.net/2026/02/10/geulupo-baleubalia-ganglyeong-teje/


역자의 주:

본 문헌은 스페인 공산주의 조직 그루포 바르바리아(Grupo Barbaria)가 게재한 강령 테제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를 포함하여 국제주의 공산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강령적 접근으로 사적유물론에서부터 자본주의, 공산주의, 세계 혁명, 최소 및 최대강령, 계급당, 그리고 운동에 대한 반성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 가지 주요 항목을 이 테제에서 다룬다. 원문에 나타난 모든 이탤릭체는 작은따옴표로 대체하였다.

AGITBURO


- 목차 -

1. 사적유물론

2. 자본주의

3. 공산주의

4.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5.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6. 당과 계급

7. 현 상황 및 혁명가의 과업



강령 테제


1. 사적유물론

혁명의 갈망은 직관적이다. 이는 현 체계의 여러 양상의 폭력을 체험하거나, 사태의 급진적 변혁의 필요성을 일시적으로 혹은 의식적인 결의로 투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와 반대로, 혁명가로서 행동하는 것은 직관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이 체계를 ‘어떻게’ 끝을 낼 것인가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를 ‘끝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기 위해 우리에게 거꾸로 뒤집힌 채 나타나는 사회적 현실을 제 발로 세우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회의 작동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사적유물론[1]은 생산양식의 개념을 통해 인간 사회의 전개를 이해하며, 이는 사회가 이용하는 수단과 그 구성원들이 이를 위해 스스로 조직하는 방식, 즉 물질적 생활을 사회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형태를 통해서만 비로소 사회와 그 제도 및 그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표출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념이다. 즉, 사회적, 역사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생산양식은 사회적 총체를 규정한다. 이것의 내재적 모순은 사회의 역사적 발전을 특징짓게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제력(生産諸力)과 사회적 생산제관계(生産諸關係) 간의 충돌에서 종합되어 있는 이러한 모순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능이 마치 재앙과 같은 방식으로—즉 점진적이거나 상승과 쇠퇴의 곡선을 그리지 않은 채로—다음의 생산양식, 공산주의를 낳는다. 그러나 이는 무의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은 우선 그 역사적 전제, 그 발현의 조건들이 배태(胚胎)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 종(種)이 목격한 가장 파괴적이고 소외적인 생산양식인 자본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위한 물질적 토대를 준비하게 된다.


2.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오늘날 지구의 모든 곳에서 존재하는 마지막 계급사회적 생산양식이다. 이는 인종, 젠더, 테크 산업과 같은 다른 지배 체계에서도 수반되거나 이와 교차하는[2] 단순 경제적 착취 체계가 아니다. 이는 상품생산을 통해 사회가 자신의—그 모든 측면에서—생활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양식이다. 사회적 목적이 필요의 충족을 향한 재화의 생산이 아닌, 상품생산이라는 사실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제관계가 사물의 형태를 띠고 생산물의 활동이 생산자의 활동과 생활을 규정하게 되는 자동작용을 야기한다. 현실은 뒤집힌 채로 나타난다: 상품의 물신성 (commodity fetishism)[3].


