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
남편은 연초에 크게 열리는 해외유학박람회를 다녀왔다.
다녀온 후 그가 전한 결의와 기대감은 마치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있던 환자가 원기를 회복하고 퇴원하는 날의 해방감을 보는 듯했다. 평범하고 반복되던 우리의 일상에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아났다.
함께 그리워하던 미국이 아니라도 다시 새로운 길을 걷게 된 설렘이 시작된 것이다.
그 감정도 잠시, 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 대부분은, 낯선 땅에서 마주할지 모를 예기치 않은 비용들을 감당할 만큼의 여유가 우리에게 없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 그냥, 당신이 1년 과정을 혼자 먼저 나가서 해보고, 영주권 나오면 내가 아이들과 들어가는 건?
남편: 안돼, 아이들의 시간이 아까워. 그리고 혼자서 애들이랑 생활하는 건 쉬울 것 같아?
나: 그럼 당신과 아이들만 먼저 가고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을 지속해서 생활비를 보내줄게. 당분간 기러기로 살겠지만, 생활은 더 안정되지 않겠어?
남편: 안돼, 다 같이 가야 아이들도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고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 물론 다 같이 가면 좋겠지만, 이 과정은 배우자에게 work permit을 안 준다잖아. 합법적으로 일할 사람은 오빠뿐인데 생활이 유지되겠어? 정 그렇다면 회사에 말해보고 현재 하는 재택근무를 유지할 수 있다면 나도 가는 것으로 하고 안된다 하면 셋이 먼저 가는 것으로 하자.
남편: 그래 한번 물어봐. 부딪혀보지 않고 안될 것만 생각하면 우린 나갈 수 없어.
사실 남편에게 던지는 나의 질문과 온갖 안전에 대한 의심들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마음은 남편의 대답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번갈아서 변덕을 부리며 계속해서 의심하고 확인하라고 했다.
정말 갈 거야?
회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안 갈 생각으로 마음먹었는데, 회사가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처음엔 그 소식을 전하며 서로 기뻐 뛰었으면서 간사한 내 마음은 계속 안전한 길을 모색했다.
'그렇게 나갔다가 회사일도 제대로 안되고 그러다 잘리면 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보증금 그 돈으로 1년 빠듯하게 버틸까 말까인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둘 다 맞벌이하고 있는데 이것을 다 놓고 같이 가는 게 맞는지. 단 1~2년이라도 얼마를 모아서 최소 2~3년은 버틸만하게 준비해서 나가는 게 어때?
남편: 회사가 허락하면 간다고 했잖아. 그렇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못가. 그렇게 하다가 12년이 흘렀어. 마음먹었을 때 그냥 가자. 가서 돈은 벌 수 있어. 나만 믿어.
나: 우리 둘이면 모를까, 아이들까지 넷인데 우리가 신혼 때 미국 지내봐서 어느 정도 예상이 되잖아.
남편: 결정을 해놓고도 왜 이리 맘을 바꾸는 거야.
수차례 언쟁이 오고 갔다.
어느 때보다 확고한 그는 내가 가정한 모든 상황과 고민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유학원에 진행하기로 통보했기 때문에 번복 없이 반드시 꼭 갈 거라고 했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또 왜 이렇게 갑자기 온갖 가능성을 예상하고 이리저리 안될 이유만 찾는 것일까?
캐나다 현지 한인카페에 가입해서 지극히 솔직한 우리의 상황을 낯선 이들에게 털어놓았다.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길면 1년 정도라고 다시 잘 생각하라고들 했다. 게다가 영주권을 받아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 재정으로 나올 생각을 하느냐고, 무모한 것 같다고 꽤 따끔하고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었다. 지금은 목돈이라 생각되겠지만 사악한 물가에 그 정도는 금세 축나버릴 거라고도 했고, 아이들이 적응도 제대로 못하고 되돌아가는 가정들도 많다는 사례도 들어 친절하게 개인 메시지까지 보내주었다.
"마음먹는 것 따윈 얼마 못 갈 것이고 정착을 원한다면 더 많은 돈을 준비해서 오라".
우리가 살아본 20대의 미국과 해외살이는 뭐라도 하면 많은 기회들이 있다 느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의 대이동은 참 쉽지 않을 수 있겠구나.
고민하던 나는 아빠께 전화로 이런저런 내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이제 곧 여든이 되시는 부모님이 속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 어느 정도 맞벌이로 자리 잡아가니, 딴생각 말고 진득하게 집도 사고 애들 교육도 신경 쓰라고 할 법했다.
부모님의 당연한 그 반응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면 남편과 같은 마음을 먹고 그와 함께 하라 하셨다.
자신은 그런 도전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는데, 이렇게 지나고 보니 몇몇 순간들은 도전할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며, 그렇게 굳게 결심했다면 힘을 모으고 한 마음으로 도전해 보라고.
해보고 정 안 돼서 다시 돌아온다면 엄마아빠 집으로 와서 다시 시작을 모색해도 된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만 앞세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나중에 후회할 수 있다고.
사랑하는 손녀들을 위해서 엄마, 아빠는 응원하고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힘차게 화잇팅을 외치며.
아빠의 진솔한 말씀을 들으며 마음속에서 무언가 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현실이 두려워 자꾸만 이유를 만들고 있었다.
아빠의 짧고 단단한 격려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라지만, 가보기 전엔 모르는 길도 있는 법이다. 도전하라.”
아빠와의 대화는 잊고 지냈던 나의 용기를 불러냈다.
응급실에서 보낸 3년, 그 어둠의 시간 속에서 나는 오히려 개발도상국 의료봉사를 꿈꿨다. 현실이 전부라 여기며 선배들을 욕하고 조직을 비난하며 염세적으로 살아가던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피터팬처럼 혼자 꿈을 꾸고 날아올랐다.
무모했던 그 도전은 결국 현실이 되었고, 그때 나는 고작 동기들 월급의 3분의 1만 벌었지만
그 경험은 지금의 나를 더 넓고 큰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안다. 돈이 모든 결정을 가늠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생의 큰 결정은 결국 흔들림 없는 결단이다.
완벽한 조건과 상황만 따지다 보면 영영 시작조차 못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마음먹었으니, 일단 한 걸음을 내디뎌보자.
길은 언제나 걷는 자의 것이니까.
그날 우리는 캐나다행 편도 비행기 티켓과 첫 숙소를 예약했다.