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분기 회고
한국에 들어온 지도 거의 두 달이 되어간다. BX 팀장직을 맡고 새로운 직무를 접하면서 하루를 한 달 같이 보내서였을까. 두 달 전까지 마드리드 거리를 제 집처럼 익숙하게 다니던 것이 이젠 아득하게 느껴진다. 일상을 여행같이 보내면서도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지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게 무색하게 현실에 치여 살기 바쁘다. 하지만 정신없이 보내는 만큼 회고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오늘은 1분기 회고를 해보려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업무의 범위다. 대기업은 규모가 큰 만큼 업무별 담당자가 명확하게 체계화되어 있기에 나의 업무만 철저하게 집중해서 역량을 키울 수가 있다. 그런데 중소기업의 경우는 항상 인력이 부족하여 업무마다 담당자가 세세하게 배정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것도 내가 해야 되나?" 싶은 상황을 적지 않게 마주한다.
작년까지 SaaS 프로덕트의 마케팅 팀원으로서 있을 때도 그랬다. 나의 업무가 꽤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에 애매한 업무가 생겼을 때 내가 맡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귀국 후 업무에 복귀하고 나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팀원 없는 팀장에 회사 전반의 브랜딩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건 단순히 남는 업무를 해내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업무 범위를 만들어 가면서 이 업무에 연관이 된 부분까지 관여해야 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브랜딩에는 인터널 브랜딩의 영역이 있는데 내부적으로 조직 문화 담당자가 없다 보니까 이 역할까지도 내가 어느 정도 커버해야 한다. 또, 브랜딩을 맡게 된 후로 수뇌부와 이야기를 할 일이 급격히 많아졌다. 그러면서 회사의 주요 사업을 구석구석 살펴볼 기회가 많이 생겼는데, 이때 아이디어를 몇 번 공유했더니 어느새 브랜딩뿐 아니라 사업 개발까지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잔잔한 업무가 넘어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거대한 두 가지 업무에 인볼브 된 상태가 되면서 주위에서 정말 많은 걱정의 시선을 받았다. 대부분 마케팅 커리어에 대한 것이었는데,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고 브랜딩에 사업 개발만 하고 있으니 (심지어 체계적으로 배우고 훈련받는 것보단 진짜 맨 땅에 호미로 한 칸씩 밭을 갈아가는 느낌이기 때문에) 커리어를 어떻게 정리하려고 하냐는 거다.
난 기본적으로 롤모델을 정하거나 미래에 내가 어떤 모습일지 꿈꾸는 것 등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간의 계획들이 여러 번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보단 현재를 불태워 열심히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어렴풋이라도 미래를 그렸을 때 마케터의 모습으로 사는 그림은 없었다.
마케팅은 나에게 그간 열심히 해왔고, 재미도 있고, 적당히 잘하면서 앞으로 더 잘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평생 이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사업가의 모습을 꿈꿔왔기에 마케팅에서 많이 벗어나는 일을 시키더라도 다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 느껴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생판 처음 하는 일을 팀장급으로 하는 것은 예상대로 정말 쉽지 않았다. 아니 상상 이상으로 너무 어렵다. 배울 것들, 공부할 것들이 끝도 없이 많고 매일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가 이변 없이 지나가면 정말 감사할 정도이다. 힘듦으로 인한 고통은 점점 무뎌지지만, 그럴 때마다 또 새로운 레벨의 힘듦이 얼굴을 내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쳐내는 식의 일이 아니라 굵직한 것들을 주도적으로 해보면서 힘든 만큼 내가 정말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1분기는 적응, 적응, 적응의 연속이었다. 물론 2분기에도 적응은 계속될 예정이지만 실질적인 아웃풋이나 작은 모멘텀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일에 너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다 보니 퇴근하고 나서는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가떨어져 버린다. 2분기에는 적절히 에너지를 분배해서 퇴근 후에도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힘 정도는 남겨두는 연습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