자본주의의 국제적 본성은 대립하는 나라들이 세계 시장과 이것이 수반하는 정치-군사적 우위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다른 표현으로는, 이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착취된 잉여가치의 더 많은 몫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국민[4] 부르주아지(national bourgeoisie)’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여느 분쟁에서와 같이 더 강한 나라가 있다면 더 약한 나라도 있다. 자본주의의 국제적 영역은 분열되어 있고 위계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억압받는 나라와 억압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아니며, 단지 세계적 경쟁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나라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도는 민족주의와[5] 인종주의를[6]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으로 만든다. 또한 이에 따라 모든 국가는 제국주의적이며[7], 국가 간의 전쟁은 체계의 필수적, 영속적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마지막 계급사회이며, 이는 이를 선행하는 것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지닌다. 사유재산과 사회적 계급의 발현은 가부장적 재생산 구조를 요구하였으며, 이것의 기본 세포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관건인 영역, 바로 가족이다. 자본주의는 계급사회로서 가부장적 구조를 지속적으로 지니는데[8], 이는 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하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고, 가치의 무제한적 생산에 있어 생물학적인 것을 장애물로서 간주하는, 혹은 적어도 감내해야 할 대가로서 간주하는, 자신의 상품적, 추상적 논리에 따라 이 구조를 재생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존재를 상품으로 변환한 생산양식은 자연 환경에 있어서도 결코 덜 파괴적일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고 그것의 생산 능력이 더욱 증가할수록, 더 많은 노동을 배출하고 생산에서 더 많은 원자재와 에너지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발전은 사회적 궁핍의 증대(잉여 인구)와 자연 세계의 급격한 파괴를 수반하며[9], 종으로서의 우리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것의 토대에는 가치의 탈진(exhaustion)[10]이 있다. 이 체계가 달성한 생산 능력의 고도의 사회화 및 발전은 자본주의의 특수 범주들 (가치, 상품, 임노동) 뿐만 아니라, 계급적 생산양식들의 중추였던 것들 (사유재산, 가족, 국가) 마저도 역사적으로 퇴행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탈진은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점진적인 하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태를 보존하는 것이 불러올 재앙적 결과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생산력은 성장하기를 멈출 수 없기에, 이것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즉, 증가하는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사적 전유 간의 모순—은 더욱 격렬해진다. 자본주의는 죽이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동 기계이며, 이것은 우리가 현존하는 사회적 제관계를 혁명적으로 전복하지 않는 이상 멈추지 않는다.


3. 공산주의

이 다음의 생산양식,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연방, 마오주의 중국 혹은 카스트로-게바라의 쿠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 반혁명이 공산주의라며 제시한 것은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IWA)에서 발전된, 마르크스와 엥엘스가 이론적으로 종합하였고 특히 파리 코뮌의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깃든 혁명강령의 완전한 부정이다. 우리의 혁명운동에 있어, 반혁명이 혁명의 탈을 쓴 채로[11] 공산주의의 용어들을 하나하나씩 뒤집어 놓았다는 사실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었다. 우리는 제2-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맞서 물리적, 강령적 결투를 벌인 동지들, 그리고 그 칠흑 같은 세기에서 우리 계급의 다음 혁명 공세에 있어 불가결인 교훈을 도출해 낸 동지들의 입장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를 말하지만, 또한 볼셰비키와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공헌,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4인터내셔널과 단절한 그란디소 무니스 (그는 후일 FOR[12]을 창립한다), 아기스 스티나스 및 응오반후옛 등의 국제주의자들의 입장을 일컫는 것이다.


공산주의는[13] 돈, 상품,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이며, 마찬가지로 사회적 계급, 가족 및 국가가 없는 사회이다. 이러한 범주들을 철폐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국경이 파괴되고, 구성원들의 개별적 역량에 따른 인간의 필요에 기반하여 생산이 조직되며, 노동의 산물이 이러한 필요에 순응하는 식으로 분배되는 세계 공동체의 형성이다. 가치의 영원적 증식이라는 목적을 지니기에 생산 그 자체만을 위한 생산에 기반하는 자본주의와 대조적으로, 공산주의는 현재와 미래 세대의 인간적 필요를 향해 있기에 반생산주의적이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생산을 축소하고 변혁하는 과정을 수반하며, 또한 농촌과 도시의 분리를 주요 요소로 삼는 현 체계의 소비 형태가 강제한 영원적 낭비성을 제거하는 것을 수반한다.


