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없는 초보 BM 성장기
드디어 MVC(미션/비전/핵심가치)가 완성되었다. 복귀하고 처음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막막했던 과정을 거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임원진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우리 회사의 정체성을 담아낸 문구들을 만들어냈고, 마지막에는 임원진 중 한 분께 "이제는 다른 사람을 컨설팅해도 되겠다"는 극찬까지 들었다.
MVC 프로젝트의 프로세스는 단순했다. 임원진과 미팅을 통해 회사가 현재까지 해온 것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핵심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핵심을 바탕으로 회사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궁극적인 목표(미션), 미션을 이루기 위한 중장기적 목표(비전) 그리고 의사결정과 업무 수행 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약속(핵심 가치)으로 풀어냈다. 쉽게 말해 임원진의 생각을 응축하여 명확하고 강렬한 문구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MVC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워크숍을 하면서 직원들의 의견을 듣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는 내부 사정으로 인해 이 과정이 생략되었다.
MVC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1. 수단보다 목적
미션이나 비전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기술을 통해", "데이터화하여" 같은 표현은 중심을 사람에서 기술로 옮기는 효과가 있어 제거했다.
2. 간결하고 명확하게
한 줄에 12자가 넘어가면 문구가 급격하게 길게 느껴져 두 번 읽게 되기 쉽다. 미션이나 비전은 한 번 읽었을 때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했기에 12자 이하를 목표로 했다. 또, 기업 미션으로 추상적인 문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업부가 너무 다양해서 하나의 업종으로 한정하기 어려운 대기업에 적합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프로덕트나 서비스가 명확한 경우, (요즘 스타트업의 추세이기도 하지만) 미션만 봐도 이 회사가 뭘 하는 곳인지 예측 가능해야 좋은 미션이라고 느껴졌다.
3. 직접적인 업종 관련 워딩 지양
이건 개인적인 선호보다도 나의 고객이자 고용주인 우리 회사 임원진의 뜻이었다. HR, 채용 등 직접적인 업종 관련 워딩을 쓰면, 스스로를 한정 짓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토스의 "누구에게나 쉽고 상식적인 금융"처럼 직접적이면서도 명확한 미션을 선호했지만, 임원진의 확고한 뜻을 반영해 간접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4. 경영 목표식 비전 vs 미션과 비슷한 비전
비전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5년 안에 업계 1위 달성', '3년 안에 업무 효율 50% 개선' 같은 경영 목표식 유형과, 미션과 유사하게 숫자 없이 풀어쓰는 유형이다. ATS와 TRM 솔루션을 운영하는 기업인 두들린(그리팅)의 경우는 후자를 택했는데, "채용을 단순하게"라는 비전으로 어떻게 단순하게 할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 궁금증은 프로덕트인 ATS와 TRM을 통해 해소되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 경영 목표식 비전을 제안했지만, 이는 경영 목표에 별도로 배치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수용하여 미션과 유사한 비전 형식을 채택했다.
분골쇄신한 끝에 꽤 만족스러운 MVC가 완성되었다. 핵심 가치는 8년의 업력 동안 임원진이 중요하게 생각해 온 가치를 반영했다. 기존의 7-8개에 달하는 가치를 유목화하여 4개 이내로 정리했다. 핵심 가치가 너무 많으면 기억하기 어렵고, 결국 내재화되지 못한 채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전이라 최종 결과물을 공유할 순 없었지만, 나중에 발표하게 되면 내용을 추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단순히 문장을 다듬고, 말을 예쁘게 꾸미는 스킬만 향상된 게 아니다. 임원진과 거의 매일 소통하며 그들의 업무 스타일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일을 하는 능력이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1인팀의 초보 팀장으로서 내 역할과 권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무조건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팀장이 되고 자율성이 주어지는 만큼 책임감도 커지면서,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의견이 다를 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상대방의 진짜 걱정을 파악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MVC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비주얼 아이덴티티, 인터널 브랜딩, 익스터널 브랜딩까지 갈 길이 멀지만,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선다. 아직까지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