공산주의는 그저 바람직하거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현실적 의의가 있다. 우리가 증가하는 추세로 겪고 있는 사회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의 원인인 가치의 탈진은 인간발전이 사유재산의 존재와 그 논리적 파생물을 (상품, 돈, 임노동, 사회적 계급, 가족, 국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의 자백이다. 일자리는 더욱 적어지며, 가치가 없는 돈이 우리를 둘러싸게 되고, 자본가 계급은 더욱 인격적이지 않게 되며, 가족은 영원적 위기에 처하게 되고, 국가는 내부 민족주의 세력과 외부 국제 자본 세력에 의하여 자신의 주권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자본주의 그 자체가 자신의 범주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 어느 생산양식도 무의 상태에서 출현하지 않으며, 도리어 선행하는 것의 내부 모순에 의하여 배태되는 것이다. 지난 한 세기동안 공산주의는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현행성은 현저하며, 시의적이다.


4. 세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현존하는 제관계를 부르주아 국가 내부에서부터, 즉 노동자 세력을 현 체계 내에서 확장시키는 점진적인 입법 절차를 통하여 변혁시킬 수는 없다. 또한 협동조합이나 생태마을, 스쾃(무단점거) 및 여타 비슷한 운동을 통한 점진적인 사회적 절차를 통해 국가와 평행적으로[14] 이를 변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주관리(self-management)는 사장이 없으면 착취도 없다는 이념을 통해 자본주의적 착취를 내제화하게 하는 함정이다. 자본주의의 종식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고유의 권력 기관—계급적 결사 및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수립하는 폭력적인 반란을 통해, 계급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기를 들고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국제적 본성을 지닌다. 혁명이 세계적으로 확장되지 않는 한, 그 어느 지역에서도 가치의 종식은 있을 수 없다: 일국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15]. 마찬가지로 사회적 계급의 존재 또한 종식될 수 없게 되며, 이는 계급독재가[16] 요구되는 것이다. 반란 지역의 내부에서 이 독재는 부르주아적 반동과 상품 관계에 맞서 권위주의적으로 자신을 내세워야 하며, 그 첫날부터[17] 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 및 분배하고, 기본 생계 수단을 무상 지원하고, 생산수단의 생산에 대한 탈투자(disinvestment)와 동시에 소비를 위해 이것을 전환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외부적으로는 이 과정이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보호수단으로서, 인터내셔널은 반드시 세계 혁명의 확장과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덮는 무국경 계급독재의 확장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촉진해야 한다. 따라서 인터내셔널은 각 국가별 당들의 연맹이 될 수 없으며, 인터내셔널은 그 다양한 지부들, 특히 프롤레타리아 반란이 승리를 이룬 곳의 지부들이 모두 귀속되는 단일한 강령을 지닌 단일한 세계당이 되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혁명을 국제적으로 쟁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치를 종식시키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계급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태어난 기관인 국가는 마침내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추방되게 된다.


5.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공산주의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최소이다: 1848년 및 1871년의 혁명을 후행하여 1917년 촉발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세계적 공세 이래로,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물질적 가능성이었다[18]. 따라서 모든 부르주아-민주주의적 혹은 개량주의적 요구는 이미 죽어 있었어야 할 체계를 회복시키려 하기에, 혁명에 반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혁명가들이 그들의 최대강령인 공산주의로의 투쟁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요구들을 최소강령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민족 “해방” 운동의 지지와도 대립하게 된다. 이것은 그 정의에서부터 새로운 부르주아 국가의 설립을 추진하는 것이고, 계급 간의 대립이 아닌 인종과 민족 간의 대립을 투쟁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적 분쟁에서 가지는 이해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켜 그들이 수호하게 하는 것이고, “인민 간의 연대”, 말하자면 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해외 지지를 국제주의와 혼동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를 가장 잘 특징짓는 조직 형태로서, 민주주의[19]의 수호는 늘 그 국가의 강화를 수반하며, 늘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의 수호가 의회 참여나 입법 개혁을 장려하는 직접적인 것이든, 혹은 군사독재나 파시스트 독재를 직면하여 “차악”을 택하는 간접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역사적으로 반파시즘[20]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있어 상당한 패배였다. 이것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을 의미했고, 이는 그들이 스스로 파시즘의 손아귀에 떠넘긴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국제주의를 버리고 이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취급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노동조합주의[21]는 일터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노동 측의 요구에서의 투사 활동을 전문화하여, 일부 노동자들을 이끌어 결국 나머지로부터 자율성을 얻게 되는 영구적 조직을 설립하게끔 하고, 이를 협상의 기구로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만드는 것, 즉 자본과 조정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통하든 이보다 수평적인 다른 방식을 사용하든, 노동조합주의는 늘 노동자들의 즉각적 이익을 그들의 역사적 이익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을 내포해 왔다. 노동조합은 이 분리를 공고화하는 형태이다: 이것의 기능은 노동력의 가치를 자본과 협상하는 것에 있기에, 이는 자신의 존재의 기반인 임금노동에 맞선 투쟁에 그 어떤 이해관계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노동조합이 혁명에 반대한다면, 이는 노조 위원장들이 아니라 이들을 매번 생성해내는 바로 그 활동에 의한 것이다.


페미니즘[22], LGBTQI+ 운동, 생태주의[23], 반인종주의 혹은 주거권 운동과 같은 소위 “사회 운동”들은 늘 어떤 식으로든 국가의 개혁으로 귀결되며, 국가에 맞선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들이 본인의 특수한 사안을—비록 이들은 부인할지언정—자본주의에 맞선 세계적 투쟁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통일전선 본성이 진지하게 혁명을 갈망하는 투사들로 하여금 명백히 개량주의적이거나 온건파인 이들과 협력하게끔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산주의좌파가 제3인터내셔널 초기에 볼셰비키에게 경고한 바와 같이[24], 이러한 협력에서 패배를 보게 될 쪽은 바로 혁명가들, 즉 더 수용하기 쉽고 더 듣기 좋은, 따라서 사회적 평화의 시기에서 다수를 이루는 자들에 맞추어 전술을 형성하게 될 혁명가들이다.


이러한 “사회 운동”들은 다음과 같은 계급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즉 특정 즉각적 요구의 수호에서 시작하여, 한 투쟁이 마치 기름과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각 부분들과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운동; 이를 촉발한 동기에서 그 내용을 일반화하여 체계에 대한 더 일반적인 대항을 도출하는 운동;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가들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고유의 행동 조직—노동자들의 결사, 지역적 결사 등—을 창설하는 운동을 말한다. 그러나 즉각적 투쟁에서 하나의 운동으로의 확장과 일반화의 이행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다. 그 누구도 다리를 무너뜨릴 마지막 마차가 무엇일지 알지 못하며, 안다고 해도 이를 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계급으로—따라서 당으로—'구성하는 이행과정’에서 생성하는 유기체[25]를 “사회 운동”을 구성하는 집단이나 조정기구로 착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실적 운동이 결여된 채로 부분적 투쟁에 전념하는 만큼, 이들은 그 정의가 시사하듯이 다른 것으로 진화할 수 없으며, 늘 맹목적인 활동을 선동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이는 구성원들의 피로나 좌절을 야기하거나, 종종 그렇듯이 그들의 요구에 대한 가능주의적 해결책, 즉 다시금 국가를 찾게 된다.


6. 당과 계급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의 물리적 사실, 자본주의 사회라는 대지에서 태어나는 현실적 운동이다. 이 생산양식의 모순들은 영원적으로 사회적 적대성을 형성하며, 이는 그 주인공들에 있어 논리적 판단의 시간이 주어지기도 전에 계급 간의 충돌을 부추긴다. 따라서 즉각적 투쟁의 시작은 개인들로 구성된 한 집단의 의지로 인하여 야기될 수 있는데, 그러나 계급운동으로의 이것의 일반화는 이들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다. 이것이 혁명적 소수가 계급의 일부로서 이러한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이러한 개입은 항상 구체적이고 현시적인 요구보다는 투쟁의 본질적 요소들의 해명을 위한 강령적 관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는 자기조직화, 확장, 일반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다—이 모든 것은 계급의 독립과 국제주의의 발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건설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혁명도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26]. 정확히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기 때문에, 의식은 적절한 전술과 전략을 통해 계급에서 “헤게모니”를 달성하여 이를 실행시키는 혁명적 소수에 의한 선동과 포교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의식의 문제, 이념의 문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촉발되는 즉각적, 물질적 투쟁의 산물이며, 일반화와 확장의 과정에서 이에 참여하는 자들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계급, 자본을 위한 계급이 되기를 그만두고 지배계급과 대립하는 사회적 세력이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의미한 바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계급으로 구성하고, 따라서 당으로 구성하는 것이다[27].


그렇기에 우리의 계급 개념은 부르주아 사회학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후자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일정 수준의 수입과 함께 각 프롤레타리아 개인이 투표하는 결과나 여론조사에서 이들이 응답한 결과의 통계에 따라 파악된 일련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생산에서의 특정한 위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총합을 일률적으로 묶어버리는 범주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계급운동의 부재의 상황에서 각 프롤레타리아 개인의 의식은 서로 상이하며 지배적 이데올로기, 즉—좌파건 우파건—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예속되어 있다. 반대로 사회적 평화가 붕괴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고유의 계급 유기체를 통해 투쟁하게 되면, 이것의 의식은 같은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한 계급과 다른 계급 간의 충돌; 즉, 현존하는 질서를 보존하려는 세력과 다음 생산양식으로의 사회적 변혁 세력의 충돌의 표출.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그 계급은 고유의 혁명적 소수, 자신 고유의 당[28]을 생성하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 국제적 이해관계를 가장 굳건히 수호하는 기관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투쟁하는 계급 자체의 내부에서 강령적 해명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위와 같이 이해된 당은 계급의 역사, 경험, 승리, 패배를 종합하는 이론적, 강령적 집적체이다.


역사의 수준에서 이는 영원적인 피드백 과정이다. 혁명 조직은 계급투쟁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사회적 폭발을 선행하는 것이다. 이들은 선행하는 최고도의 계급투쟁의 이론적 해명의 산물인 공산주의 강령과의 연결을 위해 분투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일반적으로 투쟁하게 될 때 그 운동이 촉발시킨 즉각적 요구들에 대한 방어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즉 체제의 폭력적인 변혁을 통한 모든 계급의 철폐—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이들은 그 내부에서 계급 그 자체와 그 역사적 강령의 연결을 가속화하는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요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당 개념은 동시에 레닌주의적 관점이나 평의회주의적(councilist) 관점과는 상이하다. 이 두 관점은 같은 동전의 양면인데, 이들 모두 계급과 당을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레닌주의적 혹은 트로츠키주의적 관점에서—이들은 레닌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계급은 당이 외부에서부터 의식을 주입함으로써 형상(form)이 부여되는 미규정적 질료(indeterminate matter)이다. 평의회주의적 관점에서의 당은 계급이 혁명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는 관료적 장애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 있어서 계급과 당 사이에는 불가분의 통일성이 있다: 당은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계급으로서 구성하는 순간들의 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혁명의식을 가속하고 정밀화하는 요인으로서 (즉 공산주의 강령의 확인을 통해 자신의 즉각적 이해관계를 역사적 이해관계에 연결하는 특수한 조직으로서[29]) 활동하게 되는 순간들의 산물이다. 계급과 당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혁명은 건설되는 것이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으로서 투쟁하게 될 때마다 이는 고유의 혁명적 지도부, 고유의 당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 반란을 유발한 것이 아니며, 이것이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공장에서의 점진적인 주입·선전 사업의 결실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반면 이들을 혁명적 계급 관점의 급진화 및 심화의 요인으로 만든 것은 이들이 이전부터 시행해 온 독립 조직으로서의 대비 및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들이 비타협적으로 방어한 계급 자율성과 혁명적 패배주의이다. 이와 동시에 볼셰비키당으로의 혁명프롤레타리아트의 대규모 입당은 공산주의적 반란의 굳건한 전념이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스탈린과 같이 임시정부를 방어하는 것에 그쳤던 당내 보수적인 요소들을 넘어설 수 있게 하였다.


역사적 의미에서의 당은—즉 우리가 지금껏 사용해 온, 마르크스가 『선언』에서 사용한 의미의 당—특수한 형태의 조직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당(formal party)의 각 변모는 변질의 과정에 의해 해체되어 그 어느 형식적, 우발적 조직도 이것에서 안전할 수 없다. 공산주의적 소수의 기능은 늘 공산주의 강령을 방어하고 적용하기 위함이다. 혁명적 위기의 시발점,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계급으로서 구성하고 고유의 행동적 유기체를 형성하여 혁명적 지도부를 창출할 때, 형식당과 역사당(historical party) 간의 표면적 모순은 해소된다. 바로 이때 역사적 및 강령적 의미에서의 당이 비로소 중앙화적 요인으로서 혁명가들이 수렴하는 형식적 조직이 되는 것이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당원 수가 네 배로 급증한 볼셰비키당이 바로 이러한 경우였다. 이들 중에는 (아나키즘을 포함하는) 다른 형식적 조직과 프롤레타리아 동향 출신의 혁명가들이 다수 있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는 트로츠키가 있다. 이러한 과정은 형식적 조직이 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원리를 희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도리어 공산주의의 역사적 강령이 혁명가들에 있어 그 수렴과 중앙화의 요인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결코 혁명적 소수의 의지로 건설하거나 일으킬 수 없다. 혁명은 건설되는 것이 아닌, 그 방향이 잡혀지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당 역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잡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혁명적 위기의 순간에서 의지와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즉 계급과 혁명가들이 공산주의 강령을 위한 투쟁으로 수렴하는 경향의 과정에서, 비로소 실천의 전도[30]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혁명적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모순의 축적이지만, 일단 이것이 발생하면 승리를 규정하게 되는 것은 세계당으로 조직된 강령적 명확성과 의지이며,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서 사회적 제관계를 규정하게 되는 것은 집단적 의식과 의지이다. 공산주의는 종을 위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하며, 인간존재가 자신의 사회적 생활에 있어 주도력을 지니게 되는 첫 사회인 것이다.


7. 현 상황 및 혁명가의 과업

혁명, 계급 및 당은 일련의 개인에 의한 의식적 건설 활동의 결실이 아니라 이 생산양식의 모순들이 생산한 물질적, 물리적 현상이기에, 투쟁의 역사적 시기를 이해[31]하는 것은 혁명가들에 있어 근본 요소이다. 우리에 있어 이 시기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의 탈진, 즉 가치가 역사적으로 그 내적 한계에 다다르는 순간이다. 경제적 위기는 심화되고 고도화되어 사회적 궁핍은 절대적으로 증가하고, 일자리가 축소되고 불안정해지는 동안 기본 생계수단은 (식량, 주거, 전기, 교통 등) 더욱 비싸진다[32]. 환경 재해가 줄지어 발생하며, 새로운 보건 위기[33]가 발생하고, 제국주의 분쟁이 악화되며, 자본가 세력은 다음의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욱 극심한 계급운동이 발생하게 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이를 촉발시키는 모순들은 자신을 탈진시키는 과정에서 개혁의 물질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자본이 해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발은 여전히 해방적 관점의 부재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1930년대에서 60년대까지가 그 암흑기였던 스탈린주의 반혁명에서 비롯된 극심한 역사적 단절에 의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공산주의, 국제주의 혹은 계급 독립성 등의 단어의 의미는 정반대로 변질되어 제2차세계대전의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고, 죽임을 당하거나 모스크바 혹은 워싱턴으로 전향하지 않은 혁명가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세계를 휩쓸던 투쟁의 물결은 서서히 반혁명적 부식 과정을 밟게 되었고, 90년대의 침체기 이후, 이 세기의 초반에서 우리는 비로소 반혁명과 혁명적 격화의 새로운 장 사이에 놓인 ‘양서적(兩棲的, Amphibious)’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는 강령의 혁명적 재건이 즉시 수반되지 않아 반혁명적 부식이 남긴 역사적, 강령적 혼란이 공존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할 수단이 부족해질 때 계급투쟁을 재개할 사회적 세력을 지니기에, 양서적인 상황인 것이다.


혁명가의 과업은 항상 같지만, 직면한 역사적 시기에 따라 다른 우선순위를 얻게 된다. 전투에서의 개입, 운동의 자기조직화의 추진, 피해를 회복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자율성의 수호, 혁명적 흐름의 국제적 중앙화의 추진,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를 위한 무장봉기의 조직화가 우리 운동의 중점이 되는 본격적 계급투쟁이나 혁명적 상황에서와 달리, 반혁명의 시기[34]에서 이는 동일할 수 없다. 이 시기에서 우리의 노력은 패배의 가늠과 강령의 유지에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기존 틀을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폭발에서의 강령적 혼란이 특징이면서도 그러한 폭발들이 증가하는 강도로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과도기에서는 혁명적 입장을 해명하고 수호하는 과업이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다른 지역의 혁명적 소수와의 접촉과 논의를 추구하고, 촉발될 계급운동에의 참여와 함께, 이 안에서부터 이들이 지니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비판하고 노동조합 및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이들의 계급 자율성을 강화하는 과업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오늘날 우리는 다음의 혁명적 격화로 이어질 상당히 초반의 국면, 따라서 상당히 혼란스러운 국면에 서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강령과 다시금 관계하기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을지라도, 현 생산양식의 고난은 많은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러한 시기에서는 앞으로 전개될 결정적 대립의 순간에서 우리의 계급을 위해 타협 없이 투쟁하며, 그 강령을 다시금 전유하고, 이를 실천을 통해 발현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히 능동적인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가 오늘날의 혁명가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이 실천이라 하면 유일하게 즉각적으로 이론이라 할 수 있는 인간실천, 바로 혁명이다.


역주 및 참고문헌

[1] 바르바리아: 「결정론과 혁명 (Determinismo y revolución)」

[2] 바르바리아: 「교차하는 자본주의? (¿Interseccionando el capitalismo?)」

[3] 바르바리아: 「상품의 물신성 (Fetichismo de la mercancía)」

[4] 역주: 본 글에서 nación, nacional (영: nation, national) 등의 표현은 문맥이 구체적으로 민족문제나 민족주의가 아닌 부르주아 근대성 일반을 말하고 있는 한, ‘나라’, ‘국민국가’, ‘국민’ 등으로 대체한다. 그 이유는 부르주아 근대국가가 민족체(nationality)를 국민(인민)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법적 주체로 규정하여 국가로 포섭하는 작용을 전근대적, 영원적 뉘앙스가 강한 민족(ethnos)이라는 개념이 올바르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5] 로자 룩셈부르크: 「민족문제와 자치 (Kwestja narodowościowa i autonomja)」

[6] 바르바리아: 「인종, 인종주의, 인종화: 공산주의적 관점 (Raza, racismo, racializatión: una perspectiva comunista)」

[7] 바르바리아: 「혁명적 패배주의의 이유 (El porqué del derrotismo revolucionario)」

[8] 바르바리아: 「여성, 가부장제 그리고 자본주의 (Mujer, patriarcado y capitalismo)」

[9] 바르바리아: [연설] 「긴축은 이제 녹색이다. 그린뉴딜과 자본주의적 재앙에 대하여 (La austeridad será verde. Sobre el Green New Deal y la catástrofe capitalista)」

[10] 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II. 자본에 관한 장] 중 “기계에 대한 단상”으로 알려진 [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 (MEW 42, [Fixes Kapital und Entwicklung der Produktivkräfte der Gesellschaft])

[11] 바르바리아: 「스탈린주의: 자본의 붉은 깃발 (El estalinismo: bandera roja del capital)」

[12] 혁명노동자촉진 (Fomento Obrero Revolucionario)

[13] 바르바리아: 「현실적인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단상 (Apuntes sobre el comunismo como movimiento real)」

[14] 바르바리아: 「자본의 숲 속의 로빈 후드 (Robin Hood en el bosque del capital)」

[15] 바르바리아: 「스탈린의 자본주의 (El capitalismo de Stalin)」

[16] 베르체시 (Vercesi. 본명: 오토리노 페로네. Ottorino Perrone): 「국가에 관한 문제 (La question de l’etat)」

[17] 아마데오 보르디가 (Amadeo Bordiga) : 「즉각적 혁명 강령 (Il programma rivoluzionario immediato)」

[18] 바르바리아: 「자본주의의 쇠퇴, 연속혁명, 그리고 이중혁명에 대하여 (Sobre la decadencia del capitalismo, la revolución permanente y la doble revolución)」

[19] 자크 카마트 (Jacques Camatte): 「민주주의적 신비화 (La mystification démocratique)」

[20] 국제공산당-PCI (El Comunista): 「파시즘과 반파시즘. 같은 동전의 양면 (Fascismo y antifascismo. Dos caras de la misma moneda)」

[21] 그란디소 무니스 (Grandizo Munis): 「혁명에 반하는 노동조합 (Los sindicatos contra la revolución)」

[22] 바르바리아: 「왜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Por qué no somos feministas)」

[23] 바르바리아: 「탈성장 그리고 궁핍의 관리 (El decrecentismo y la gestión de la miseria)」

[24] 바르바리아: 「우리 존재의 과거: 공산주의좌파의 기원에 대하여 (El pasado de nuestro ser: Sobre los orígenes de la izquierda comunista)」

[25] 역주: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 및 이들의 유기주의에 영향 받은 여러 경향에서 기관(organ), 조직화(organization)의 개념은 유기체(organism)의 개념, 즉 유기적 조직체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계급당과 같은 사회적 편제를 다루는 경우 이는 전적으로 유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스페인어에서 조직을 일컫는 단어는 ‘el órgano’, ‘la organización’과 ‘el organismo’가 있다. 해당 글에서 이는 차례로 ‘기관’, ‘조직/조직화’, ‘유기체’로 번역되었다.

[26] 바르바리아: 「자본주의적 재앙 그리고 혁명이론 (Catástrofe capitalista y teoría revolucionaria)」

[27] 로제 당주빌 (Roger Dangeville): 『계급당: K. 마르크스 - F. 엥엘스 (Le parti de classe, K. Marx – F. Engels)』의 서문

[28] 바르바리아: [연설] 「계급과 당의 관계 (La relación entre clase y partido)」

[29] 자크 카마트: 「당 형태의 기원과 기능 (Origine et fonction de la forme parti)」

[30] 아마데오 보르디가: 「마르크스주의 학설에서의 이론과 행동 (Teoria e azione nella dottrina marxista)」

[31] 바르바리아: 「혁명적 관점에 대한 열 가지 단상 (Diez notas sobre la perspectiva revolucionaria)」

[32] 바르바리아: 「가치 위기 속의 대지 (La tierra en la crisis del valor)」

[33] 바르바리아: 「자본의 판데믹 (Las pandemias del capital)」

[34] 아마데오 보르디가: 「일반적 상황이 역사적으로 비우호적일 때의 당의 유기적 활동에 대한 고찰 (Considerazioni sull'organica attività del partito quando la situazione generale è storicamente sfavorev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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